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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6:1~9 마음의 계획과 인도 2017. 9. 20

 

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1)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5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2)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6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7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8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지난주일 오후 결론 부분인 역대하 20장에서 여호사밧 왕이 북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하시야와 교제하여 에시온 게벨에서 배를 만들어 무역하여 금을 더 가져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배를 부수어버리심으로 그 계획이 실패하였습니다. 그래서 방해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날 오후에 어느 구역에서 구역모임을 알리는 문자가 왔습니다.

 

정말 기가 막히네요. 우리를 방해하시고, 파선 시키시며 쿡쿡 찔러대시는 하나님께서 그것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이해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으십니다, 멋지십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하게 됩니다. 다음 주 구역모임을 기다리셨지요? 얼마나 하나님의 훼방을 받았는지 좀 나눠 보십시다요.’ 구역 모임 공지가 설교에 대한 항의인지 항복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그 말씀과 또 연결이 됩니다.

 

본문 1절입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온다고 합니다. 다른 번역으로 보면 계획은 사람이 세워도 결정은 하나님이 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얼마 전에 어느 사업장 확장 한 곳에 가서 전하였습니다. 마음의 경영이 얼마나 복잡하고 많은지 아마 경영을 하는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수많은 경영이 있어도 그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 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의 경영과 응답이 다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가끔 다르면 이해가 되겠는데 거의 다 다르면 이것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은 꾀를 씁니다.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의 계획이 잘 이루어질지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오니 기도응답을 받는 비결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응답이 잘 되는가 하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저는 이런 방법론을 하나님께 뇌물을 쓴다고 봅니다. 뇌물을 쓴다는 어감이 좋지 않습니다만 우리의 속마음에는 뇌물을 쓰더라도 내 마음의 경영과 계획이 이루어지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속마음을 잘 아는 종교전문가들이 소원 성취하는 비결을 알려 주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종교꾼들이 하는 짓은 결국 신과 거래하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신이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나 되는 것처럼 행세하기도 합니다. 무당 같으면 복채를 많이 내면 큰 굿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곳에서는 기도를 해라, 정성을 바쳐라, 무엇을 해라고 하지만 거의 대동소이 합니다. 결국 신과 거래하는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이 말씀의 의미를 알고 있다면 하나님과 거래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내 뜻과 내 소원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그 응답과 결정은 하나님께 있다고 한다면 나의 소원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다면 하나님과 거래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가 무엇입니까? 십자가 지시기 전에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내가 무슨 일을 계획하고 이루려고 할지라도 마음 편하게 하면 됩니다. 하게 하시면 하고, 하지 못하게 하시면 안하면 됩니다. 할 수 없는 것을 애쓸 이유가 없습니다(시131:1~3).

 

이런 말씀을 드리니 어떤 청년이 자신이 처음에 작은 꿈을 가지고 그 일을 하려고 하는데 하다 보니 좀 더 나은 위치가 있는데 이럴 때에 노력하면 그것이 욕심이냐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변을 하기를 우리가 하는 일치고 욕심이 아닌 것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부당한 방법이 아니라 자신이 노력해서 좀 더 나은 위치에 갈 수 있다면 얼마든지 노력하라고 했습니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아가는 인생이 당연히 노력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여도 안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자족하며 살면 됩니다.

 

