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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 설교]  [동영상 설교]

에스겔 16:44-63 영원한 언약 2012. 3. 7

 

44 속담을 말하는 자마다 네게 대하여 속담을 말하기를 어머니가 그러하면 딸도 그러하다 하리라 45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어머니의 딸이요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형의 동생이로다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며 46 네 형은 그 딸들과 함께 네 왼쪽에 거주하는 사마리아요 네 아우는 그 딸들과 함께 네 오른쪽에 거주하는 소돔이라...................... 59 나 주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 60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61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접대할 때에 네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네게 딸로 주려니와 네 언약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62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 63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네가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지난주에 창기보다 못한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이 보다 더 나아갑니다. 소돔보다 더 부패하고 가증한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듣는데도 우리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시대 그 사람들만을 위한 기록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성경을 읽고 있는 저와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창기보다 못하고, 소돔보다 더 부패하고 가증한 곳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로 늘푸른 교회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여전히 무감각합니다. 아마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조금이라도 불쾌한 감정이 들지 모르지만 교회는 교회이고 나는 나라고 생각하면 이것도 시큰둥한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창기보다 못하고 소돔보다 더 부패하고 가증한 우상숭배자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고 말입니다. 이 말에 대하여 두 가지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무리 그래도 나는 그들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것은 평생 동안 자기의 가치와 자존심을 본능적으로 챙겨온 우리들의 반응일 것입니다. 그러나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이 말씀을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말씀인줄 알고 회개하면서 어찌할꼬! 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역사하신 결과입니다.

 

히브리서 4:12절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설교시간은 우리가 말씀에 의하여 수술 받는 시간입니다. 병원에서 건강검진 받다가 몸에 이상한 종양이 발견되었다고 하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좋은 의사와 온갖 좋은 약을 구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하여 영적인 악성종양이 온 몸에 퍼져 있다는 말씀에 대하여 반응이 없다면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부디 말씀을 통하여 오늘 이 말씀이 바로 나 자신에게 향한 말씀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을 사마리아와 소돔과 함께 연결하여 사마리아는 언니로 소돔은 동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44-46절입니다. 속담으로 시작합니다. 어머니가 그러하면 딸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란 헷 사람이며 그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어미가 남편을 두고 바람을 피우고 자기 자식을 우상에게 바친 것처럼 지금 예루살렘이 그 남편인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온갖 우상숭배를 한 것입니다. 또한 그 자식을 우상의 제물로 바친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은 지역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왼 쪽에는 사마리아이고 오른 쪽에 소돔입니다.

 

47-52절입니다. 예루살렘이 사마리아와 소돔보다 그 모든 행위가 더 부패하였다고 합니다.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이 범한 죄의 절반도 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가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형으로 표현되는 사마리아가 우상의 신전을 성전이라고 하며 그 신전 안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면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창세기에서 성적인 부패와 타락이 동성연애로 나타나며 심지어 그 성을 살피러 온 천사들마저 동성연애 하겠다고 롯에게 내어 놓으라고 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이러한 사마리아와 소돔보다 더한 악을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소돔이 하늘에서 쏟아진 불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사마리아는 앗수르에 멸망하였습니다. 이러한 심판의 내용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아니하고 계속하여 우상을 섬겼기에 사마리아와 소돔이 상대적으로 의롭게 되었을 정도로 예루살렘의 부패와 죄악이 가득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이 멀리 구약에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정말 그러한지 소돔의 죄가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49-50절입니다. 소돔의 죄악이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왜 교만하였습니까?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지역이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음식물이 풍족하고 또 전쟁도 없이 태평하였으니 그 마음이 교만하여진 것입니다. 이렇게 풍족함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거만하며 가증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 소돔의 가증한 일이란 창세기에서는 성적인 방종만 말하지만 여기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소돔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없이하셨습니다.

 

오늘날 성경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소돔과 고모라성이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고 권력의 핵심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다들 장로며 집사라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들을 가르친 자들이 목사이기에 목사의 책임이 더 큽니다. 음식물이 풍족하고 태평하게 지내면서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외면하면서 끊임없이 재산을 증식하고 이것을 축복인양 설교하고 있습니다. 말세에 재물을 쌓은 것이 저주임을 야고보서 5장에서 분명히 증거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길이기에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는 말씀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마리아와 소돔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런 경고를 받고서도 결국 멸망한 예루살렘보다 더 부패하고 타락하였습니다. 교회가 무엇을 추구하는지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보시면 압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을 어떻게 심판하실 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도 소돔과 고모라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예루살렘에 전하였습니다.

