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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19:1-14 애가(哀歌) 2012. 3. 28

 

1 너는 이스라엘 고관들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2 부르라 네 어머니는 무엇이냐 암사자라 그가 사자들 가운데에 엎드려 젊은 사자 중에서 그 새끼를 기르는데 3 그 새끼 하나를 키우매 젊은 사자가 되어 먹이 물어뜯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매 4 이방이 듣고 함정으로 그를 잡아 갈고리로 꿰어 끌고 애굽 땅으로 간지라 5 암사자가 기다리다가 소망이 끊어진 줄을 알고 그 새끼 하나를 또 골라 젊은 사자로 키웠더니 6 젊은 사자가 되매 여러 사자 가운데에 왕래하며 먹이 물어뜯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며 7 그의 궁궐들을 헐고 성읍들을 부수니 그 우는 소리로 말미암아 땅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황폐한지라 8 이방이 포위하고 있는 지방에서 그를 치러 와서 그의 위에 그물을 치고 함정에 잡아 9 우리에 넣고 갈고리를 꿰어 끌고 바벨론 왕에게 이르렀나니 그를 옥에 가두어 그 소리가 다시 이스라엘 산에 들리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10 네 피의 어머니는 물가에 심겨진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 11 그 가지들은 강하여 권세 잡은 자의 규가 될 만한데 그 하나의 키가 굵은 가지 가운데에서 높았으며 많은 가지 가운데에서 뛰어나 보이다가 12 분노 중에 뽑혀서 땅에 던짐을 당하매 그 열매는 동풍에 마르고 그 강한 가지들은 꺾이고 말라 불에 탔더니 13 이제는 광야, 메마르고 가물이 든 땅에 심어진바 되고 14 불이 그 가지 중 하나에서부터 나와 그 열매를 태우니 권세 잡은 자의 규가 될 만한 강한 가지가 없도다하라 이것이 애가라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

 

1절을 보시면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고관들을 위하여 애가(哀歌)를 지어 부르라고 합니다. 애가라고 하면 슬픈 노래 즉 사람이 죽었을 때 부르는 장송곡입니다. 물론 사람이 죽었을 때만 애가가 아니라 나라가 망했을 때에도 애가를 부릅니다. 이런 애가로 유명한 성경이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고 성전이 파괴 된 것을 슬퍼하는 다섯 개의 슬픈 노래입니다. 오늘 보는 에스겔의 애가도 시대적인 배경은 비슷합니다. 유다의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마지막 왕이 사로 잡혀가는 것을 인하여 슬픈 노래를 부르게 하시는데 이것을 두 가지 비유로 노래합니다.

 

2-9절입니다. “봉독” 첫째 애가의 비유는 암사자와 두 마리의 새끼 사자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자는 유대 왕조를 가리킵니다. 창세기 49:8-10절입니다. “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야곱의 마지막 유언의 내용입니다. 유다지파에서 왕이 나올 것과 또 그 위엄이 수사자와 암사자 같다고 합니다. 그 자녀들이 사자 새끼라고 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유언과는 달리 유다 지파의 왕들이 어떤 모습인지를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적을 보호하는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백성을 잡아먹는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암사자는 유다의 가문을 말합니다. 그 유다의 가문에서 나온 왕이나 고관들이 잔인한 약탈자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잠언 28:15절입니다.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 이스라엘 역사 속의 왕과 방백들이 부르짖는 사자가 짐승을 잡아먹듯이 백성을 학대하였습니다.

 

예레미야 22:1-9절을 봅니다. “봉독” 유다 왕의 집에 가서 왕과 신하와 백성들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다윗의 왕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으로 들어오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이집 곧 유다 왕의 가문이 망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망하는 이유는 언약을 배반하고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고를 들었지만 유다의 왕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여호아하스 왕이 애굽에 사로 잡혀 갔습니다. 10-12절입니다. “10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 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라 11 여호와께서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곧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이어 왕이 되었다가 이곳에서 나간 살룸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12 잡혀 간 곳에서 그가 거기서 죽으리니 이 땅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 여기서도 애가가 나옵니다. 왜 애가를 부르는가 하면 살룸 곧 여호아하스가 애굽에 잡혀가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23:31-34절입니다. “31 여호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삼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 달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32 여호아하스가 그의 조상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니 33 바로 느고가 그를 하맛 땅 립나에 가두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고 또 그 나라로 은 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 하고 34 바로 느고가 요시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 하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아갔더니 그가 거기서 죽으니라”

 

살룸 곧 여호아하스가 3개월 동안 왕이 되었습니다. 이 짧은 기간에도 그의 조상들의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그 결과로 애굽에 사로잡혀 가게 되는데 이 왕이 바로 오늘 본문의 첫째 사자새끼입니다. 에스겔 19:3-4절을 봅니다. “3 그 새끼 하나를 키우매 젊은 사자가 되어 먹이 물어뜯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매 4 이방이 듣고 함정으로 그를 잡아 갈고리로 꿰어 끌고 애굽 땅으로 간지라” 여호아하스가 젊은 사자가 되어 먹이 물어뜯기를 배웠다는 것은 왕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왕권으로 백성을 보호하고 여호와를 섬기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상들과 같이 악을 행하였기에 애굽에 사로잡혀가게 하신 것입니다.

