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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4:1~9 미련한 자 2017. 7. 12

 

1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2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하느니라 3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하느니라 4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5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아니하여도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뱉느니라 6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쉬우니라 7 너는 미련한 자의 1)앞을 떠나라 그 입술에 지식 있음을 보지 못함이니라 8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도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니라 9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

 

오늘 본문에서 미련한 자라는 단어가 1, 3, 7, 8, 9절에 나옵니다. 미련하다는 국어사전적 의미는 어리석고 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미련하다는 뜻은 세상이 말하는 국어사전적인 의미로 보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용되는 미련하다는 히브리어 단어는 두 종류인데 미련하고 어리석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무엇이 어리석고 미련한 것인지 찾아보면 미련한 자는 죄악의 길을 따른다고 합니다(107:17).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는 일에 무지한 것이 어리석고 미련하고 지각이 없는 자라고 합니다(4:22). 그러므로 성경에서 미련한 것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지만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헌다고 합니다. 지혜로운 여인에 대하여는 잠언의 마지막장인 31장에 잘 나옵니다. 그때 다시 보기로 하고 성경에서 자기 집을 세운 여인으로 한 사람을 들자면 룻입니다. 시아버지와 남편과 동서의 남편까지 죽어버린 나오미의 가정을 세운 자가 됩니다. 룻은 나오미의 가정을 세운 것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편입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룻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주시는 계시입니다. 완전히 망한 집안의 하나님을 믿고 따라오는 것은 인간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지혜의 역설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 집을 헌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자기의 집을 허는 여인이라면 대표적으로 이세벨과 같은 여인입니다. 바알숭배자의 딸이 아합에게 시집을 왔습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이 탐이 나지만 율법으로 인하여 빼앗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에 거짓말하는 증인 둘을 세워서 나봇을 모함하여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을 왕의 앞으로 돌려놓았습니다. 그 집안을 완전히 망치게 됩니다. 아합은 전쟁에서 죽고 그가 탄 수레의 피는 개들이 핥았고 이세벨은 내시들이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개들이 시체를 먹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미련한 여인은 자기 집만 허무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도 허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만이 자기 집을 세우고 허는 것이 아니라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들 자기 인생이라는 집을 건축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의 집을 건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타락한 인생들은 미련하고 어리석어서 참된 지혜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멋있게 집을 짓는다고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보실 때에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지은 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위에 세워지지 않는 것은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그 주초를 반석위에 세우는 자들입니다. 반석이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지지 않는 인생이란 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집을 지은 자들입니다.

 

2절입니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합니다. 여기서 정직하게 행하는 자를 지혜로운 자로 보고 패역하게 행하는 자를 미련한 자로 봐도 됩니다. 그러면 누가 지혜로운 자로서 자기의 집을 세우는 자가 됩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미련한 자로서 자기 집을 허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미련하고 패역하다는 것은 여호와를 경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멸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 사람을 만나서 말씀을 나누어보면 사람들은 기록된 말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들어온 세상의 지식과 종교성이 버무려진 온갖 설교들을 진리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여호와를 경멸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지난주 구역모임 마치고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많이 바치면 많이 거두고 적게 바치면 적게 거둔다는 말씀을 가지고 교회에 헌신충성 봉사한 양에 따라 세상에서 복을 많이 받고 하늘에서도 상이 크다는 것을 절대 진리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7~8절입니다.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너무나 명백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심어 썩어질 것을 거둔다고 하거나 썩어질 것을 심어 영생을 거둔다고 하는 것이 스스로 속는 것이며 이런 것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며 경멸하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한다고 합니다. 미련한 자의 특징은 교만한 것입니다. 교만은 아담과 하와가 유혹받을 때에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것이 교만하게 하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에 넘어간 인간은 어느 누구도 교만하지 않는 자들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런 자들은 결국 매를 자청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하는 것입니다. 복음 칼럼 란에 박정우 전도사의 자기 비하인가? 자기 부인인가? 하는 글을 한번 보시기바랍니다. 똥 덩어리니 없음이니 벌레니 하는 말이 정말로 자기 부인과 자기 고백의 말인지 남의 말을 앵무새처럼 옮긴 것인지 돌아보라고 하는 글입니다.

