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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 설교]  [동영상 설교]

에스겔 17:1-24 수수께끼와 비유 2012. 3. 14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수수께끼와 비유를 말하라 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여 이르시되 색깔이 화려하고 날개가 크고 깃이 길고 털이 숱한 큰 독수리가 레바논에 이르러 백향목 높은 가지를 꺾되 4 그 연한 가지 끝을 꺾어 가지고 장사하는 땅에 이르러 상인의 성읍에 두고 5 또 그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 가에 심더니 6 그것이 자라며 퍼져서 높지 아니한 포도나무 곧 굵은 가지와 가는 가지가 난 포도나무가 되어 그 가지는 독수리를 향하였고 그 뿌리는 독수리 아래에 있었더라 ,,,,,,,,,,,,,,,,,,,,, 22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24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본문 1-2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에스겔에서 수수께끼와 비유를 말하라고 합니다. 수수께끼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한 호기심을 자극하여 그 대답을 알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허를 찌르는 것입니다. 비유는 오늘 본문에 언급되는 독수리, 백향목, 포도나무 등을 사용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비유로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수수께끼라는 말로 언급된 곳은 많지 않고 비유로 언급된 것은 많습니다. 그 중에 삼손의 수수께끼가 유명합니다.

 

사사기 14:14절입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낸 수수께끼입니다. 이것은 삼손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수수께끼입니다. 삼손이 어린 사자를 손으로 찢어 죽였는데 며칠 뒤에 보니 그 죽은 사자의 주검에 벌떼와 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꿀을 먹고 부모에게도 주었지만 사자의 주검에서 나온 꿀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삼손만 아는 문제입니다. 이런 수수께끼를 통하여 블레셋을 공격하는 빌미가 마련되는 것이 삼손의 수수께끼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수수께끼와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아들은 사람들은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하는 장치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성경본문의 수수께끼와 비유의 내용은 3-10절까지입니다. 여기에 대한 해석은 11-21절입니다. 비유와 해석을 다 하고 나서 새로운 비유를 22-24절에서 말씀함으로 오늘 본문이 마무리가 됩니다.

 

