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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9:1~25 그 때가 다시 오기를 2016. 7. 20

 

1 욥이 풍자하여 이르되 2 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 3 그 때에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치었고 내가 그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어다녔느니라 4 내가 원기 왕성하던 날과 같이 지내기를 원하노라 그 때에는 하나님이 내 장막에 기름을 발라 주셨도다

 

욥기 29장부터 31장은 욥의 독백처럼 들립니다. 그동안 욥의 세 친구들과의 논쟁은 끝이 났습니다. 그 논쟁을 통하여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과 같음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욥이 옳다는 전제를 두고 보기에 욥의 말에 동조를 하지만 욥의 친구들의 입장에서 보면 욥은 더 이상 상종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의 논쟁은 없습니다. 이제 욥이 혼자서 말합니다. 29장은 욥이 고난 받기 전의 그 때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죽음과 같은 고통임을 30장이 말합니다. 31장은 그러함에도 자신에게는 불의가 없다고 말합니다.

 

1~4절을 보시면 지난 세월이 다시 오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지난 세월이란 까닭모를 고난을 당하기 전의 세월입니다. 그 때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에 등불이 자신의 머리에 비치었고 그 빛을 힘입어 암흑에도 걸어 다녔다고 합니다. 그렇게 원기 왕성하던 날이 다시 오기를 갈망합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장막에 기름을 발라 주었다고 합니다.

 

5~6절입니다. “5 그 때에는 전능자가 아직도 나와 함께 계셨으며 나의 젊은이들이 나를 둘러 있었으며 6 젖으로 내 발자취를 씻으며 바위가 나를 위하여 기름 시내를 쏟아냈으며그 때에는 전능자가 아직도 나와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나의 젊은이들이 나를 둘러 있었다는 것은 다른 번역에서 자식들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젖으로 발자취를 씻으며 바위가 나를 위하여 기름을 시내처럼 흘렸다고 합니다. 바위가 기름을 흘렸다는 것은 바위들이 많은 밭의 올리브나무조차 기름이 많이 생산이 된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표현으로 젖과 기름은 풍요를 상징합니다. 농사가 잘 되는 것도 기름진 것으로 말합니다. 사람을 구별하여 세우실 때도 기름을 붓습니다. 욥은 고난을 당하기 전에 자신이 잘 살게 된 것이 자신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기름을 발라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잘나서 형통하게 살았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셔도 할 말이 없는데 그동안 욥의 말을 보면 그런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재앙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더욱더 고난당하기 전의 그때가 다시 오기를 갈망합니다.

 

7~11절입니다. 7 그 때에는 내가 나가서 성문에 이르기도 하며 내 자리를 거리에 마련하기도 하였느니라 8 나를 보고 젊은이들은 숨으며 노인들은 일어나서 서며 9 유지들은 말을 삼가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10 지도자들은 말소리를 낮추었으니 그들의 혀가 입천장에 붙었느니라 11 귀가 들은즉 나를 축복하고 눈이 본즉 나를 증언하였나니

 

욥이 얼마나 존경받은 사람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문이란 성문광장에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도 하고 재판도 하는 그런 장소입니다. 그런 곳에 욥의 자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광장에 욥이 나가면 젊은이들이 숨는다는 말은 젊은이들이 뒤로 비켜선다는 말입니다. 노인들이 일어납니다. 노인 앞에서 일어서는 것이 구약의 예의입니다. 그런데 노인들이 욥 앞에서 일어섭니다. 유지들과 지도자라고 하는 자들조차 말을 삼가고 혀가 입천장에 붙은 것처럼 말소리를 낮출 정도로 욥이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존경을 하게 된 이유는 욥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욥이 한 일을 칭찬하고 욥을 직접 본 사람들은 욥이 한 일을 자랑하고 다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2~17절입니다. 12 이는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내가 건졌음이라 13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였느니라 14 내가 의를 옷으로 삼아 입었으며 나의 정의는 겉옷과 모자 같았느니라 15 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 16 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17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

 

사람들이 욥을 존경하는 이유가 계속 나옵니다. 구약에서 대표적인 약자로 언급되는 고아 과부 나그네를 잘 돌본 사람이 욥입니다. 부르짖는 빈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 망하게 된 과부들도 욥으로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다고 합니다. 의를 옷으로 삼아 입고 정의를 겉옷과 모자 같이 썼다고 합니다. 자신이 정의롭게 살 뿐만 아니라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는 저는 사람의 발도 되어 주고, 빈궁한 자의 아버지가 되며, 모르는 사람의 송사도 돌보아 주고,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 내었다고 합니다. 자타가 인정하고 하나님도 인정하는 욥입니다.

