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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8:10~18 죄를 자복(自服)하고 2018. 7. 18

 

10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받느니라11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나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아느니라 12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 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14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 15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 16 무지한 치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 17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니 그를 막지 말지니라 18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

 

본문 10절입니다.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일이 이 세상에는 많이 일어납니다. 자기 혼자 악한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가는 자도 악한 길로 유인하는 것은 악의 연대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악의 길로 인도하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악의 길로 유인하는 자는 결국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악한 길에 넘어가지 않는 자를 성실한 자라고 하며 이러한 자는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올해 11일부터 모든 주일학교에서 삼년에 걸쳐 성경을 한번 읽기 위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교사들이 학생들과 함께 성경을 읽은 것을 확인하고 읽은 내용을 나누게 합니다. 그리고 전도사님은 설교시간에 한 주간 읽은 성경의 본문으로 설교합니다. 그렇게 하면 주일학교와 중고등부를 다 수료하면 성경 네 번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하루에 성경을 한두 장 읽으면 됩니다. 시간으로는 5분정도이며 묵상까지 해도 하루 10분이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하기가 힘이 듭니다. 몇 사람이 그렇게 하는지 전수조사를 하지 않았지만 많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하루에 10분을 말씀보고 기도하는 일이 힘이 듭니다. 왜 그럴까요?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가 우리 속에 숨어 있습니다.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가 우리 안에 숨어 있기에 우리가 분별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보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첩경(捷徑)이 되는데도 우리는 온갖 핑계를 다 됩니다. 하루 동안 게임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은 몇 시간을 들여도 더 하고 싶어 하는데 말씀을 보고 기도하는 것은 십분도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실한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어떤 복입니까?

 

시편 1편을 봅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1)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 일뿐만 아니라 모든 구약의 서론으로 보아도 됩니다.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들이 정직한 자를 유인하는 모습도 여기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의 유혹을 물리치는 성실한 자의 모습도 다 담고 있습니다. 복이 있는 성실한 자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그 율법을 묵상합니다. 무엇이 멸망의 길인지 무엇이 복된 길인지를 자신의 가치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으로 분별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는 그 말씀의 인도를 받아 생명의 길을 갑니다. 이것이 참된 복을 받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나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안다고 합니다. 다른 번역을 보면 이렇습니다. “부자가 자기 보기에는 지혜롭지만, 가난하나 슬기로운 사람은 그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본다.” 여기서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지만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안다고 봐도 되고,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지혜롭다고 여기는 그 부자의 속을 꿰뚫어 본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를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는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느 누가 말해도 자기를 지혜롭다고 여기기 때문에 고쳐지지가 않습니다. 이런 부자는 물질만이 아니라 지식이나 자기 의로도 부자가 될 수 있기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부자는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가난한 자와 모든 죄인들이 다 예수님의 말씀이 들린 것은 아닙니다. 자기 의로 가득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과 대비하기 위하여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의인을 부르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 자는 자기를 지혜롭다고 여기는 부자들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정말 가난하고 병든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으로 부요하신 분으로서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것은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고후8:9).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자기를 보고 가난하고 비참한 죄인임을 아는 자가 명철한 사람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목사가 된 가장 큰 유익은 날마다 말씀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가 안 되었다면 성경을 이렇게 보지 않았을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성경을 읽으라고 말씀을 하지만 저도 목사가 안 되었다면 성경을 제대로 보지 않았을 것이기에 이해는 합니다. 저는 목사가 직업이기에 직업을 위하여서도 성경을 읽어야합니다. 성경을 보니 모든 성경에서 나의 죄가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청년 때도 성경을 보니 저의 죄가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가 바로 나의 죄임이 보여 지기에 나 행한 것이 죄 뿐이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 외에는 의지할 것도 없고 전할 것도 없습니다.

 

이번 주 주일학교 성경읽기 내용이 잠언 16장이 포함 됩니다. 우리 가족 카톡에 성경을 읽고 나누는데 잠언 16:2절을 올렸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는 사람은 오늘 본문 11절에서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를 지혜롭다고 여기는 부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십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을 감찰하시면 내가 깨끗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자가 가난한 사람이며 명철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기에 용서를 받습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는다고 합니다. 새 번역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이기면 많은 사람이 축하하지만,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숨는다.”공동번역입니다. “착한 사람이 세력을 잡으면 나라가 크게 빛나고 나쁜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사람들이 숨는다.” 한동안 국격(國格)이라는 말을 정치인들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라의 격을 말하던 대통령들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정직한 사람이나 착한 사람이나 의인이 득의하거나 세력을 잡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다 상대적입니다. 이런 상대적인 세상에서도 악인이 득의하면 사람들이 숨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모스 5:11~13절입니다. “11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12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13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 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악인이 득세를 하면 의인들의 입을 막아버리기도 합니다. 독재정부일수록 언론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입니다. 물론 악한 언론인들은 알아서 권력에 기생합니다. 그러므로 지혜 자가 잠잠하게 되는 것은 그 시대가 악한 시대인 것입니다.

