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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 설교]  [동영상 설교]

에스겔 20:10-27 광야에서의 우상숭배 2012. 4. 11

 

10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나와서 광야에 이르게 하고 11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 12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 13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준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에게 쏟아 멸하리라 하였으나 14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달리 행하였었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나라들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 15 또 내가 내 손을 들어 광야에서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그들에게 허락한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지 아니하리라 한 것은 16 그들이 마음으로 우상을 따라 나의 규례를 업신여기며 나의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음이라 17 그러나 내가 그들을 아껴서 광야에서 멸하여 아주 없이하지 아니하였었노라................. 27 그런즉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 조상들이 또 내게 범죄하여 나를 욕되게 하였느니라

 

지난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우상 숭배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애굽에서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여 내십니다.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구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일방적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라는 것을 지난주일 오후에 시편 145편에서도 보았습니다.

 

애굽에서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린 양의 피로 구원하여 내시고 홍해를 건너서 광야로 들여놓았습니다. 그런데 광야에 들어가기도 전에 홍해 바다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 원망을 출애굽기 14:9-14절을 봅니다. “봉독” 애굽의 병거가 추격합니다. 앞에는 홍해 바다 뒤에는 애굽의 특별병거 6백대와 모든 병거가 있습니다. 좌우로는 산들입니다. 진퇴양난, 독안에 든 쥐와 같은 신세입니다. 바로 며칠 전에 10가지 재앙에서 살아나왔지만 그러나 원망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광야에 들어가기도 전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이런 자들을 향하여 모세는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싸우실 것이라고 합니다. 아니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가만히 있으라니요! 가만히 있는 것이 더 불가능한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언제나 인간의 불가능과 원망과 우상숭배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것이기에 사람의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설교들이 마치 홍해 바다 앞에서 물바가지를 들고 물을 퍼내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모세가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가만히 있을 위인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을 때에 홍해는 갈라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라진 바다를 건너고 애굽 군대는 추격하다가 홍해 바다에서 수장을 당합니다. 모세가 찬양을 합니다. 미리암과 백성들이 화답을 합니다. 여호와는 큰 용사라고 찬양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찬양이 입에서 끊어지기도 전인 3일 만에 물이 떨어지자 원망을 합니다(출15:22-24). 두 달 보름 만에 양식이 떨어지자 원망합니다(출16:1-2). 우리가 이들을 보고 왜 그러느냐고 말할 수준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도 물이 없고 양식이 없다면 당장 원망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만 율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물을 주시면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면서도 율례를 주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안식일입니다.

 

오늘 본문 에스겔 20:10-24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율례와 규례 중에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을 시내산에 이르기 전에 이미 광야에서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6:26-27절입니다. “26 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매일 하루양만 거두어 그날의 양식은 그날에 먹게 하였으나 남겨 두었다가 벌레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두기 위하여 나가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나간 자들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계명 중에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 계명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이미 안식일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만 다시 반복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였습니까?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에서는 천지 창조를 기억하기 위하여 안식일을 지키라고 합니다(출20:11). 약 40년이 지나서 모압에서 언약을 갱신하면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계명에서는 십계명의 내용이 조금 달라집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가 애굽에서 구원받았기에 지키라고 합니다(신 5:15). 오늘 본문에서도 안식일을 지키라고 무려 6번이나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안식일이 이렇게 중요합니까? 안식일이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 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왜 언약의 표징이 되는가 하면 이 안식은 말 그대로 일하지 않고 쉬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사바트’라는 말입니다. 어느 교회 다니는 사람이 커피 전문점을 개업하면서 목사에게 어떤 이름을 하면 좋겠는지 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사가 ‘사바트’라는 말을 해 주었답니다. 그래서 카페 이름을 그렇게 짓고서는 괄호로 ‘쉼’이라는 번역을 붙여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카페는 주일도 일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쉼’인데 쉬지 못하는 자본주의의 욕망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의 모든 혜택을 일한 것이 없이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도 일한 것이 없이 은혜의 선물로 받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을 어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선물과 구원의 선물을 거부하는 반역 행위가 됩니다. 이것은 애굽의 사고방식입니다. 나의 노동이 나를 살린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노동으로 사는 것은 아담의 타락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노동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으로 구원에 이르게 됨을 안식일의 쉼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표징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합니까?

