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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7:1~23 낯선 하나님 2016. 7. 6

 

1 욥이 또 풍자하여 이르되 2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3 (나의 호흡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숨결이 아직도 내 코에 있느니라) 4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5 나는 결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6 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

 

지난주에 본 욥기 26장은 빌닷의 말에 대한 욥의 답변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발의 공격이 없습니다. 이제 욥의 세 친구들은 더 이상 욥에게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굳건한 체계도 욥의 인내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입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지만 그들의 마음은 앞에서도 보았습니다만 나 같으면 빨리 회개하고 하나님께 다시 복을 받을 것인데 저 교만한 욥은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인간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아무리 말해도 안 되는 욥을 보고서 진주를 돼지에게 던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기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동안 욥을 공격한 말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욥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하는 말을 들어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욥이 풍자(諷刺)하여 말한다고 합니다. 전에 번역은 비사(譬詞)라고 하였습니다. 새 번역은 비유(譬喩)로 말합니다.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한다고 합니다. 맹세란 최종적인 표현입니다. 욥이 세 친구들에게 최종적으로 확정적인 말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이 맹세하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자신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이시며, 자신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라고 고백합니다. 참으로 낯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표현들이 성경에서도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여호와 이레(22:14), 아도나이(15:2~8), 여호와 라파(15:26), 여호와 니시(17:15),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31:13), 에벤에셀(삼상7:12), 여호와 샬롬(6:24), 여호와 로이(23:1), 여호와 삼마(48:35) 이런 내용들은 그 말만 들어도 알만한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시고, 주님이 되시고, 치료하시고, 승리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도움을 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목자가 되시고,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이런 이름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욥이 맹세로 고백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시고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고 싶습니까? 이런 하나님을 믿고자 찾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떻게 자신의 정당함을 물리치는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나의 정성과 열심과 헌신을 물리치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신을 괴롭히는 일에 전능하신 그런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욥도 고난당하기 전에는 이런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까닭 없는 고난을 당하면서 이런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가 어떠한지 좀 더 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욥이 아는 이런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고 욥의 친구들이 아는 여호와 하나님을 안다면 아직 복음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시는 하나님을 모르면 우리의 구속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자들이 됩니다. 욥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이었지만 그러나 완전한 의인은 아닙니다. 완전한 의인의 그림자 역할을 한 욥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4:15), 죄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을 죄로 삼으셨기에(고후5:21) 하나님께 물리침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느냐는(22:1, 27:36) 그 정당한 절규를 하나님께서 물리치심으로 죄인들의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에 참여되는 자들은 하나님의 괴롭힘을 받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괴롭힘을 받는 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항상 나를 중심으로 평안과 만족을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시면 결코 하나님을 찾을 인간이 아니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성실하게 괴롭히셔야 합니다.

 

시편 119:75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 이다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입니다. 성실(誠實)이라는 단어의 한문을 파자하면 말을 이루어 열매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자기 백성들에게 열매가 맺히도록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성실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하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를 원합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성실하게 괴롭히셔야 우리가 주님의 뜻을 알아먹는 그런 미련한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우리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하나님을 의지할 자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평소에 구하는 것은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여야 하는 피조물의 자리가 아니라 영원토록 자존자로 살고 싶어 하는 것들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괄호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괄호로 되어 있는 부분은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기에 이렇게 표시를 해 둡니다. 이 내용은 나의 호흡이 아직 완전히 있다는 것은 아직 분명한 정신을 차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인 루아흐가 아직도 내 코에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다른 번역으로 봅니다. “내게 호흡이 남아 있는 동안은, 하나님이 내 코에 불어 넣으신 숨결이 내 코에 남아 있는 한,” 자신의 정당함을 물리치시고 자신을 괴롭히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데 이런 맹세를 자신의 생명을 다해 한 맹세라는 것입니다.

 

본문 4~6절입니다. 3절과 연결하여 보면 내 숨이 남아있는 한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않고 내 혀가 거짓을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자신의 세 친구들에게 한 말을 결코 취소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한 말을 결코 옳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죽기 전에는 자신의 온전함을 버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죽기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겠다고 합니다. 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럴지라도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않는다고 합니다. 욥의 친구들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다 달려들어 욥을 정죄할지라도 나는 나를 정죄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참으로 저주 받은 욥입니다. 그러나 욥 자신은 죽을지언정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맹세로 말합니다. 이것을 인내하는 자의 복이라고 야고보서에서 말씀합니다(5:11).

 

고린도전서 4:1~5절입니다.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하면서 당한 고난들은 보면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니라고 하는 자들이 나온 것입니다. 바울이 무언가 잘못해서 고난을 받는다고 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우리를 마땅히 그리스도의 일꾼이며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라고 합니다. 맡은 자는 그저 충성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주님께 충성을 하고 있기에 고린도 교인들이나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확신이며 자유입니까!

 

심지어 4절에서는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합니다. 욥과 같은 말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아무리 욥을 공격하여도 나는 나를 책망할 것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욥을 공격한 친구들의 논리나 바울을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니라고 하는 자들의 논리가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므로 욥이나 바울은 다른 사람들의 말로 자신을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오직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는 것은 주님과의 관계가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주님과의 사귐이 깊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고 해도 나는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결국은 주님께서 모든 것을 드러내십니다.

 

이어지는 6~8절을 봅니다.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바울과 아볼로가 그들의 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받았다는 자들이 서로 대적하고 교만한 마음을 가지며 왕 노릇 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책망합니다.

 

이어지는 9~13절입니다.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의로운 욥이나 하나님의 사도인 바울을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다루어 가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것은 곧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만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이나 바울이 고난당함을 통하여 성도의 모습과 그리스도의 모습을 함께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과 죄 없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증언을 봅니다.

