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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1:9~21 허무와 확실한 상 2017. 5. 17

 

9 악인은 입으로 그의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 10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11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느니라 12 지혜 없는 자는 그의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14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15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 16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 17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18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공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 19 공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 20 마음이 굽은 자는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21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

 

오늘 본문도 수많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 중에 18절을 중심구절로 보려고 합니다.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공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의 끝이 허무한 것으로 끝이 날지, 허무하지 않는 확실한 상으로 끝이 날지를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종말을 아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종말을 모르는 것을 두고 모략과 분별력이 없는 민족이라고 합니다. 지혜가 있었다면 그들의 종말을 분별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32:28,29). 그러므로 지혜가 있다는 것은 자신의 종말을 알고 사는 자들입니다.

 

시편 39:4~5절입니다. “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5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다윗의 시편입니다. 자신의 종말과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의 모습입니다. 종말을 모르는 자는 현재 든든히 서 있다는 것만 의지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진실로 허사(虛事)뿐이라고 합니다.

 

본문 9절입니다. 악인은 입으로 그의 이웃을 망하게 하지만 의인은 그 지식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입이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지식과 경험들이 나오는 통로입니다. 그런데 악인의 생각과 지식과 경험이라는 것이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달콤한 내용으로 보여도 믿음의 눈으로 보면 결국 멸망으로 이끄는 것임을 분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그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말씀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기에(2:4) 보암직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10~11절입니다.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친다고 합니다.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으로 인하여 무너진다고 합니다. 의로운 자라면 자신의 이익을 따라 남을 해치는 자가 아닙니다. 이런 자들이 형통하게 된다면 그 사람으로 인하여 여러 사람이 혜택을 입게 되기에 성읍이 즐거워할 것입니다. 그런데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친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은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에만 적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어느 나라이든 다 적용이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에 적용해 봅시다. 의인이 형통하게 되면 성읍 사람들이 즐거워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악인이 형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권력자나 부자에 대한 분노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부자들이 의롭고 성실하게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온갖 반칙과 특권으로 부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임명을 받으려면 국회의 청문회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 청문회를 보면 어느 한 사람 깨끗하게 산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사실 그런 지위에 있었다면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나라는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언약을 받은 나라가 패망하였다는 것은 세상 모든 나라가 당연히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지혜 없는 자는 그의 이웃을 멸시합니다. 이웃을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이 지혜 없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명철한 자는 잠잠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에 멸시하거나 업신여기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비판하고 멸시하는 것은 곧 지혜가 없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보다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가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런 지혜가 임한 사람이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허물과 죄를 아는 사람이기에 이웃이 멸시받을 일을 실제로 할지라도 잠잠할 뿐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이 어떤 자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13절입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閑談)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는 사람입니다. 한담이라는 말은 한가한 시간에 서로 주고받는 별 중요하지 않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중요하지도 않는 내용들을 돌아다니면 말하는 자는 결국 남의 비밀을 누설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다른 사람을 비방하거나 그 사람의 비밀을 누설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나의 험담을 하는 사람으로 아시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신실한 사람이라면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12절처럼 이웃을 멸시하는 자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허물과 죄를 볼 뿐 아니라 마지막 날의 심판도 알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5:13~14절입니다. “13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14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젊은 과부를 과부의 명단에 올리지 말라는 말씀을 하면서 이 말씀을 합니다. 과부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면 구제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젊은 과부가 구제를 받으면서 게으름을 익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쓸데없는 말을 하고 일만 만들며 돌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은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림으로 대적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합니다.

 

14절입니다.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립니다. 지략(智略)은 지혜롭게 다스린다는 말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데 지혜가 없으면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략이 많으면 나라가 평안을 누립니다. 이것은 나라만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단체도 바른 지략이 있어야 평안을 누리지만 지략이 없으면 망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참된 지략은 세상이 볼 때에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지혜로운 길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돌아서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이 모든 육체에 부어지는 때가 말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종말의 영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함으로 사도들은 세상의 끝이 왔음을 알았기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종말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야 말로 지략이 없는 백성으로 망하는 길로 갑니다.

 

15절입니다. 보증에 대하여 잠언에서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합니다. 그러므로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합니다. 보증이란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보증을 싫어하여 보증을 서지 않으면 자신이 책임질 일이 없으니 평안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보증을 설 만한 존재가 못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보증을 서십니다. 보증을 서지 않으셨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보증을 서셨기에 십자가로 그 보증을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새 언약의 보증이시며(7:22) 그 보증으로 우리의 마음에 담보물인 성령을 보내셨습니다(고후1:22).