 

10-12절을 봅니다. “봉독” 자기 노동으로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 광야에 이르게 하십니다. 물도 양식도 없는 곳에서 사람이 준행하면 삶을 얻을 수 있는 율례와 규례를 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만나 사건에서 보았다 시피 안식일을 어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전부를 어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어긴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할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한 것입니다.

 

13-14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여호와의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에게 쏟아 멸하리라 하였으나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달리 행하였다고 합니다. 마땅히 진멸을 받아야 하지만 진멸하지 아니한 이유는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나라들 앞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고 진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다 죽게 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할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하였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하여 진멸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계속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5-17절입니다. “봉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않겠다고 맹세하신 이유는 그들이 마음으로 우상을 따라 여호와의 규례를 업신여기며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더럽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아껴서 광야에서 멸하여 아주 없이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꼈다는 것 역시 무언가 예쁜 구석이 있어서 아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을 아끼는 것은 귀할 때에 아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낀 것은 그들이 마음으로 우상을 섬기며 우상을 섬기는데 아꼈다는 말씀은 이것도 결국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아껴두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위하여 아끼신 것입니다.

 

18-24절입니다. “봉독” 18절을 보시면 광야에서 그들의 자손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10-17절까지는 광야 1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18절 이하는 광야 2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야 1세대가 여호와의 언약을 믿지 않아서 광야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 다음 세대 역시 여호와의 율례를 지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도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지만 이들 역시 여호와의 규례를 어기고 안식일을 더럽혔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분노를 쏟으며 진노를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시 여호와의 자기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애굽에서도 광야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규례를 행하지 아니하고 율례를 멸시하며 안식일을 더럽혔습니다. 눈으로 그들의 조상들의 우상들을 사모하였습니다. 민수기 14:22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10번이나 하나님을 거역하였다고 합니다. 10번이라면 약 4년에 한번입니다. 그러나 10번이란 평소에도 늘 반역하는 마음이 들끓고 있다가 폭발하여 나온 것이기에 항상 반역하는 마음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그들의 마음에는 우상을 사모하는데 하나님의 언약은 이들을 출애굽 시키셔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셔야 합니다. 이 사이에 하나님과 백성들의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과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별세시켜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여 놓으시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늘 마음에 우상을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의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어 그들의 손을 잡아 끌어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애굽의 우상을 사모하고 있었기에 손에 끌려 나오면서도 그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천사의 손에 끌려 나오면서도 소돔과 고모라를 향한 마음이 가득하여 뒤를 돌아본 롯의 아내와 같은 마음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25-27절을 봅니다. “봉독” 계속하여 여호와를 거역하는 그들에게 옳지 않은 율례와 목숨을 살리지 못하는 규례를 주어서 지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바울의 서신을 가지고 율법이 사람을 죄 아래 가두는 역할로 해석을 많이 합니다. 그렇다면 26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의 맏아들을 제물로 바치도록 하나님께서 시키셨다는 말입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와 심지어 자신들의 아들을 몰렉에게 불에 태워 제사를 드리는 일을 여호와께서 시키신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원해서 한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1장의 말씀대로 그들의 완악한 대로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을 막지 않으시면 그런 모습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을 신약에서 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9-12절입니다. “9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하는 자들은 사탄의 역사를 따라 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을 받지 않아서 사탄의 거짓된 역사를 따라 가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이런 항의들은 이미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의 죄악 된 반응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이 이런 항의를 평소에 늘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언제 한번 범사에 감사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잘되면 자기 탓이고 못 되면 조상 탓이라고 하듯이 전부 다른 사람과 심지어 하나님까지 원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대로 내 버려두셨다면 우리는 이미 소돔과 고모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심판하지 아니하신 것은 길이 참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구원받을 만한 때요 은혜의 때입니다(고후6:2).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이 광야이며 나그네의 삶입니다. 어제 저녁에 초상집에 갔다 왔습니다. 우리도 다 그길로 갑니다. 그러므로 광야 같은 세상에서 우리의 마음으로 늘 섬기고 있는 온갖 우상에서 돌이키시기를 바랍니다. 회개하고 주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곧 오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