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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9:9~18 묵시가 없으면 2018. 8. 8

 

9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은 그침이 없느니라 10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 11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 12 관원이 거짓말을 들으면 그의 하인들은 다 악하게 되느니라 13 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1)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 14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16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지나니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보리라 17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요즈음은 조금 시들하여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꿈, 비전, 묵시, 환상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넘쳐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란 종말론적인 공동체인데 도대체 무슨 비전과 꿈과 환상을 말하는지 그 내용을 보니 거의 다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어떤 꿈과 비전을 말하는지 찾아보니 오늘 본문 18절의 말씀을 비전으로 번역하여 사용합니다. 18절의 묵시란 히브리어로 하존이라는 단어인데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상(삼상3:1), 계시(대상17:15), 묵시(대하32:32), 환상(29:7), 예언(14:14)이라고 번역합니다.

 

꿈에 대하여서는 요셉의 꿈을 많이 들었습니다. 결론은 우리도 요셉과 같은 꿈을 가지자고 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런 꿈을 꾸려고 꾼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신 것입니다. 그 결과 형제들의 미움을 받고 노예로 팔려가서 죽을 고생을 합니다. 나중에 총리가 되었다는 것으로 우리도 꿈을 가지자고 하는데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이루시기 위하여 미리 말씀이 환난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105:18). 전도서 5:7절을 봅니다.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찌니라그러므로 헛된 꿈꾸지 말고 묵시를 들어봅시다.

 

본문 9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걸어서 소송하면, 어리석은 사람이 폭언과 야유로 맞서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안심할 수 없다.” 주어가 분명하지 않아서 이렇게 번역을 한 것입니다. 잠언에서 지혜로운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며 미련한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28:26). 미련한 자는 남에게 배우려고 하지 않기에 어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과 다툼이 있다면 어떤 경우라도 승복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합니다.

 

10절도 새 번역을 봅니다. 남을 피 흘리게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흠 없는 사람을 미워하지만, 정직한 사람은 흠 없는 사람의 생명을 보살펴 준다.” 한 문장에서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의 대비를 위한 것이기에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남의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아합과 이세벨과 같은 자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였고 죽이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오뱌다는 아합과 이세벨의 치세에서도 하나님의 선지자를 백 명이나 숨겨준 것입니다(18:4). 이것은 자신의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라는 단어가 마음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마음을 다 드러내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한다는 것입니다. 잠언의 지혜는 절제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의 속을 다 드러낸다는 것은 그것이 분노이든 격정이든 간에 절제가 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성경의 절제력은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으로 하는 절제가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겸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라고 합니다(2:3).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라고 합니다(37:7). 이러한 모든 말씀들이 여호와의 묵시이기에 이런 묵시를 받지 않으면 인간은 방자해 지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관원이 거짓말을 들으면 그의 하인들은 다 악하게 된다고 합니다. 관원을 통치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왕이나 대통령이 거짓말을 듣게 되면 그 신하들도 다 악하게 행동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지금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 이 세상나라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거짓이 통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거짓의 아비 마귀가 쫓겨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12:10). 그런데 이 세상은(땅과 바다) 아직도 이 거짓의 아비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12:12).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는 그 거짓의 아비가 손도 되지 못합니다(요일5:18). 성도는 하늘에 속한 자로서 이 세상의 거짓된 현실을 보면서 더욱 그 나라를 소망합니다.

 

13절입니다. 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1)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신다고 합니다. 이 빛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악인과 선인에게 햇볕을 주시듯이(5:45) 일반은총의 빛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포학한 자는 불의로 금력이나 권력을 가진 자가 되었다면 이런 자들은 가난한 자를 학대한 자들이기에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빛을 생명의 빛으로 보면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가 포학한 자입니다(1:5). 모든 사람들이 다 생명의 빛을 몰랐지만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은 보게 됩니다. 이렇게 택한 자들은 성경에서 가난한 자로 등장합니다. 세상은 포학(暴虐)하여도 부자로 살기를 원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가난하여도 생명의 빛으로 살기를 원하게 됩니다.

 

14절입니다.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경만이 아니라 세상의 역사도 증거 합니다. 왕이 타락하여 자신과 자신의 측근들의 배만 불리게 되면 그 나라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하게 신원하여주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렇게 영원한 나라가 없습니다. 참으로 영원한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서 가는 나라이기에 이런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영원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자신이 영원한 긍휼을 입어야 할 정도로 죄인이며 가난한 자임을 압니다.