 

에스겔 19:5-9절입니다. “봉독” 암사자 곧 다윗의 가문에서 왕이 사로잡혀 갔으니 다른 왕을 세웁니다. 그 왕이 바로 시드기야입니다. 이 왕을 여호야긴으로 보기도 하지만 유다의 완전한 멸망의 애가이기에 시드기야를 둘째 사자새끼로 봅니다. 시드기야의 악행을 열왕기하 24:18-19절에서 봅니다. “18 시드기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일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하무달이요 립나인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19 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시드기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 왕에게 사로잡혀 자기의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하고 그의 눈이 뽑힌 채로 잡혀가서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이 에스겔로 하여금 애가를 부르게 한 내용이 됩니다.

 

에스겔 19:10-14절입니다. “봉독” 두 번째 애가의 비유는 포도나무입니다. 포도나무를 이스라엘에 비유한 것은 성경에서 많이 살펴보았습니다. 그 중에 한곳만 다시 보겠습니다. 시편 80:8-17절을 봅니다. “봉독” 에스겔서와 연결이 되는 말씀입니다.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가나안 땅에 심었습니다. 물이 넉넉하여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 그 가지들은 강하여 권세 잡은 규가 될 만한 하였습니다. 이것은 유다의 왕들을 말하면서 동시에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 포도나무가 뽑혀 땅에 버려짐으로 마르고 불에 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가지 중 하나에서 불이 나와 그 열매를 태움으로 권세 잡은 자의 규가 될 만 한 가지가 없다고 합니다. 즉 왕이 될 만 한 자가 다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이 애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과 방백들을 사자와 포도나무로 비유하면서 애가를 부르게 한 것은 이제 사자도 잡혀 가 버렸고 포도나무도 불에 타버린 것입니다. 더 이상 이스라엘에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애가로 영영 이스라엘과 유다가 끝이 나는 것입니까? 시편 80:17-19절입니다. “17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18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포도나무가 불에 탔을 지라도 주의 오른 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한 인자에게 손을 얹어 구원하여 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15:5절입니다.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위해 울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냐” 예루살렘을 불쌍히 여기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울자가 없었습니다. 수많은 왕들이 세워졌지만 온전한 왕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이 외쳤지만 거짓 선지자의 수와 힘에 비하면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결국이 바벨론에 의하여 파괴되고 마지막 왕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버린 것입니다. 이런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한 예루살렘을 누가 불쌍히 여기며 누가 울어주며 누가 평안을 묻습니까?

 

누가복음 19:41-44절입니다.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루살렘을 위하여 우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들이 평화에 관한 소식을 모릅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예루살렘이 배척합니다.

 

마태복음 23:37-38절입니다.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 예수님의 보살핌을 거절한 예루살렘은 예레미야 에스겔 시대에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하여 파괴가 되듯이 로마의 의하여 파괴가 됩니다.

 

그러면 또 다시 예루살렘의 회복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예루살렘의 회복을 기다리며 종말의 시간표를 현재의 이스라엘 국가를 중심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운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3일 만에 일으키겠다고 하셨습니다. 3일 만에 일으키겠다는 성전이 예수 그리스의 육체임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제자들이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기의 몸에 자기 백성들을 붙여서 성전을 만드시는 일은 주님의 애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애가는 십자가에서 부르짖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애가보다 더한 애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유일하게 하나이셨는데 그 하나 됨에서 분리되는 아픔이 바로 이 애가였다고 봅니다. 이 버림받는 슬픈 탄식을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고 철저하게 버리신 것입니다. 그 버리심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임을 천사들도 몰랐고 마귀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애통한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렇게 애통함을 결국 십자가로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완성을 우리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울면서 기다립니다. 언제 주님께서 그 완성을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요한계시록 5:5절입니다.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사도요한이 두루마리의 일곱 인을 뗄 자가 없어서 울고 있을 때에 장로 한 사람이 울지 말라고 하면서 이 인봉을 뗄 자가 유다지파의 사자(獅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실 것을 말씀합니다. 일찍 죽임 당한 어린 양이 일곱 인봉을 떼신다는 것은 이제 모든 전권을 예수님이 받아서 집행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보면서 애가를 부릅니다. 지금 사순절기간이라고 여러 가지 금욕적인 행사들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순절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보면서 늘 우는 것입니다. 세상이 죽은 세상인데 그런 죽은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자들을 보면서 울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이 땅의 현실을 보면서 웁니다.

 

522장 찬송가 가사입니다. 웬일인가 내 형제여 주 아니 믿다가 죄 값으로 지옥형벌 너도 받겠구나! 웬일인가 내형제여 마귀만 따르다 저 마귀 지옥 갈 때에 너도 가겠구나! 웬 말인가 내 형제여 재물만 취하다 세상물질 불탈 때에 너도 타겠구나! 웬일인가 내 형제여 죄악에 매여서 한없이 고생하는 것 참 보겠구나! 사랑하는 내 동포여 주께로 나오라 십자가에 못 박힌 주 너를 사랑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