 

4절입니다.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다고 합니다. 왜 갑자기 소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까? 소를 키우려면 많은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만 삼시 세끼를 먹는 것이 아니라 소도 삼시 세끼를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소를 키우려면 외양간도 있어야 하고 소죽을 끓여서 먹여야 합니다. 시골에서 보면 이른 아침에 어머니는 부엌에서 밥을 하지만 아버지는 다른 아궁이에서 소죽을 끓이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귀찮아서 소를 키우지 않으면 구유가 깨끗하겠지만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습니다. 밭을 갈고 논을 가는 일을 소가 할 뿐 아니라 소의 배설물은 아주 유용한 거름이 됩니다.

 

성경의 이러한 내용은 게으름과 부지런함에 대한 잠언이기도 합니다만 오늘 우리에게는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에 대한 부지런함으로 봐야 합니다. 바울은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을 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복음 사역자가 복음으로 사는 것을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적용하자면 교회 봉사나 구역 모임과 같은 것이 귀찮아서 안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참여함으로 얻는 유익이 더 큽니다. 물론 참여하게 되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참여하지 않고 혼자 지내면 자신이 깨끗하여 보이지만 이것이 가짜임을 함께 함으로 들통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드러나야 주님을 더욱 의지합니다.

 

5절입니다.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아니 하여도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뱉는다고 합니다. 신실한 증인이란 구약에서 보면 참 된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의 메시지는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늘 책망하면서 주께로 돌이키라고 합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 말을 합니다. 전쟁 직전에 있어도 하나님께 제사를 잘 드리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다가 막상 전쟁이 일어나서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가게 되면 2년 안에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70년 만에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증인인지 거짓 증인인지 구별은 하나님을 좋게 하느냐 사람을 좋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세벨이 거짓 증인을 세우듯이 거짓 증인이 되면 의인을 죽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해라고 요구하는 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사야 30:8~10절입니다. “8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1)후세에 영원히 있게 하라 9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10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하려고 하는 자들에게 하신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책에 써서 후세에 영원히 있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대에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내 뱉습니다. 이것은 숨을 쉴 때 숨을 내 뱉는다는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흔히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을 숨 쉬는 것 빼고 다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단어 뜻대로 살펴보면 숨 쉬는 것도 거짓말이라는 뜻입니다. 희대의 사기꾼 조희팔씨는 시체로 분장하여 관에 들어가서 장례를 치르는 것도 찍었습니다. 이것을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유병언씨가 실종 된지 보름 만인가만에 백골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하는 말들도 사람들이 믿지를 않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저런 거짓말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말들 보다 더 심각한 거짓말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8:42~45절입니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1)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1)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1)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다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섞어 버리면 이것이 거짓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기꾼에게 속아도 얼마나 분합니까? 그런데 세상의 거짓말쟁이나 사기꾼에서 속은 것은 이 세상에서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진리에 대한 문제에 속으면 어떻겠습니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이를 갈며 슬피 운다고 표현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다는 말은 율법에서도 목숨을 살려주는 증인이 됩니다. 그런데 거짓 증언을 하여 나봇을 죽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세대의 신실한 증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리스도만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을 섞어 넣으면 그것이 거짓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쉽다고 합니다. 거만한 자는 오늘 말씀들과 연결하여 보면 교만한 자이며 미련한 자입니다. 이들은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기에 어떠한 지혜의 말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교만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성경으로 복음을 증거 하여도 따라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나, 그렇지만, 그래도 이런 접속사를 붙이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경험들이 무너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쉽다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거만함과 교만함이 깨어져야만 됩니다. 그래서 가난한 마음이 되어야 지혜에 귀를 기울입니다. 세상의 것들로 가득한 사람이나, 종교적인 업적으로 가득한 사람들이나, 자기 의로 가득한 사람은 복음을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신 것입니다.