본문 3-6절과 11-13절을 봅니다. 앞의 말씀은 비유이고 뒤의 말씀은 해석입니다. 큰 독수리는 바벨론 왕을 말합니다.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와서 여호야긴 왕과 많은 포로를 잡아서 바벨론으로 끌고 갑니다. 이것을 독수리가 레바논에 이르러 백향목 높은 가지를 꺾어 그 연한 가지 끝을 장사하는 땅에 이르러 상인의 성읍에 두었다고 합니다. 즉 바벨론에 옮겨놓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레바논은 이스라엘의 땅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예루살렘을 레바논이라고 하는가 하면 예루살렘의 성전과 다윗과 솔로몬의 왕궁이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지어졌기에 백향목을 다윗의 가문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백향목의 연한 가지는 다윗의 가문인 여호야긴 왕을 말합니다. 여호야긴 왕을 사로잡아 가고 그 대신에 여호야긴의 삼촌인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본문 5-6절과 13-14절입니다. 그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가에 심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자라며 퍼져서 높지 아니한 포도나무가 되어 그 가지는 독수리를 향하였고 그 뿌리는 독수리 아래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높아지지는 않지만 생존을 한다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입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지만 결국 예레미야를 통하여 주신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들의 고집대로 애굽으로 피난 가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본문 7-10절과 15-16절입니다. 다른 독수리 한 마리가 등장합니다. 이 독수리는 애굽의 바로 왕입니다. 바벨론 왕에 의하여 세워진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의 말을 듣는 것의 여호와의 뜻입니다. 그런데 바벨론 왕을 배신하고 애굽의 왕을 의지한 것입니다. 애굽의 왕에게 도움을 받기 위하여 뿌리와 가지를 뻗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에 의하여 포도나무가 심겨진 것은 예루살렘에서 생존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인데도 이것을 거절하고 애굽을 의지하기 위하여 바벨론을 배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왕이 가만히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연한 잎사귀가 마르며 그 뿌리가 뽑혀 결국 말라지는 것입니다.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 왕을 배반하고 애굽의 왕을 의지한 것은 여호와의 언약을 배반한 것이 됩니다.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일 뿐 아니라 시드기야가 맹세할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을 배반하고야 피하겠느냐고 합니다. 주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시기를 시드기야가 맹세를 저버리고 언약을 배반하였기에 그 왕이 거주하는 곳 바벨론에서 왕과 함께 있다가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본문 17-21절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합니다. 바로가 큰 군대와 많은 무리로도 그 전쟁에 그를 도와주지 못합니다. 시드기야 왕이 언약을 배반하였기에 멸망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한다고 하십니다. 시드기야가 여호와의 맹세를 업신여기고 언약을 배반하였기에 그 죄를 그의 머리에 돌리며 그물로 치며 올무에 걸리게 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바벨론 왕이 사로잡아 가는 것을 전부 여호와께서 행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왕은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 뿐 아니라 시드기야를 따르던 자들까지 칼에 엎드려지고 그 남은 자는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열왕기하 25:1-7절입니다. “1 시드기야 제구년 열째 달 십일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그 성에 대하여 진을 치고 주위에 토성을 쌓으매 2 그 성이 시드기야 왕 제십일년까지 포위되었더라 3 그 해 넷째 달 구일에 성 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양식이 떨어졌더 4 그 성벽이 파괴되매 모든 군사가 밤중에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갈대아인들이 그 성읍을 에워쌌으므로 그가 아라바 길로 가더니 5 갈대아 군대가 그 왕을 뒤쫓아 가서 여리고 평지에서 그를 따라 잡으매 왕의 모든 군대가 그를 떠나 흩어진지라 6 그들이 왕을 사로잡아 그를 립나에 있는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그들이 그를 심문하니라 7 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 여호와의 말씀대로 이렇게 성취가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열왕기하 25:8-21절입니다. “봉독” 사람들만 포로로 잡혀간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까지 파괴가 되고 그 성전의 모든 기구들을 다 빼앗아갑니다. 덩치가 큰 놋으로 만든 기구들을 부수어서 싣고 갑니다. 사람들도 사로잡가 가서 죽였습니다.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바벨론에 미리 포로로 잡혀와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일말의 기대를 가졌던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들었을 때에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놀랍게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주에 보게 될 에스겔 18장을 보시면 이렇게 포로로 잡혀온 것이 자기들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핑계하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 인간의 자신의 죄를 깨닫고 스스로 주께로 돌이키는 것이 어느 정도로 불가능한 지를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철저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그 어떤 희망을 찾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한 달 정도 남은 총선을 앞두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절대다수의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다고 하는지 모릅니다. 물론 상대적으로 조금 나은 정부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결코 인간의 정치나 교육이나 경제로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쩌라는 말입니까? 우리의 소망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이 시간과 공간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수많은 일들이 마치 하나님의 거룩한 일 인양 포장하면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약속인 의에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멸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집스럽게 예루살렘을 지키려고 하는 것과 같은 모습니다.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 말씀을 누가 감히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이 믿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들을 다 포기하고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으라고 할 때에 순순히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지금까지 믿어온 모든 것들을 이제부터 믿지 않고 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오늘 낮에 어떤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모부가 목사님이고 삼촌이 장로님이라고 하시는데 그 삼촌인 장로님을 제가 좀 아는 분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려서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무얼 믿고 사는지 자기 입으로 말하는데 자기는 자기를 믿고 산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돌아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사람이라면 자기가 믿는 것들이 무너지고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기 언약은 어떻게 이루어내시는 것입니까? 예루살렘마저 완전하게 파괴되고 무너진 곳에서 하나님께서 새롭게 큰 독수리가 되셔서 자기 일을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독수리라고 하시는 표현은 없지만 앞에서 두 마리의 독수리가 하는 그런 일을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오실 때에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오셨다는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출19:4).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독수리 날개에 업혀서 가나안에 들어왔듯이 이제는 완전히 멸망한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친히 새로운 백향목 가지로 심으시겠다고 하십니다.

 

22-24절입니다. 백향목은 다윗의 가문이라고 앞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가지 끝의 연한가지를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으신다고 하십니다. 그 가지가 무성하고 아름다운 백향목이 되어 각종 새가 그 나무에 깃들이게 하신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말리고 마른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하신 바를 어떻게 이루어내시는 것입니까?

 

먼저 연한 가지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이사야 11:1절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53:1-12절입니다. “봉독”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연약한 가지로 오신 분이 대신 고난 받음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오시는 것은 기존의 세상질서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추구하는 높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낮추어 버리는 것입니다.

 

에스겔 17:24절의 말씀을 이루시는 분이 바로 아기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임을 누가복음 1:51-53절에서 증거 합니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언약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방법으로 힘을 기르고 세상의 힘에 의지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은 그들이 의지하는 것들을 다 심판하시고서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 의지하도록 만드십니다.

 

본문 23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심으신 백향목 가지가 자라게 되고 그 가지에 깃드는 각종 새들이 바로 열방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아오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믿고 나아오는 것은 세상의 힘과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된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듣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4:30-32절입니다. “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겨자씨를 너무 작아서 땅에 떨어지면 찾지도 못할 정도로 작습니다. 천국은 이런 모습으로 숨겨져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 숨겨진 나라를 알고 그 나라에 깃들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