 

16~17절입니다. 유덕(有德)한 여자는 존영을 얻습니다. 유덕한 여자란 덕이 있는 여자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여자에 대하여 잠언 마지막에 현숙한 여인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러한 여자가 존귀와 영화로운 것은 비단 여자만이 아닙니다.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는다고 합니다. 유덕하다는 말을 17절의 인자한 자로 봐도 됩니다. 잠언서의 수많은 대조들이 나옵니다. 반어적인 대비가 나오고 동의적인 대비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 말씀의 대비만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악인과 의인, 정직한 자와 악한 자, 지혜 없는 자와 명철한 자,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와 숨기는 자, 지략이 없는 것과 지략이 많은 것, 보증이 되는 자와 피하는 자, 유덕한 자와 근면한 자, 인자한 자와 잔인한 자 이러한 대비들은 지혜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변별하여 볼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러한 대비를 통하여 결국은 두 가지 결론이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는 생명이며 다른 하나는 사망입니다. 단순한 생명과 사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사망입니다. 우리 인생의 종말에 허무한 것을 붙들고 살아왔는지 확실한 상을 위하여 살아왔는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삶이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사망과 생명이란 이미 창세전에 예정되어 있는데 우리가 어느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군 훈련소에서 겪은 일입니다. 군인들이란 단결이 중요하기에 단체기합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무엇이나 잘하는 몇 사람이 이런 일에 불만을 품고 군 정보기관에서 나와서 소원수리를 받는 시간에 단체기합에 대하여 불평을 한 것입니다. 그 날 밤에는 한 명도 예외 없이 개인적인 체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는 것에 대하여 불만이 있다는 것은 나는 예정 안 해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불만입니다. 이런 자들은 아직도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대로 말씀에 비추어지면 나의 평소의 생각과 사고방식이 멸망의 길로 가는 자임을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18절입니다.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공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방금 오늘 본문 전체를 요약하여 본 결론으로 이 말씀을 보아도 됩니다. 물론 오늘 말씀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하여서도 이 말씀이 결론이 되며 우리의 일생도 이 말씀으로 결론이 납니다. 그 결국은 허무와 확실한 상 이 두 가지입니다. 악인의 삯은 허무한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그러나 공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한 것입니다. 여기서 악인과 공의를 뿌린 자를 오늘 본문에서 악인과 의인, 정직한 자와 악한 자, 지혜 없는 자와 지혜 있는 자로 대비하여 보면 됩니다. 우리의 일평생이 마치는 그 날에 우리의 삯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19~21절을 먼저 보고 18절을 결론으로 다시 보겠습니다. 공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릅니다. 마음이 굽은 자는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습니다.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지만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습니다. 이러한 대비의 말씀도 악인의 삯과 의인의 삯으로 대비하여 볼 수 있습니다. 악인의 결국은 허무하여 사망에 이르는 것이며 의인의 결국은 허무하지 않는 확실한 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통하여 지금 우리는 허무한 것을 추구하면서 가는지 확실한 상을 추구하면서 가는지를 봐야 합니다. 여기서 상을 말한다고 하니 상급차등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허무한 것이 무엇인지 상이 무엇인지 성경을 통하여 점검해야 합니다.

 

창세기 15:1절입니다.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시고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들이셔서 씨와 땅을 약속하셨지만 아직 씨도 땅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내가 너의 방패이며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상급이라고 하시는데도 아브람은 자기는 씨가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아브람에게 하늘에 별을 보라고 하시면서 네 후손을 이와 같이 많게 하여 주시겠다고 하시니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아브람의 의가 됩니다. 이 믿음은 이미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믿음의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궁극적인 상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약속을 하나님은 언약체결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건 언약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졌는데 신약은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1~8절입니다. “1 그런즉 1)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창세기 15장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방패와 상이 되어 주신다고 하신 그 확실한 상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브라함이 받은 상입니다. 이것은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일한 것도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김을 받는 것이 참으로 확실한 상입니다. 그래서 그 불법이 사함을 받고 그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이 복이 있고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 언약을 따라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동일한 내용이 되는 것이 새 언약인 십자가의 다 이루심입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시고 그 영을 우리에게 넘겨주시면 어떤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로마서 8:18~23절입니다.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성령이 임한 자는 몸의 속량을 기다리면서 탄식하며 살아갑니다. 성도에게 닥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그 영광의 날에 사라질 허무한 것들을 지금 무너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닥치는 고난은 허무한 것과 허무하지 아니할 것을 구별하기 위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입은 자들은 보이는 소망을 바라고 사는 자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소망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어지는 24~28절입니다.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눈에 보이는 소망들은 누구나가 추구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보이지 않는 소망을 기다립니다. 이런 소망을 기다릴만한 믿음이 우리에게 없기에 성령이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고 예수님은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십니다. 우리는 늘 허무한 것을 바라보기에 성령께서 허무하지 않고 영원한 상을 바라보도록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그 결과는 우리의 영원한 상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게 되는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9~30절입니다. “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허무한 것을 놓아버리고 확실하고 영원한 상이신 하나님의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 성도가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성도에게 일어나는 이유는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묵시 속에서 완료된 일들을 이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눈에 보이는 허무한 것들을 붙들지 못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게 하십니다. 그 십자가 안에서만 허무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이 길이 허무한 것을 추구하는 길입니까? 확실한 상을 위한 길입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영원한 상을 바라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영원한 상이 이 세상의 연장선상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 노력한 만 큼 하늘의 황금보석 꾸민 집이 더 크고 넓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알고 열심히 노력하였는데 그 날에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수많은 능력을 행하였는데 주님께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신다면 허무한 정도가 아니라 참으로 무서운 심판의 날이 됩니다.

 

우리 인생은 다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 마지막 날에 허무한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확실한 상을 받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확실한 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며 만유이십니다. 예수님이 전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예수 외에 헛된 것들에 대하여 점점 손을 놓게 만드시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그 주님을 더욱 붙들게 됩니다. 그 십자가로 나타난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평생에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능력이 십자가 그 자체로부터 오늘도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