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예레미야 3:1~10 거짓 된 회개 2013. 5. 22

 

1 그들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3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4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이시오니 5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 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하시니라 6 요시야 왕 때에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배역한 이스라엘이 행한 바를 보았느냐 그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 7 그가 이 모든 일들을 행한 후에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게로 돌아오리라 하였으나 아직도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는 그것을 보았느니라 8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9 그가 돌과 나무와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행음하여 이 땅을 더럽혔거늘 10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어느 목사님이 한국교인들은 회(悔)는 잘하는데 개(改)는 잘 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행동을 후회하고 뉘우치며 울기는 잘하지만 정작 필요한 그 행위를 고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한국교인들만의 특징이 아니라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사기에서 보았습니다만 회개조차 이용하는 자들입니다. 평소에 늘 우상을 섬기다가 위기 때에 여호와를 부릅니다. 여호와께서 응답하지 아니하시자 스스로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지만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구원하여 주는 자가 그들의 머리가 될 것이라고 찾아 나섭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니라 오히려 여호와를 버리는 것임을 보았습니다.

 

3:1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남편에게 소박맞은 아내가 다른 사나이를 찾아 갔으면, 본남편이 그 여자를 다시 아내로 맞을 수 없는 법이다. 그랬다가는 이 땅이 부정을 탄다. 그런데 너는 수많은 정부와 놀아나고서 나에게 돌아오겠다니, 될 법이나 하느냐? 이는 내 말이니 잘 들어라”

 

이 말씀의 배경은 신명기 24:1~4절을 배경으로 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혼 증서를 써서 주면 이 여자는 다른 사람과 결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버림받은 이 여인과 결혼한 남자도 이 여자를 미워하여 이혼증서를 주었거나 또는 그 남자가 죽었을 때에 처음 남편이 그 여자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혼의 사유가 불분명합니다. 만약 여자에게 음행의 문제가 있다면 이혼이 아니라 돌로 쳐서 죽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의 수치 되는 일을 발견하였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로 인하여 남편이 아내를 미워하면 함께 사는 것이 고역이겠지요! 그래서 이런 경우에 이혼증서를 써 줌으로 그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 시집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법을 악용하여 유대의 남자들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혼증서를 남발한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신약에서 예수님께 책망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19:1~12절을 봅니다. “봉독”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시험하여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되라고 하신 말씀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하시면서 둘이 한 몸이기에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방금 본 신명기 24장의 말씀으로 되묻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왜 이혼증서를 주어서 버리라고 하였느냐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를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혼증서를 주지 않고 아내를 괴롭히는 것보다 이혼증서 주어서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게 하는 것이 약자인 여자를 보호하는 차원이지 이것이 원래 그런 뜻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음행한 연고 외에는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것이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다시 이 문제를 물을 때에 예수님께서 답변하시기를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1절은 무슨 말씀입니까? 남편에게 미움을 받아서 이혼을 당한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 갔으면 그 여자는 본 남편에게 돌아올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다른 남자와 한 몸이 되었기에 다시 본 남편에게 돌아와서 그 남편과 합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진다고 합니다. 땅이 더러워지면 제때에 비가 오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버림받은 여인이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각주를 보면 행음하였으나 돌아오라고 합니다. 물론 이렇게 번역하는 것은 나중에 4장에서는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시는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만 3장에서는 수사의문문으로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남편들이 간음한 이유가 아닌데도 버림받은 여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너는 수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나에게 돌아오려고 하느냐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3:2절입니다.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고 합니다. 이방의 우상 숭배는 무성한 나무아래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은 이미 우상숭배가 성행하기에 헐벗은 산에까지 우상숭배를 한 것입니다. 이것을 길가에 앉아서 음행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서 아라바 사람과 같다고 합니다. 아라바 사람들이 당시에 약탈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기다린 것처럼 남 유다의 백성들이 음행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기다렸다는 말입니다. 약탈하며 사는 자들은 그들의 생존이 달려 있기에 목숨을 걸고 기다립니다. 이런 모습으로 남 유다의 백성들이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다는 말씀입니다.

