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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6:1~14 누가 능히 헤아리랴 2016. 6. 29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네가 힘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 3 지혜 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치는구나 큰 지식을 참 잘도 자랑하는구나 4 네가 누구를 향하여 말하느냐 누구의 정신이 네게서 나왔느냐 5 죽은 자의 영들이 물 밑에서 떨며 물에서 사는 것들도 그러하도다 6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 7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 8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9 그는 보름달을 가리시고 자기의 구름을 그 위에 펴시며 10 수면에 경계를 그으시니 빛과 어둠이 함께 끝나는 곳이니라 11 그가 꾸짖으신 즉 하늘 기둥이 흔들리며 놀라느니라 12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1)라합을 깨뜨리시며 13 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 손으로 날렵한 뱀을 무찌르시나니 14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욥기 26장은 빌닷의 말에 대한 답변입니다. 지난주에 본 빌닷의 말은 그동안 욥을 공격한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의 말을 압축한 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질서정연합니다. 일관성이 있습니다. 혼란이나 고민의 흔적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과 전통과 신념에서 전혀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런 모습을 율법주의, 바리새 주의와 연결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기계적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금요일 공부할 때에 기계적 대속 론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마치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면 상품이 나오는 것처럼 기계적인 체제를 사람들이 원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말씀 한 번 더 봅니다. 25:1~6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과 높으심을 말하면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겠느냐며 마지막 까지 욥을 몰아 부칩니다. 구더기 같고 벌레 같은 주제에 어떻게 감히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하느냐는 책망을 합니다. 이런 책망에 대한 욥의 답변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욥이 빌닷에게 하는 말이지만 욥의 세 친구 전부에게 하는 말입니다. 네가 힘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정말 잘 도와주었다는 말이 아니라 비난입니다. 힘없는 자, 기력 없는 팔, 지혜 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쳤다고 하는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그런 말을 누구를 향하여 하며 누구의 정신이 네게서 나왔느냐고 합니다. 방금 보았던 25장의 빌닷의 말도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과 높으심을 말합니다. 그 높으신 하나님의 군대를 계수할 수 있느냐는 말을 빌닷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끝까지 욥이 교만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는 공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세 친구들의 말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욥 자신이 까닭 없는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욥의 친구들과 생각이 같았습니다. 욥의 친구들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욥도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과 높으심을 알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보다 그러한 체계와 이론들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이 고난을 통하여 그런 체계가 흔들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의인을 상주시고 악인을 심판하실 것인데 왜 자신이 이런 고난을 당하는지 의심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모든 체제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흔들리는데 친구들의 공격은 일관성이 있습니다. 한결같습니다. 그들은 빈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욥은 그런 가치관들이 흔들린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일관성이 있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이랬다저랬다 흔들리는 사람이 좋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관성이 있고 신실한 사람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정말로 일관성만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취소를 하거나 사과하는 일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가 단언적으로 한 말의 일관성을 지킬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부부관계든 자식관계든 교인관계이든 회사관계든 자신이 한 말을 정말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간다면 세상의 모든 관계는 다 깨어졌을 것입니다.

 

욥은 일관성 있는 친구들에게 그러한 율법적인 일관성이 까닭 없이 고난당하는 나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느냐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들이 자연의 질서를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로 말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창조의 질서처럼 인간세계도 인과응보의 질서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인과응보의 질서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인과응보의 질서만 기계적으로 적용을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의 긍휼은 나타날 수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드러날 길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와 그 완성의 비밀을 다 이루신 곳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인자가 서로 입을 맞추는 자리입니다.

 

시편 85:10절입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난다고 합니다. 인애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은혜롭게 하자고 하면 진리가 손상이 됩니다. 진리대로 하자고 하면 인애가 손상이 됩니다. 정의롭게 하자고 하면 화평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입을 맞춘다고 합니다.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들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담아 두었지만 그러나 아직 그림자로 보는 것입니다. 욥이 이렇게 엄청난 고난을 당하면서 육체 밖에서 주님을 뵙기를 원한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로 이해할 수 없는 그 세계를 알고 싶어서 중재자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욥의 인내이며 믿음입니다.