 

15절입니다.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16절도 함께 보겠습니다.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성경은 부모가 자녀를 징계하라고 합니다. 그 징계를 채찍과 꾸지람이라고 합니다. 채찍과 꾸지람은 부모의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채찍과 꾸지람은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부모를 욕되게 할 뿐 아니라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땅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는 부모가 자녀에게 매를 드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물론 부모의 욕심을 따라 또는 자기 감정풀이로 매를 드는 것은 분명하게 잘 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정직하고 바르게 살라고 매를 드는 것은 통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부모들은 자녀를 신성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자녀들의 욕망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온갖 뒷받침을 해주는 것이 능력 있는 부모가 되는 양 생각합니다. 이러한 결과는 여호와 경외도 없을 뿐 더러 부모 자신도 이런 아이들로 인하여 욕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합니다(6:4). 이렇게 하면 여호와를 경외하게 되며 동시에 부모를 평안하게 하고 기쁨을 줍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진보적인 교육감들이 거의 다 당선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학생 인권조례를 제정(制定)하려고 합니다. 마땅히 학생도 그 인권이 보호되어야 합니다. 피부색이나 성별로 인하여 부당한 차별을 받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인권을 절대화하여 조례를 만들어 버리면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는 말조차 못하게 됩니다. 성경이 죄라고 말하는 것도 말할 수 없다면 이 세상의 교육이라는 것이 결국은 인권을 절대화 하는 것입니다. 인권이라는 말이 절대화됨으로 현장의 범죄자도 강압적으로 잡을 수 없게 되어 경찰이나 응급구조대원이 피해를 당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일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살든지 항상 성경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16절입니다.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지나니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보리라고 합니다. 성경의 역사로 보면 노아 홍수 때에 악인의 망함을 노아가 봅니다. 노아는 은혜를 입어 방주를 예비하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을 아브라함이 목격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이렇게 악인의 멸망을 늘 목격하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 받는 현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여러 곳에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3737, 하박국). 악인들은 아무리 형통해 보이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경의 계시를 통하여 악인이 아무리 형통해 보여도 이미 망하였음을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새 번역은 이렇습니다. “계시가 없으면 백성은 방자해지나,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 공동번역입니다. “계시의 말씀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해진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을 지키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 묵시란 계시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묵시의 말씀이 없어진다는 것은 바른 말씀의 선포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른 말씀의 선포가 없으면 백성들이 방자하게 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른 말씀의 선포를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설교 시작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여기서 묵시를 킹 제임스 번역에서는 비전(vision) 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비전이라는 단어로 우리가 꿈을 가지자 비전을 이루자고 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도 너 장래의 꿈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사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되어도 자신의 장래의 비전을 제대로 말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적성과 상관없이 성적순으로 학교를 정하고 직업을 선택하기에 이것이 나의 꿈이라는 말도 못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위대한 꿈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런 꿈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 비전이 무엇입니까?

 

모든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을 해석할 때에 인간의 욕망을 이런 단어에 투사시켜서 비전을 이루자고 한다면 그것이 바벨탑을 쌓는 것이며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엘 선지자도 마지막 때에 모든 육체의 성령을 부어주시면 환상을 보고 꿈을 꾸고 예언을 한다는 말씀은 메시아 오심으로 심판과 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엘서 2장의 그 환상과 꿈이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이 임함으로 성취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모든 묵시를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묵시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출애굽기 32:25절입니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放恣)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여기서 방자하게 행하는 일이 금송아지 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세가 40일간 보이지 않았습니다. 40일 전에 피를 뿌려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언약의 증거를 받으려고 간 40일 동안 모세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묵시가 없는 상태입니다. 이럴 때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먹고 마시며 뛰어놀고 있는 것이 방자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8:18~22절입니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19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20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21 네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22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여기서 20절과 22절에 제 마음대로라는 단어가 전에 번역에서 방자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의 다른 용례는 멸시, 버림, 싫어함, 망령되이 행하는 것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묵시가 없다면 인간 자신이 절대적인 판단과 가치기준에 되어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방자하지 않는 자가 있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방자합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방자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모두가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코 인간의 능력이 아닙니다. 자기가 죽어야만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주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은혜이며 이런 자들이 성도입니다.

 

신명기 18:18~22절을 다시 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합니다. 만약 그 말을 듣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사도행전 7:37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스데반 집사의 이 말씀이 신명기 18:15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방자하게 행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였고 예수님을 전하는 자를 핍박하고 죽입니다. 이것이 방자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의 비전을 말하는 자들이 방자히 행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묵시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셨습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온 자임을 아는 자가 묵시를 받아들인 자들입니다. 이러한 묵시가 없으면 우리도 방자하게 행동하면서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묵시가 없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히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방자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복음을 들었지만 여러 파당들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이 방자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누가 십자가를 졌느냐는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히 보이지 않는 것이 방자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묵시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방자하게 행합니다. 그러나 묵시의 완성이신 그리스도가 계시면 그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복을 받습니다. 이러한 묵시가 우리 안에 풍성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