 

18~29절입니다. 18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숨을 거두며 나의 날은 모래알 같이 많으리라 하였느니라 19 내 뿌리는 물로 뻗어나가고 이슬이 내 가지에서 밤을 지내고 갈 것이며 20 내 영광은 내게 새로워지고 내 손에서 내 화살이 끊이지 않았노라욥은 이런 말을 충분히 할 수가 있는 의인입니다. 자신의 평안히 살다가 자기 보금자리에서 숨을 거둘 것이며 자신의 이런 존귀와 영광의 날들은 모래알 같이 많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듯이 욥도 그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 영광이 새로워지고 그 기력이 쇠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시편 11~3을 봅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욥은 시편 1편의 의로운 자가 받는 복을 받은 모습입니다. 욥의 언행 속에 불의라는 것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1편의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복을 받습니다.

 

본문 21~25절입니다. 21 무리는 내 말을 듣고 희망을 걸었으며 내가 가르칠 때에 잠잠하였노라 22 내가 말한 후에는 그들이 말을 거듭하지 못하였나니 나의 말이 그들에게 스며들었음이라 23 그들은 비를 기다리듯 나를 기다렸으며 봄비를 맞이하듯 입을 벌렸느니라 24 그들이 의지 없을 때에 내가 미소하면 그들이 나의 얼굴빛을 무색하게 아니하였느니라 25 내가 그들의 길을 택하여 주고 으뜸 되는 자리에 앉았나니 왕이 군대 중에 있는 것과도 같았고 애곡하는 자를 위로하는 사람과도 같았느니라

 

이 정도라면 사람의 경지를 넘어선 모습입니다. 욥의 말을 듣고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욥의 가르침 앞에 잠잠하고 욥이 말을 하고나면 그러나, 그런데, 그렇지만 이라는 말도 붙이지 못할 만큼 그들에게 스며들어갔습니다. 그들이 비를 기다리듯이 욥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의 의지 없을 때에 욥의 미소가 그들의 확신이 되며 새로운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욥은 백성들을 정말 잘 돌보아주는 공의롭고 인자한 왕과 같은 모습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이 백성들을 축복하는 그 축복을 베푸는 자와 같습니다.

 

민수기 6:23~26절입니다. 23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욥은 제사장이 축복하는 이런 복을 받는 자의 입장이기 보다 오히려 축복을 하는 하나님의 입장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욥의 미소로 인하여 사람들이 위로로 소망의 확신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시편 1편의 그 복을 받아 합당하고 제사장의 축복을 받아 합당할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얼굴빛을 사람에게 비추어 주듯이 약한 자들에게 그 미소를 보내는 사람입니다.

 

욥이 전에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까닭모를 재앙이 닥친 것입니다. 재앙이 결과로 지금의 현실은 악인이 당하는 현실입니다. 어느 누가 봐도 욥의 이런 재앙은 악인의 결말로 보입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은 끊임없이 욥에게 너의 죄로 인하여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욥은 정말로 미칠 지경입니다. 자신은 이런 재앙을 받을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보아왔고 오늘 말씀을 봐도 욥이 이런 재앙을 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재앙을 당하고 있는 입장은 악인의 결말로 보입니다.

 

시편 14~6절입니다.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욥의 시대에 이런 시편과 민수기의 축복을 모르는 시대이지만 그러나 욥의 모습을 보면 의인의 복을 받은 자로 보이는데 갑자기 재앙을 당함으로 악인의 받는 그 자리에 욥이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가 봐도 욥은 지금 악인의 결말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지금 극심한 재앙과 고난 속에서 이 고난당하기 전의 그 때가 다시 오기를 갈망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욥이 성도의 모습과 그리스도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은 시편 1편의 의인의 모습과 동시에 얼굴빛을 비추어 주는 하나님의 모습을 욥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셨으나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고난을 받지 않으셔야 합니다. 죄의 결과로 인한 고난을 받으실 이유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죄 없이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길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겨주신 자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고난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욥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성도의 모습도 볼 수가 있습니다. 성도의 모습이란 욥도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후손이란 이미 죄의 권세아래 장악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생명나무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욥과 같이 완벽하게 의로운 자라고 하여도 그의 의로움으로는 복을 받거나 생명을 얻어낼 자격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욥처럼 의로운 자가 재앙을 받아 멸망하여도 마땅하다고 인정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욥도 이미 아담 안에서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욥의 그 어떠한 의로움으로도 까닭모를 이 재앙에서 스스로 벗어날 능력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욥이 나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따지지도 못하고 입을 닫고 회개합니다.

