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에스겔 11:1-25 심판과 구원 2012. 1. 25

 

1 그 때에 주의 영이 나를 들어 올려서 여호와의 전 동문 곧 동향한 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그 문에 사람이 스물다섯 명이 있는데 내가 그 중에서 앗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를 보았으니 그들은 백성의 고관이라 2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사람들은 불의를 품고 이 성 중에서 악한 꾀를 꾸미는 자니라 3 그들의 말이 집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 하나니 4 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그들을 쳐서 예언하고 예언할지니라 5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렇게 말하였도다 너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 13 이에 내가 예언할 때에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가 죽기로 내가 엎드려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다 멸절하고자 하시나이까 하니라........... 1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20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25 내가 사로잡힌 자에게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모든 일을 말하니라

 

오늘 제목을 심판과 구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구원을 말할 때에 왜 인간이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를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판이 없다면 구원의 의미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구원이란 ‘현재의 나’보다 ‘더 멋있는 나’가 되는 것을 구원으로 봅니다. 이런 상태의 구원관이란 반드시 거래가 나옵니다. 더 멋있는 나가 되기 위하여 이런 저런 것을 갖추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이런 구원관 자체가 죄임을 모르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닌다고 하여도 결국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아닌 자기 존재의 우월함을 위하는 우상숭배로 흘러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본다는 것은 평소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런 구원관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자신의 죄가 고발되지 않는다면 성경을 통하여 평소의 구원관인 ‘더 멋있는 나’를 만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게 됩니다. 이런 모습들이 성경 잘 아는 나, 성경에서 기도하라고 했으니 기도 많이 하여 체험을 많이 한 나,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성경의 비밀을 아는 나, 이런 식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저자인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성경을 보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볼 때에 겸손하게 주의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비쳐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11:1절입니다. 성전 동향한 문에 25명이 보입니다. 이들은 8:16절에서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태양에게 예배하는 자들과 같은 자들로 보입니다. 이들이 백성의 고관들인데 그 중에 이름이 나오는 사람이 두 명입니다. 앗술의 아들 야사나나와 브나야의 아들 블랴다가 나옵니다. 이 이름들이 최근의 다윗 성의 발굴에서 250개의 인장과 공식적인 문서를 발견했는데 그 중에 이 이름들이 나왔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고고학적인 자료가 나와야만 믿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로서 믿는 것이 됩니다. 오늘날 이런 식의 믿음의 말하기 위하여 고고학적인 발굴과 창조과학회가 활동을 하지만 믿음은 은혜의 선물로만 주어집니다.

 

11:2-3절입니다. 백성의 고관들인 25명이 불의를 품고 이 성 중에서 악한 꾀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 불의와 악한 꾀로 나온 말이 이렇습니다. 집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 즉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의 멸망하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그곳에서 집을 짓고 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남아있는 예루살렘 성 안의 사람들은 집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않다고 하면서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고 합니다.

 

이 말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만 이 말로만 심판이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온갖 우상숭배로 인하여 심판이 집행이 되는 과정에서 자신들은 심판을 받아서 이미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과 달리 자신들은 안전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간 자들은 악하여 심판을 받은 것이고 자신들은 예루살렘이 가마솥처럼 지켜주고 그 안에 담긴 좋은 고기처럼 안전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자들은 내장과 껍질과 질이 떨어지는 고기와 같은 자들이라서 잡혀갔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11:4절입니다. 에스겔에서 이런 자들을 쳐서 예언하고 예언하라고 합니다. 오늘날 이 땅의 교회의 현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재앙들을 보면서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서 그렇게 재앙이 왔다고 합니다. 해일과 지진으로 엄청난 인명과 재산상의 손해를 보면서 그들의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인하여 그렇게 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대한민국은 우상숭배와 음행이 그들보다 덜하여 재앙이 없습니까? 교회들조차 우상숭배로 가득한 이 시대에 오히려 완전히 버림을 받았기에 그대로 내버려두신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러므로 축복이 아니라 쳐서 예언하고 예언하라고 하십니다.

 

11:5-12절입니다. 쳐서 예언한 심판의 내용입니다. 자신들이 안전한 가마솥의 고기라고 여겼지만 오히려 그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자들이 가마솥의 고기와 같은 자라고 합니다. 또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잠깐 성소가 되어 주신다고 1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전하다고 여기는 그들에게 그들이 두려워하는 칼이 이르게 하시고 성읍 가운데서 끌어내어 타국인의 손에 넘겨 벌을 내리시는 심판을 통하여 그들이 여호와인줄 알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성읍은 가마가 되지 않고 너희는 그 가운데 고기가 되지 않으리라고 하십니다. 결국 자기들이 믿던 것들이 헛것이었다는 말입니다.