이렇게 살면 인생이 쉽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힘들게 사는 이유는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일줄 착각하고 살아가기에 마음의 경영과 계획이 많고 힘이 드는 것입니다. 전도서 7:29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지만 사람이 많은 꾀들을 냈다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얼마나 수많은 꾀들이 있는지 상상이 안 될 정도로 어마 어마하게 많습니다. 결국 잠언 16:1절의 말씀과 오늘 전체에서 볼 내용은 내 인생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9절에서 8절만 빼고 모든 절에서 다 여호와가 나옵니다. 여호와는 언약의 주님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해 보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십니다. 자신의 행위가 전적으로 부패하였고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이 다 악한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은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고 합니다(6:5,8:2).이 말씀을 그대로 수납하실 수 있습니까? 자신이 가끔 악한 생각을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창세기 6장에서 죄악이 관영한 상태를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큰 잘못입니까? 이 말씀은 이미 타락한 인생들이 자기 보기에 좋은 대로 살아가는 모든 것이 악입니다. 이런 인생들이 무엇을 경영하고 계획하고 인생의 비전을 세우는 것이 어찌 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생들이 자기의 뜻과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은 날마다 지옥의 도가니가 되었을 것입니다. 유엔에서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북한을 완전 파괴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인내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북한은 생존을 위하여 더 도발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자신을 확대하면 트럼프나 김정일이 됩니다. 이런 인간들의 마음의 경영이 그대로 다 이루어진다면 세상은 날마다 핵폭탄이 터질 것입니다.

 

본문 1절과 2절을 연결하여 보겠습니다. 마음의 계획은 사람이 하지만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습니다. 우리 마음의 생각과 계획을 말하지만 그 말의 응답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여호와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가 한 말을 자기가 다 이루어내겠다고 하고 결국 이루어내면 인간 의지의 승리라는 말을 들을지 모르지만 이런 모습이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모르기에 자신이 하는 생각과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심령을 감찰하여 보시면 모두가 악인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도 우리의 계획하고 경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방법론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까지 여호와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맡긴다는 말은 굴려버린다는 뜻입니다. 맡겼다가 도로 찾아오거나 맡겨서 결제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굴러 보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길갈에서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길갈이라는 뜻이 굴러 보낸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셨기에 그곳 이름을 굴러버린다는 길갈로 이름 짓게 한 것입니다(수5:9)).

 

이처럼 우리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는 것을 돌을 굴러 보내듯이 주께 맡겨 버리면 이제 우리가 경영하고 이루어낼 일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경영하시고 이루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면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주께 맡긴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맡긴다고 말은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영 미덥지 못합니다. 그래서 잠시 맡기는 척 하다가 다시 들고 와서 내가 끙끙거리며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속내는 내 뜻대로 무엇을 이루어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뜻대로 이루고 싶은 마음은 결국 나의 이름 곧 나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방향으로 만사가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들어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7~10절입니다.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1)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2)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의 염려와 마음의 계획까지 다 주께 맡기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맡김이 없이 자신이 염려를 하게 되면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근심과 염려는 우리로 하여금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으로 책망을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 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가져옵니다(고후7:11).

 

그런데 이렇게 주님께 맡기면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어떤 고난일까요? 무력해 보인다고 대책 없어 보인다고 가족이나 애인에게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미 묵시적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사 속에서 잠시 고난을 당하지만 주께서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십니다. 이것이 주께 맡긴 자들입니다. 이렇게 된 자들은 권능이 세세토록 주님에게 있다고 찬송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이용하여 주를 위하여 열심히 살지도 않고 될 대로 되라고 하면서 막살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질문 안에는 지금까지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산다고 자신의 욕망을 눌러가면서 살았기에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괜히 그동안 헛고생 했다는 생각으로 복음의 자유를 자신의 육체의 기회로 삼고 살아가는 자들도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까지 다 아시고 처리하십니다.

 

본문 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악한자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반문자체가 이미 타락한 인간이기에 나옵니다. 선악을 자기중심적으로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의문입니다. 이런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 신정론(神正論)입니다. 악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신이 정의로운가 하는 질문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것이 신정론입니다. 이런 대표적인 질문이 선악과를 왜 만들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이 다 쓰임에 적당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모든 것을 다 주님께서 주님의 의하여 주님을 위하여 지으신 것입니다(1:16).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러면 인간이 무엇이냐고 되묻습니다. 인간이 로봇이냐고 항의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아직도 자기 자신이 전적으로 타락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얼마든지 착하게도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토기장이가 진흙덩어리로 어떤 그릇을 만들든지 그것은 토기장이의 마음입니다. 하물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진흙덩이가 따지겠습니까?