 

3:3절입니다.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땅이 더러워지면 제때에 비가 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들어가 사는 땅은 애굽과 달라서 비를 흡수하는 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제때에 내려 파종과 추수를 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그 땅을 더럽히면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않겠다고 신명기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땅에 비가 오지 않는데도 창녀의 낯을 가졌기에 그 수치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3:4~5절을 공동번역으로 봅니다. “4 지금도 나를 아비라고 부르기도 하고 젊은 날의 애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5 '아무렴, 끝없이 화를 내시지는 않을 거야, 언제까지나 진노하시지는 않을 거야.' 이런 말을 하면서 못하는 짓이 없었다." 수치를 모르는 창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젊은 날의 애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2절에서 본 것처럼 청년 때의 인애와 신혼 때의 사랑을 이미 망쳐버린 창녀가 되었는데도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뻔뻔하게 부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분노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악을 행하여 자기 욕심을 이룹니다.

 

출애굽기34:5~6절입니다. “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압니다.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분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악행을 하면서도 이런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그들이 계속 악을 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다른 사람들 볼 것 없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종교성을 비판합니다. 신비주의와 금욕주의가 옳지 않음을 압니다. 그리고 복음이 무엇인지 은혜가 어떠한지를 말로는 잘합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죄인이니 그렇지, 우리가 별 수 있는가?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어야 할 정도로 우리는 불가능한 죄인들이라는 말까지 하면서 거저 주시는 은혜로만 사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이 정말 자신의 죄를 알고 회개하면서 하는 말인지 아니면 자신의 악을 행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지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3:6절입니다. 요시야 왕 때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요시야 왕은 다윗 이후에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개혁을 한 왕입니다. 개혁적인 왕이라면 히스기야 왕이 있습니다. 모세 때의 놋 뱀을 그때까지 음란하고 섬기고 있기에 이것을 부수어서 가루로 만들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보다 더 철저하게 개혁한 왕이 요시야입니다. 요시야는 남 유다의 가장 악한 왕으로 불리는 므낫세의 아들입니다. 8세에 왕이 되어 여호와 앞에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합니다. 요시야가 왕이 된 18년에 성전수리를 명합니다. 성전수리를 하다가 성전에서 율법 책을 발견합니다. 요시야가 율법 책을 읽을 때에 옷을 찢습니다. 율법대로 살지 못하였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면서 여선지자 훌다에게 어떻게 될지를 묻습니다.

  

열왕기하 22:19~20절입니다. “19 내가 이곳과 그 주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20 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로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사자들이 왕에게 보고하니라” 요시야 한 사람만이 제대로 회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합니다.

 

열왕기하 23:1~27절입니다. “봉독” 요시야처럼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이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고 합니다. 전무후무한 개혁을 한 요시야이지만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 죄를 므낫세의 죄로 말씀하시지만 므낫세만이 아니라 유다백성 전체의 죄가 어떠한지를 보여줍니다. 요시야의 명령을 따라 외형적으로 우상들을 물리치고 유월절을 제대로 지키며 개혁을 이루었지만 그들 마음속에 있는 우상들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서도 돌이키지 못한 유다의 백성들입니다.

 

예레미야 3:6~9절입니다. “봉독” 북 이스라엘이 계속음행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돌아오도록 매를 들기도 하고 기다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언니가 이러한 것을 자매 유다가 보았습니다. 신랑 되신 여호와께서 신부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는데 한 두 번이 아니라 계속된 음행으로 인하여 이혼증서까지 주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한 것입니다. 이러한 북 이스라엘의 심판을 본 남 유다가 정신을 차려야 마땅한데 유다가 두려워하지 않고 가서 계속하여 행음을 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3:10절 새 번역입니다. 새 번역입니다. “이런 온갖 음행을 하면서도, 배신한 자매 유다는, 건성으로 나에게 돌아온 척만 하고, 진심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나 주의 말이다.” 돌아오는 체만 하고, 건성으로 나에게 돌아온 척만 하고 진심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모습이 이스라엘과 유다만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교회를 다니며, 회개도 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모양만 낸 것은 아닙니까? 복음을 듣고서 세상이 어떠함을 알아 세상 사랑하기를 멈추고 예수님을 더 사랑하십니까?

 

베드로후서 3:7~9절입니다.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아직 주님이 오시지 않으신 이유는 우리를 향하여 회개하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참된 회개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