 

11:13절입니다. 이렇게 쳐서 예언을 하는 중에 블라다가 죽는 것을 봅니다. 백성의 고관으로 이름이 나온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이 죽음을 보고서 에스겔이 엎드려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오호라 주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다 멸절하고자 하시나이까? 9:8절에서도 에스겔이 부르짖었습니다. 이마에 표하지 아니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광경을 보면서 부르짖을 때에 심판을 그대로 집행하셨습니다. 이제 다시 부르짖음에 대하여 그대로 심판을 말씀하시지만 그러가 그 심판 가운데 소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11:14-15절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고 났으니 그 나머지 땅들은 누가 차지하게 됩니까?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남은 자에 속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보다 의로워서 남아 있는 줄로 알고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나니 빈 집과 땅들을 자기들의 소유로 챙기는 것입니다.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가는 자들을 보면서 회개하고 애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치부의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11:16절입니다. 그런즉 말하라고 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비록 그들이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쫒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지금 예루살렘의 성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의 지성소에서 문지방으로 동향한 문으로 움직이시고 그 영광의 그룹위에 떠올라 성전에서 떠나시고 성읍에서 떠나셔서 예루살렘의 동쪽 산으로 머물러 계십니다. 완전히 예루살렘을 떠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심판이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란 하나님께서 떠나심이 심판입니다. 성전이 있다고 떠나지 아니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11:5절을 봅니다. 너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나오라고 하십니다.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다 아십니다. 우리를 지으신 이가 어찌 우리를 모르겠습니까? 왜 교회당에 나오는지, 왜 성경을 보는지, 왜 천국에 가려고 하는지 다 아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아니하는지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다고 하여도 그들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런 우상숭배를 보실 수가 없으셨기에 하나님께서 떠나버리시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렇게 떠나신 하나님께서 오히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에게 성소가 되어주신다고 합니다.

 

11: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만민 가운데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여러 나라에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고 합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들에게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자들에게 주신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들이야 말로 심판을 받은 자이기에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이란 심판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심판을 받았기에 이미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본질상 진노의 자식임을 모르는 사람에게 구원이란 자기 향상 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죄와 심판을 반드시 알게 하십니다.

 

11:18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이켜 주실 때에 그곳에 가서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여 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심판을 받은 이유는 온갖 우상숭배로 인한 것이기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이켜 주실 때에 그들이 우상을 제거하여 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땅을 다시 찾아 주시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고엘입니다. 잃어버린 땅을 찾아 주는 역할을 보아스가 나오미에게 하여 주듯이 고엘을 역할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도 몽땅 잃어버린 후에 고엘을 만나게 됩니다.

 

출애굽기 6:2-8절을 봅니다. “봉독” 바벨론 포로에 돌아오는 것은 신학자들이 ‘제 2의 출애굽’이라고 합니다. 출애굽이 일어나는 이유가 하나님의 언약 때문임을 말씀하면서 그 약속의 땅에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심판을 통하여 속량하시고 너희를 내 백성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출애굽 하여 약속의 땅에 심으셨지만 온갖 우상숭배로 인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은 다시 자기 언약을 이루어내십니다. 이것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에서 돌이키실 때에 어떻게 돌이켜 주십니까?

 

에스겔 11:19-21절입니다.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서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율례를 따르며 규례를 지켜 행하여 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게 하시겠다는 출애굽기의 언약을 다시 말씀하십니다. 한 마음과 새 영을 주심으로 돌 같은 마음이 아니라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서 주님을 따르게 하시는 것이 새 언약의 내용입니다. 이 새 언약의 내용은 신약에서 이루어지지만 구약에서 이미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모형으로 바벨론 포로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상숭배자는 그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환상을 에스겔이 말하였습니다.

 

에스겔의 예언대로 바벨론에서 돌아왔고 이제는 새 언약의 완성으로 인하여 새 영이 부어진 시대입니다. 그러면 오늘 내가 새 영이 부어진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두 가지라고 봅니다. 말씀을 보면서 돌과 같이 딱딱하고 굳은 마음이라서 이 말씀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들린다면 이 사람은 새 영이 임하지 아니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새 영이 임한 사람이라면 에스겔서의 심판을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우상숭배를 하면서도 지금 별 어려움이 없으니 자신은 우상숭배자가 아니라고 여기는 그 사람이 바로 돌과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새 영이 임한 사람은 살과 같은 부드러운 마음이 되었기에 이 모든 심판의 말씀이 다 자기 자신에게 적용이 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들이 다 헛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직장이든 사람이든 남편이든 아내이든 교회이든 목사이든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조차 미워하게 됩니다. 결국 우상숭배란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한 것이기에 자기 목숨조차 미워하게 되는 사람이 새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심판과 용서를 동시에 아는 자가 새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에스겔 16:59-63절입니다. “봉독” 언약을 배반하여 심판을 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원한 언약으로 인하여 용서하여 주십니다. 그렇게 하실 때에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날이 가면 갈수로 자신이 왜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지를 알아갑니다. 이런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함께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