 

그런데 악인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께는 가소로운 일이지만 인간세계에서 요란함을 일으킵니다. 그러한 악인들끼리 서로 연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고 그 매인 것에서 끊어내자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보시고 하늘에 계신 이가 비웃으시면서 그들을 놀라게 하십니다. 그 일이 한 왕을 시온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십니다(2). 말씀이 이러함에도 세상은 악인들이 연대합니다.

 

본문 5절입니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2)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마음이 교만한 자가 어떤 자들입니까?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모든 아담의 후손들입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들을 가지고 나는 할 수 있다고 외치는 자들입니다.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하자! 교회에서 무슨 전도를 하고 사업을 한다면서 예배 시간에 이런 구호를 외칩니다. 이런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피차 손을 잡고 연대합니다. 그들의 세력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십니까? 사람의 계획을 허물어뜨리시고 방해하시는 것입니다. 그 길이 구원의 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소명이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며 무너뜨린 후에 건설하며 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1:10). 그런데 우리 인생들은 무너지지 않으려고 연대를 합니다. 데모를 하는 사람들이 팔에 팔을 걸고 저항합니다. 심지어 쇠사슬로 몸을 서로 서로 묶어서 버팁니다. 얼마나 절박하면 저렇게 하느냐는 마음도 들지만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께 대하여도 이런 모습으로 저항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우리의 뜻과 계획이 무너지면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느냐는 항의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뜻을 무너뜨림으로 자기의 뜻을 우리 안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본문 6절을 봅니다.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된다고 합니다. 이 말씀도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면 인간이 인자와 진리를 행하면 죄악이 속하여 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자와 진리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함을 받아야 하는 죄인들입니다. 물론 자신이 정말로 죄인인줄 알고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로 속함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 인자와 진리를 증거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란 인자와 진리로 죄악이 속함을 받은 사람은 여호와를 경외합니다. 여호와 경외하는 것이 악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악을 떠나는 것은 주의 인자와 진리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본문 7절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도 문자적으로 적용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흔히 전도는 지상명령이라고 하면서 열심히 전도하였더니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예상치 못한 복을 받았다고 전국으로 돌아다니며 간증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는 조건으로 나의 원수가 화해하게 됩니까? 이 성경구절 밑에 화해하게 된 사례를 관주로 표시한 성경 두 곳을 보겠습니다.

 

창세기 31:24절과 33:4절입니다.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 맞추어 그와 입 맞추고 서로 우니라두 사건 다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벧엘로 돌아오는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외삼촌 라반이 야반도주한 야곱을 추격하여 따라 잡기 전날 밤에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얍복강에서 온갖 꾀를 다 내고 자기 살기 위하여 죽기살기로 천사와 씨름한 것이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돌이켜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조건이 아닙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 반발이 일어나는 것도 우리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런 일하시지 않으시면 구원받을 자가 없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앞에서도 이 말씀은 보았기에 그대로 넘어가겠습니다.

 

본문 9절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다른 번역으로 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정말로 이 말씀이 믿어지신다면 우리 인생이라는 짐이 쉬워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지 않고 여전히 내가 내 인생의 주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잠언 19:21절을 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우리의 마음에 수많은 계획이 있지만 그런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온전히 성취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자기의 뜻과 계획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럴 때 마다 낙심과 탄식이 아니라 아!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주님이 나의 인생의 주인이구나! 이렇게 고백이 되어 진다면 나의 뜻은 무너져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존심이 이것을 너무나 싫어합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철야를 하고 선불감사를 하고 금식을 하면서 기도하면 응답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만 보아도 나의 뜻과 계획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결국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는 기도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뜻과 계획과 나의 인생 전부를 주님께 맡길 수밖에 없도록 우리의 힘과 우리의 계획과 뜻들을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그럴 때에 놀라지 마시고 우리의 걸음을 우리에게 맡겨두지 아니하시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