 

오늘 본문을 겉으로만 보면 욥이 고난 받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욥만이 아니라 모든 인생들이 다 자기들 나름대로의 파라다이스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생은 늙어갑니다. 힘이 약하여집니다. 그러면 무엇만 남겠습니까? 과거만 회상하게 됩니다. 최인호라는 소설가가 서울 종로의 공원에 노인들이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았답니다. 무엇을 그렇게 재미있게 이야기하는지 들어보니 각자가 자기들의 과거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자신들이 젊어서 어떻게 돈을 번 이야기라든지 성공한 이야기들을 하는데 때로 자기 아들 자랑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공감하며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자기 자랑을 하고 있더랍니다. 이것을 보고 소설가는 두려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 두려움이란 소통이 아니라 일방적인 자기 자랑이라는 배설물만 쏟아놓는 자리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이리 저리 대화상대를 찾아서 사람들을 만납니다. 대낮에도 카페라는 곳에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하는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무슨 이야기들입니까? 소설가 최인호씨가 본 그런 노인들의 자기 과거자랑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배설하는 자리는 아닙니까? 만나자고 한 사람이 밥을 사고 차를 샀으니 말을 들어는 주지만 얼마나 의미 없이 주고받는 대화들입니까? 그런데도 왜 그런 만남과 교제를 하려고 합니까? 지금 외롭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외롭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옛날 한 때나마 좀 나았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되는 근원적인 이유는 사람들이 낙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자신이 원하는 파라다이스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러면 이러한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욥의 이야기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욥기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입니다. 성경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타락과 세상의 죄가 어떠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에덴동산에 들어갈 수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되어 있습니다. 욥처럼 의로워도 욥의 의로는 생명나무로 갈 수가 없습니다. 오직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서 찾아오시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생명이 죄인에게 찾아오실 때에는 그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유일하게 의로우신 분이 저주 받아 죽으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 앞에서는 욥처럼 의로운 자도 입을 닫고 회개하여야 하는 자리입니다. 신약에서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한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은 다 잡아 죽이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달려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자신이 죄인중의 괴수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고 증거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오늘 본문에서 갈망한 내용이 단순히 자신이 고난 받기 이전의 그런 행복한 시절로 돌아가기를 갈망한 것으로 보면 안 됩니다. 물론 자신이 까닭모를 재앙과 고난을 당하면서 그런 고난 이전의 삶을 회상하면서 돌아가기를 갈망하는 것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만 그것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방금 말씀드린 대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되는 자들이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되는 자들은 과거의 자신의 좀 나은 형편에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나간 것은 잊어버리고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7~14절입니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욥이 자신의 의를 주장하지만 그 의를 주장하는 것조차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게 됩니다. 이처럼 바울도 자신의 율법적인 의로움을 이제는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다고 합니다. 욥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는 그 과정이 필요한 것이기에 까닭모른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원이나 천국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런 자들은 내가 주님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붙잡은 것입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상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좇아간다고 하는 그 상은 우리를 십자가로 붙잡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힌 자들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과거를 회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거에 잘난 것도 못 난 것도 지나간 것입니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그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순간까지 내가 붙잡았다고 하는 것들을 놓아버려야 합니다. 그것을 붙들고 있으면 살아계신 주님을 붙들지 못합니다.

 

믿음이란 관계성입니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죽은 관계인지 살아있는 관계인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거만 추억하고 있다면 그 것은 이미 끝난 사랑입니다. 노인들이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다른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현재형이라면 과거를 말할 시간보다 지금 그분과 나와의 사귐 외에 다른 것에 마음 둘 시간이 없습니다. 바울은 그 사랑에 붙들린 것입니다. 이러한 사귐이 바로 욥이 갈망한 그 때입니다. 욥이 단지 고난이 없는 그 옛날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기다린 것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성도들은 다 그 때를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그 때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빌립보서 3:7~21절입니다. 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욥이 갈망하고 바울이 갈망하는 그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욥과 바울이 함께 가지고 있는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자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땅의 일만을 생각하는 자들이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자들은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그러면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

 

부활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는 성도가 이 땅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더욱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 이유는 아직 몸의 구속이 남았기 때문입니다(8:23). 욥의 고난이나 바울의 고난과 같은 고난을 우리가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자들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도가 가는 길을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의 길을 다간 후에, 고 고난의 길을 다 간 후에 영광의 주님을 뵙게 됩니다. 그 날에 이 낮은 몸, 죄의 몸, 약한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 날마다 탄식할지라도 그날까지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