 

고린도후서 1:5~10절입니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욥과 바울의 고난에 대한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되는 자들이 성도이며 이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난을 넘치게 받듯이 위로를 넘치게 받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면서 당하는 환난입니다. 얼마나 심한 고난을 당하였는지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욥의 인내와 바울의 인내가 고난 중에 동일함을 보게 됩니다. 욥이 맹세한 그 하나님, 자신의 정당함을 들어주시지 않으시고, 괴롭히시는 하나님에 대한 답이 이 말씀들에 나오는 것입니다. 욥이나 바울과 같은 자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한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기 위한 자들로서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증인이며 동시에 성도가 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7~10절입니다. “7 나의 원수는 악인 같이 되고 일어나 나를 치는 자는 불의한 자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8 불경건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거두실 때에는 무슨 희망이 있으랴 9 환난이 그에게 닥칠 때에 하나님이 어찌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10 그가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항상 하나님께 부르짖겠느냐욥이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말한 것처럼 보이지만 욥의 친구들과 욥의 말의 차이는 고난을 당한 유무에 있습니다. 욥의 고난이 욥의 친구들이 보는 것처럼 인과응보적인 고난이 아님을 그들이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욥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원수가 되고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11~23절입니다. “11 하나님의 솜씨를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요 전능자에게 있는 것을 내가 숨기지 아니하리라 12 너희가 다 이것을 보았거늘 어찌하여 그토록 무익한 사람이 되었는고 13 악인이 하나님께 얻을 분깃, 포악자가 전능자에게서 받을 산업은 이것이라 14 그의 자손은 번성하여도 칼을 위함이요 그의 후손은 음식물로 배부르지 못할 것이며 15 그 남은 자들은 죽음의 병이 돌 때에 묻히리니 그들의 과부들이 울지 못할 것이며 16 그가 비록 은을 티끌 같이 쌓고 의복을 진흙 같이 준비할지라도 17 그가 준비한 것을 의인이 입을 것이요 그의 은은 죄 없는 자가 차지할 것이며 18 그가 지은 집은 좀의 집 같고 파수꾼의 초막 같을 것이며 19 부자로 누우려니와 다시는 그렇지 못할 것이요 눈을 뜬즉 아무것도 없으리라 20 두려움이 물 같이 그에게 닥칠 것이요 폭풍이 밤에 그를 앗아갈 것이며 21 동풍이 그를 들어 올리리니 그는 사라질 것이며 그의 처소에서 그를 몰아내리라 22 하나님은 그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던져 버릴 것이니 그의 손에서 도망치려고 힘쓰리라 23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며 손뼉치고 그의 처소에서 그를 비웃으리라

 

자신의 정당함조차 물리치시는 하나님, 자기 백성들을 성실하게 괴롭히시는 하나님을 모르는 욥의 친구들이 마지막에 받을 심판이 이러함을 욥이 말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인과율적인 하나님밖에 모릅니다. 사탄의 참소와 같은 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에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틀이 무너지는 것이 욥기서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당하는 고난은 의인의 고난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어떠함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는 내용을 바울사도와 연결하여 보았습니다. 성도는 고난이 아니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당함이 물리침을 받은 십자가, 아무리 부르짖어도 외면하신 그 십자가를 등 따시고 배부른 자들이 쳐다나 보겠습니까? 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로 땅 끝까지 증거 하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3~12절입니다. “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감사하는 내용은 그들의 믿음의 더욱 자라고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교회에 박해와 환난이 많습니까?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풍성하면 박해와 환난이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하나님을 이런 식의 하나님이었습니다. 환난과 어려움이 많은 것은 잘 못 믿어서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한 말과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욥과 바울과 달리 세상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서 성실하게 괴롭히심으로 환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욥과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도 믿음과 인내가 나타납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도 없고 세상이 알 수도 없는 낯선 믿음의 내용입니다.

 

이어지는 5~9절입니다.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욥이나 바울이 전한 하나님을 믿는 자들, 곧 복음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가 되며 동시에 이렇게 환난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이란 세상에서 뽑혀 나와서 영원한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런 성도에게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환난으로 갚으시고 복음으로 인하여 환난을 받는 자들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가 됩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릴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오늘 욥이 맹세로 고백한 그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며 바울이 당한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믿는다고 하는 하나님입니다. 이들의 말은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그 내용이 성경의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욥이 맹세로 고백한 이 하나님이 너무나 낯선 하나님일 뿐입니다. 오히려 욥의 친구들이 말한 그 하나님이 그들에게 익숙한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믿는다는 것은 욥의 친구들이 말한 그 친숙한 하나님과 결별하고 자신의 정당함을 물리치시고 자기 백성을 괴롭히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선진들이 믿었던 그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곧 복음을 복종하지 않는 것이기에 이들이 형벌을 받습니다. 그 형벌이란 주의 얼굴과 그의 힘과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이나 오늘 우리나 간에 소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통하여 욥의 친구들을 위하여 속죄하라고 합니다. 고난당한 욥이 제사장이 되어 욥의 친구들을 위하여 속죄하는 것입니다(42:7~9).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복음을 듣고 이렇게 낯선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복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에 저주 받아 죽으신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10~12절입니다. “10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욥이 만난 하나님, 바울이 만난 하나님, 그 낯선 십자가의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참으로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 일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그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자들은 반드시 환난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풍랑 인하여서 더 빨리 간다는 찬송 가사처럼 성도는 순풍이 불든지 풍랑이 일든지 생명이신 주께로 가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에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욥의 하나님, 바울의 하나님, 곧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그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알고 믿는 것이 영생임을 아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