 

본문 13절입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습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것이 10절에서는 악한 길로 유인하는 모습이며, 11절에서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는 부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자들은 형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적하면 우리는 자복합니까? 숨기려고 합니까? 국회의원 특수 활동비를 피디 수첩에서 취재를 하니 제대로 응답하는 국회의원이 거의 없었습니다. 핑계되면서 인터뷰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 자리에 가면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일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우리의 일상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가족 간에서도 사사로운 잘못들을 지적하면 즉각적으로 시인하십니까? 온갖 핑계를 대면서 역공을 펼칠 기회를 잡으려고 합니까? 교회에서 설교를 듣습니다. 여러 가지 말씀이 선포될 때에 나의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고 그 죄를 버리시려고 하십니까? 저 말씀은 나와 상관없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들립니까? 후자라면 이 사람은 부자입니다. 자기 의에 부자가 되어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기에 아무리 말씀을 전하여도 자기 죄를 자복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죄를 분명히 알고서 숨기는 것은 세상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사람이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자신이 숨기는 줄도 알지 못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요한복음 16:9절을 보면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합니다. 이러한 죄는 성령이 임하여야만 죄 인줄 압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예수님을 믿고 삽니까?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살리려고 하니 돈이 필요하고 가정이 필요하고 회사가 필요하고 천국까지 가려면 예수도 필요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다 내가 주인이 되어 예수님을 주로 믿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내일에 대하여 염려하는 것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이런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고 오직 성부 성자 성령의 일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은혜로 예수님을 믿게 되면 자기 죄를 알고 예수님을 믿고 죄를 용서 받는 것이 참된 복임을 알게 됩니다. 이 복은 긍휼을 입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이 복이라면 누가 이런 복을 원할까요?

 

본문 14절입니다.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고 합니다. 항상 경외하는 자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주야로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을 문자대로 실천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 생명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법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법을 주신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 법을 주신 것은 신약에까지 와야 밝혀집니다. 물론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음을 보여주시지만 신약은 명시적으로 말씀합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죄 아래 가두는 것이며 모든 입을 막게 합니다. 법으로 죄 아래 가두신 이유는 우리가 법을 지켜 구원 얻는 것이아니라 긍휼로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3:19,11:32).

 

히브리서 3장을 보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는지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설명합니다. 그들이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사환이었지만 그리스도은 하나님의 집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사환인 모세를 법을 통하여 우리의 죄인 됨을 알게 하여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기에 우리가 소망과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가 그의 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 경외는 예수님을 주로 믿는 것입니다.

 

본문 15~16절입니다.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다고 합니다. 무지한 치리 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고 합니다. 이방의 통치자들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백성의 관원들은 가난한 백성을 압제합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고 잘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과 같이 백성들을 착취하였습니다. 이들이 무지한 치리자입니다. 여호와를 모르기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포학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합니다. 이것은 여호와 경외가 단지 정권의 오래감이나 목숨의 장수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영접합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니 그를 막지 말지라고 합니다.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살인한 것입니다. 이들을 막지 말라는 것은 그들에게 도움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죄가 그를 추격하여 결국 멸망의 길로 간다고 합니다. 모든 불의가 죄이지만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다는 것이 요한 1516~17절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인하여 형제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구하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버리고 끝까지 우상숭배로 가는 자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용서를 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용서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18절입니다.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성실하게 행하는 자란 여호와를 경외하여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구원을 받겠지만 굽은 길을 행하는 자는 자기가 부자라고 여기기에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물질만의 부자가 아니라 자기 의로 가득한 자는 자기 죄를 모르기에 굽을 길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참된 복입니다.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이 다 불살라질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만이 영원하기에 그 아들을 얻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시편 32:1~5절입니다. “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다윗의 시편입니다. 무엇이 복입니까? 허물이 사함을 받고 그 죄가 가림을 받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를 어떻게 알고 자복하게 됩니까? 설교 중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인간의 자기 죄를 모릅니다. 더구나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모르기에 다윗은 간음하고 살인하고서도 그 죄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의 책망으로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모태죄인임을 고백하는 내용이 시편 51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백성은 주의 손으로 누르셔서 죄를 알게 하시고 죄를 자백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자백하고 아뢰니 주께서 죄악을 사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6~7절입니다. “6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2)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7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다윗이 용서 받고서는 권면을 합니다.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각주를 보면 죄를 깨달을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아래 태어난 것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일하심으로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에(5:6) 죄인 되어 있을 때에(5:8) 원수 되어있을 때에(5:10) 십자가로 사랑을 확증하시고 찾아오시면 비로소 우리가 죄인 됨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어지는 8~11절에서는 죄를 자복하지 않는 모습을 무지한 말과 노새로 비교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의 길을 가르쳐 보이고 우리 각자를 주목하여 훈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주의 인자하심을 입는 것이기에 즐거워합니다.

 

로마서 4:4~8절입니다.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시편 32편 다윗의 시편을 바울사도가 인용하면서 다윗이 받은 복을 말합니다. 다윗이 죄를 알지도 못하였는데 주께서 죄를 알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자복하게 하심으로 받은 복을 바울사도가 전한 것입니다. 그 불법이 사함을 받고 그 죄가 가려짐을 받는 것은 자기가 일한 것도 없이 받은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 복을 바로 앞의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을 들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의 시작이며 완성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이 복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