 

본문 5~7절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말하지만 욥도 이들보다 못지않은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와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을 알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의 영들이 물 밑에서 떤다고 합니다. 물 밑이란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의 가장 낮고 깊은 곳을 말합니다. 이런 곳을 스올 이라고 합니다. 멸망도 가림이 없다는 말은 그 스올을 지키는 무저갱의 사자도 하나님 앞에서 가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늘을 만드신 것을 말합니다. 북쪽을 허공에 펴시고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신다고 합니다. 욥이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는 깊고 깊은 바다와 그 바다 아래 스올만이 아니라 높고 높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다스림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8~13절입니다. 물을 빽빽한 구름으로 싸신다는 것은 창조 때 윗물과 아랫물을 나누신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 무거운 물을 구름으로 싸시는데 그 구름이 찢어지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말합니다. 또한 보름달을 가리시고 자기의 구름을 그 위에 펴신다고 합니다. 보름달의 히브리어 모음을 조금 바꾸면 보좌라도 번역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좌를 구름이 가린다고 봐도 됩니다.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정하시며 그가 꾸짖으시면 하늘 기둥이 흔들리며 놀란다고 합니다.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깨뜨리신다고 합니다. 라합은 바다의 괴물을 말합니다. 혼돈과 교만한 세력으로 말하는 바다와 그 바다의 괴물들도 하나님 앞에 숨길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 손으로 날렵한 뱀을 무찌르십니다.

 

14절입니다.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라고 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의 창조와 그의 만드신 세계에 부여하신 질서를 말하면서 인간의 영적인 질서도 이와 다름이 없이 일정하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러한 창조의 질서가 너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깊고 더 높다는 말을 하면서 이러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그 지혜를 다 안다고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의 단편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창조의 세계에 대하여 우리가 듣는 것도 아주 작게 속삭이는 소리정도로 듣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겠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능히 헤아리랴오늘 설교제목이기도 합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누가 능히 헤아릴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지금 과학이 발달하고 우주를 이야기하지만 아직도 인간이 발견한 우주는 전체 우주의 2퍼센트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학이 더 발전하여 이 광대한 우주를 인간들이 다 파악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아주 단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은 욥의 친구들이나 욥이나 같은 고백입니다. 피조물 주제에 어떻게 창조주를 알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차이점은 욥의 친구들은 지금 아는 그들의 전통과 지식과 경험과 신적체험이라는 것들의 체계를 굳게 붙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그런 체계가 고난을 통하여 흔들리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굳어진 그 체계, 인과율과 인과응보를 너머서 다른 체계를 잠시 잠간 섬광처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너무 잘 안다는 사람들을 만나면 의심스럽습니다. 욥은 창조의 하나님과 그 뜻을 누가 능히 헤아리겠느냐고 합니다. 창조와 그 질서에 대하여 욥기는 엄청난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 지혜로도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아주 한 단편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답답하고 모를 때는 거저 탄식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를 답답하면 답답한 대로 기다리세요! 이렇게 결론을 내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저녁 교사 강습회 강의를 들으면서 우리가 인간 관계 속에서도 얼마나 단편적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있는지 말씀을 드리면서 결론으로 가려고 합니다.

 