 

이사야 1:10-15절을 봅니다. “봉독” 예루살렘의 관원과 백성들을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소와 나귀보도 못한 자들이라고 앞에서 책망을 하였습니다. 이제는 이들이 소돔과 고모라의 관원과 백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이 신에게 정성을 바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범죄를 덮어주고 풍요와 다산을 위하여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며 성전에 나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돔과 고모라의 관원과 백성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이런 소돔을 하나님께서 없이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루살렘도 소돔처럼 진멸당하여야 마땅합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유황불에 사라져야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조금 남겨두셨습니다.

 

이사야 1:9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소돔보다 나은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성적으로 문란하지 않다고 여기십니까?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한 현실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성경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지 그 성에서 일어나는 가증한 일로 탄식하는 롯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에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은 차고 넘칩니다. 쏟아지는 설교는 태산과 같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이 땅은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입니다. 불로 심판받아 마땅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조금 남겨두십니다. 그 남겨진 자들의 모습을 다음 말씀에서 봅니다.

 

53-58절입니다. “봉독” 소돔과 그의 딸들과 사마리아와 그의 딸들의 사로잡힘과 그들 중에 너희 사로잡힌 자의 사로잡힘을 풀어주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이 멸망하여 부끄럽게 됩니다. 이때에 사마리아와 소돔을 먼저 풀어주시면서 예루살렘도 풀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결과로 사마리아와 소돔이 위로가 된다고 합니다. 한 때는 예루살렘이 교만하여 소돔에 대하여는 입으로 말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이 이렇게 교만할 때는 아직 그들의 악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악이 드러났을 때에는 사마리아보다 소돔보다 더한 악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그들의 악을 다 드러내시고 심판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에 자신들의 죄를 알고 부끄럽게 여기게 됩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과 창기들을 말하지도 않을 정도로 자신들이 의롭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시키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십니다. 스스로 의롭게 여긴 자들은 이런 예수님을 배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 있는 교회의 모습이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단지 교회 다닌다는 것만으로 자신들은 의인이 된 것처럼 세상을 심판하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라는 이름의 힘을 가지고 그들을 정복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보다 더한 자들은 복음을 안다고 하는 우리들입니다. 예루살렘이 사마리아와 소돔보다 더 악한 모습이듯이 오늘 우리가 그러하지 않습니까! 그러하다고 인정하시는 분은 다음의 말씀을 받을 것입니다.

 

59절의 말씀을 봅니다. “나 주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 우리가 사마리아의 멸망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받은 것 보다 더한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이것을 인정하신다면 우리의 삶에서 어떤 불평과 원망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결코 이 말씀을 인정하지 않기에 우리는 범사에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다. 이것이 죄인 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이 아닙니다. 오직 주의 신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드러내시면 그제야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자들에게 복음의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60절에서 ‘그러나’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의 어렸을 때에 세운 언약이란 시내산 언약입니다. 들판에 버려진 계집아이처럼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시내산에서 언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광야에서만이 아니라 가나안에서도 거듭 언약을 배반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멸망을 선포하지 않고 영원한 언약을 세우신다고 합니다. 이 영원한 언약은 예레미야 31장과 에스겔 36장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새 언약을 말씀합니다.

 

영원한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내용이 61-63절입니다. “봉독” 네 형과 아우를 네가 접대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사마리아와 소돔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자신들의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사마리아와 소돔을 예루살렘의 딸로 주시는데 이것은 네 언약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들이 언약을 지켰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언약을 이루어내심을 통하여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실 때에 이렇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임을 알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저는 에스겔 16장의 말씀에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청년 때에 한 열심을 하였습니다. 그때 기복적인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청년 때에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를 통하여 복음에 대하여 조금 눈 뜨고서 복음에 대한 감사와 열정이 있었습니다. 이때 제가 다른 것은 없어도 믿음은 조금이라도 있다는 착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16장의 말씀이 바로 저의 모습임을 보고서는 주의 긍휼 외에는 달리 바라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언약 이행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영원한 언약 이행만을 믿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언약 이행의 결과를 63절에서 봅니다. 네 모든 일을 용서한 후에 네가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이 일이 언제 일어납니까? 사도행전 15장에서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일에 대하여 초대교회 사도들과 지도자들의 회의가 열립니다. 이방인들이 아무 조건도 없이 주의 백성으로 돌아올 때에 이들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로 결론을 맺습니다. 이것이 영원한 언약이 성취되는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