 

7절입니다. 너는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라 그 입술에 지식 있음을 보지 못함이라고 합니다. 미련한 자가 누구입니까? 그 입술에 지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지식은 어떤 지식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신학교가 많은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심이 없다는 말이냐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지식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도 왜곡하여 그렇게 하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하늘에 상을 쌓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미련한 자가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8절입니다.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도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는 길이 생명의 길인지 멸망의 길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자기의 가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자기 스스로 속고 있기에 모르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우리교회 어떤 청년이 다단계를 하려고 해서 제가 말렸습니다. 야고보서 4장의 말씀까지 인용하면서 아주 강하게 말렸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확신에 가득하여 그길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 일로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자기의 확신에 사로잡혀 다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가는 이 길은 지혜로운 자의 길입니까? 미련한 자가 스스로 속고 가는 길입니까?

 

빌립보서 3:10~14절입니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미련한 자는 자신이 잘 가고 있다고 착각하기에 돌이키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믿음의 길로 간 바울사도는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는 길은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다고 합니다. 세상에 본받을 것이 없어서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것이 지혜로운 자들이 가는 길입니다. 이런 자들은 내가 온전히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에게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나를 잡으신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나를 잡아내셨기에 그 십자가를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갑니다. 그 상이 부활의 영광입니다.

 

고린도전서 15:31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부활에 대하여 증거 한 바울이 자신이 날마다 죽는다고 합니다. 에베소서는 이미 그리스도 함께 살리심이 받아 하늘에 앉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빌립보서의 말씀대로 내가 잡은 것이 아니라 나를 잡은 그것을 잡기 위하여 달려간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속이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속이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완성보다 다른 것을 붙들게 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십자가보다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게 하든지, 영적인 지식을 얻는 것으로 완성을 말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역사 속에서 성도는 날마다 죽고 날마다 달려가는 모습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미련한 자에 대하여서만 다시 보겠습니다. 1절에서 미련한 여인은 자기의 집을 허는 자들입니다. 3절에서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는 자입니다. 7절에서는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라고 합니다. 8절에서는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자기도 속고 남도 속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속는 줄도 모르는 자들이 미련한 자들입니다. 이제 끝으로 9절에서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깁니다. 표준 새번역으로 이 절을 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속죄 제사를 우습게 여기지만,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누린다.”

 

예레미야 6:10~14절입니다. “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11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남편과 아내와 나이 든 사람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 12 내가 그 땅 주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밭과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15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4절에서 죄를 가볍게 여긴다는 말을 개역한글에서는 죄를 심상히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는 자들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백성의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제사장과 선지자가 까지 다 탐욕을 부리고 있는데도 평강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이렇게 많고 이렇게 많은 선교사를 보내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한국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설교를 많이도 들어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를 심상히 여기고 죄를 가볍게 여기는 미련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죄를 심상히 여기면서 거짓 평강과 축복을 남발하는데 그들이 조금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러함으로 결국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이것이 미련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죄를 심상히 여기지 않습니까? 성령이 임하면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 임을 압니다(16:9). 그렇다면 질문합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사십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나를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나의 행위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나의 생각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믿는 내용과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미련한 자의 모습입니다. 미련한 자는 죄를 가볍게 여기기에 은혜도 가볍습니다.

 

그러나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정직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미련한 자와 비교하여 보면 됩니다. 정직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기지 않습니다. 죄에 대하여 아주 무섭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들었다는 사람들 중에 죄를 아주 가볍게 여깁니다. 어차피 인간이 죄인인데 내가 하는 짓이 다 죄라고 하면서 막살자고 합니다. 그러면서 복음으로 자유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덕을 세우지 못하는 일들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유가 성경에 있습니까?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위하여 평생토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의 자유를 가지고 정말로 형제의 종노릇하고 있습니까?

 

요한일서 1:5~10절입니다.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사도들이 이런 서신을 남겨둔 것은 우리가 사도들의 말을 들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가지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귐은 빛 가운데 사귀는 것입니다. 이런 사귐은 우리의 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증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기에 우리를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시기에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범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하게 여기지만 정직한 자 곧 은혜를 입은 자는 죄에 대하여 민감해집니다. 죄에 민감할수록 더욱 주님을 의지합니다. 이런 자들은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무너지고 날마다 십자가에 의하여 다시 세워지는 자들입니다. 이 역사 속 성도의 실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