권종희 교수라는 사람인데 기독교 상담학을 전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상대방을 모르는지를 뇌 과학을 통하여 설명한 강의입니다. 우리가 일초동안 외부의 사건을 받아들이는 양이 200만 비트라고 합니다. 비트란 컴퓨터의 데이트를 나타내는 최소단위입니다. 이러한 외부의 정보를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라는 오감을 통하여 일초에 200만 비트를 받아들이지만 이것을 뇌에서 정보처리 하여 받아 들여 인식하고 행동으로 나오는 것은 겨우 134비트라고 합니다. 별로 감이 오지 않는 단위들입니다만 예를 들면 월급을 200만원 받아서 집에 가서 헤아려 보이 134원 남은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는가 하면 뇌에 들어온 정보가 필터를 통하여 재처리가 됩니다. 생략, 왜곡, 일반화, 시간, 공간, 물질, 에너지, 언어, 기억, 결정, 메타프로그램, 가치와 신념, 태도 등에 의하여 재처리가 되면서 내적 표상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적 표상도 그 상태와 생리적 반응 등에 의하여 행동으로 나타내는 정보의 양은 겨우 134비트인데 이것을 분수로 나누어 보면 0.000067이랍니다. 이것은 거의 없다고 해야 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나는 한 개도 모릅니다. 결국 우리가 상대방을 알고 이해 한다는 것은 자기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은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도대체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헤아릴 수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시편 1397~18절입니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7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8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오늘 본문 욥기 26장의 말씀을 반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과 온 세상을 살피시는데 그에게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 어떻게 그의 눈길과 손길을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의 모든 언행심사를 다 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말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나의 앉고 일어섬과 눕는 것과 마음의 생각을 다 아시는 주님을 믿습니까?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스올에 내려갈지라도, 바다 끝에 갈지라도 전부 다 하나님 앞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음을 받기 전에도 지어질 때에도 이미 주께서 다 보시고 아시고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기록이 다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계시된 이런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면 지금 우리의 삶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 함께 찬송한 내가 행하는 먼 길을 다 간 후라는 찬송의 2절 가사가 이렇습니다. “당한 그 고생을 생각해 볼 때 주 예정함 알리라 그때 주 예수 큰 사랑 깨닫고 나 주 찬송하리라 가는 길 내가 다 지나간 후에 천국 내 앞에 보이네 가는 길 내가 다 지나 간 후에 주 예수를 보리라성도가 가는 고난의 길을 생각해 볼 때에 주님의 예정함을 알리라고 한 찬송입니다. 욥이든 성도이든 이 세상에서 당하는 그 고생과 고난들을 통하여 주님의 예정함을 안다면 그것이 시편의 찬송이 이해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사야 40:12~17절입니다. “12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13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4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16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17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누가 하나님을 헤아릴 수가 있습니까!

 

18~26절입니다. “18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 19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20 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 21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22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 같이 치셨고 23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24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 25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하나님을 사람들이 헤아리지 못하니 우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하심은 빠짐이 없습니다.

 

27~31절입니다. “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욥의 고민들이 시편과 이사야서를 함께 보니 해결이 됩니다. 27절에 야곱 대신에 욥을 넣으시고 오늘 우리의 이름을 넣으셔도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이런가 하는 의문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욥 같은 의인도 그런 의문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런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을 것을 믿고 기다린 것입니다. 결국 욥기 38장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욥이 당한 고난의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시편 139편이나 이사야 40편의 내용과 비슷한 말씀들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러한 하나님의 현현 앞에 입을 가리고 회개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하였는데 정작 하나님 앞에서 아무 말로 못하고 회개하는 모습이 됩니다. 이런 모습이 하나님을 만난 자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십자가와 복음도 이야기합니다. 잠시도 쉴 날이 없을 만큼 수도 없는 말과 말들이 난무합니다. 그 일에 저도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도 상담이 옵니다. 오늘 미국에서 어떤 사람이 전화가 왔습니다. 고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듣고 책도 다 사서 보고 있는데 한국에서 온 어떤 교수가 다르게 말해서 저에게까지 확인을 하려도 전화를 한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어떻다고 말할 때에 그런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마시고 설교든 책이든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지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성경으로 설교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을 따르게 하거나, 그 사람이 속한 단체에 가두어 두려고 하거나,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라면 다른 복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복음을 얼마나 이해를 합니까? 얼마나 믿습니까? 아까 상담하는 분의 예를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하나도 모르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종종 말씀드리는 대로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도 우리의 취향이 같아서 모인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면 왜 수 많은 복음을 전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갈라짐이 이렇게 많을까요? 지난주에 약 10년 전에 잠시 교제하던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동안의 소식을 전하면서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저도 동의했습니다. 우리가 도대체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알고 전한다고 하는지? 어떻게 헤아려 알 수 가 있겠습니까?

 

로마서 11:33~36절입니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욥의 헤아릴 수 없는 그 하나님의 뜻이 시편과 이사야서를 지나서 바울에게서 결론이 납니다. 그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불순종 아래 가두어 두셨다가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그 긍휼의 자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과 그의 판단은 사람이 감히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주의 마음을 알며 누가 그의 모사가 되겠습니까? 누가 먼저 주께 무엇을 드려서 갚으심을 받을 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을 만난 자들의 공통된 고백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욥처럼 입을 가리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물고기가 많이 잡힌 기적 앞에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를 고백합니다. 바울사도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이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와서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 헤아려지면 우리도 욥, 이사야, 베드로, 바울과 같은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이 은혜를 구하는 기도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