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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2:1~33:33 엘리후의 고난 해석 2016. 8. 10

 

1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 2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3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 4 엘리후는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5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화를 내니라

 

욥기 설교를 준비하면서 엘리후를 어떻게 보느냐가 가장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엘리후를 욥을 공격한 세 친구의 입장에서 보느냐 아니면 38장부터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느냐는 것으로 엘리후의 말이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들의 잘못과 욥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자로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말하는 지혜에 이르지 못함을 보고 화를 냅니다. 그런데 후자의 입장에서 보면 엘리후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세례요한과 같은 역할로도 보입니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 하는 것은 저도 선택해야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지난주에 질문하신 집사님의 시각으로 보면 엘리후는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으로 해석이 됩니다. 욥이 아무리 의롭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신의 의를 주장한 것이 책망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엘리후가 합니다. 그런데 엘리후가 욥의 세 친구들과 욥에게 화를 내는 것은 엘리후도 자기의 지혜와 자기의 의가 있기에 화를 낸다고 봐도 됩니다. 우리가 무슨 일에 화가 나는 것은 나의 판단과 기준이 옳다고 여기고 있기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후에 대하여 하나님의 평가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엘리후의 말을 인정하셨다는 것인지 아닌지 답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박영선 목사의 입장에서는 엘리후도 욥의 세 친구들 편에서 말합니다. 엘리후가 화를 낸 것은 기독교가 옳고 그럼의 문제가 분명히 있지만 그 옳고 그럼보다 더 무한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오래 참음에 대하여 부족하다고 엘리후를 본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도 엘리후를 욥의 세 친구와 같은 부류로 봅니다. 이 방향으로 봐도 얼마든지 엘리후의 말을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방향으로 보는 사람들이 제일 많습니다. 그런데 크리스토퍼 에쉬는 이들과 다르게 말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마치 엘리야와 세례요한처럼 봅니다. 우리는 어느 입장에 서야 하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면 설교를 무얼 그리 어렵게 하느냐고 할 것입니다. 빨리 빨리 답을 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옛날부터 이렇게 성질이 급하지 않았습니다. 선비들이나 장인들의 정신을 보면 서두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근대화가 시작되고 식민지가 되고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빨리하라는 말들이 우리의 골수에 박혀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쉽고 빠른 답을 원합니다. 저도 전도사시절에 제법 규모가 있는 교회들의 설교들을 들어보았습니다. 그 교회 목사가 유학 가서 제대로 된 박사학위를 받아 왔는데도 설교는 아주 단순하며 반복적이었습니다. 그러니 고민할 필요 없이 듣고 순종만 하면 되는 것으로 들렸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욥과 같은 고민이 아니라 돌격 앞으로만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독일성서 공회의 해설도 보겠습니다. “엘리후는 고난이 '형벌이 되는 고난' 곧 저지른 잘못에 대한 응답으로 쓰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육적인 고난' 곧 하나님이 자신의 경건한 자들을 경고하고 순화하려고 내리시는 고난일 수도 있다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 이것이 고난 및 질병의 의미라면 하나님의 의로우신 세상 통치를 의심할 근거가 없고 오히려 이로써 하나님의 선하심이 입증되는데, 하나님은 사람이 더 나쁜 일을 겪지 않도록 지켜주시려 하기 때문이다. 세 친구들이 주장한 죄와 벌의 엄격한 상응 관계가 여기서는 통하지 않지만, 엘리후는 하나님의 행위가 지니는 의미를 다시 사람의 관점에서 확정하려고 했다. 이리하여 욥의 넷째 친구도 자기의 지혜로는 욥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 뵈었을 때 받았던 계시에는 이르지 못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방점을 찍자면 엘리후도 욥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뵈었을 때에 받았던 계시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욥의 친구들도 함께 있었지만 욥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오늘본문의 해석입니다. 엘리후도 지혜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지금까지 이루어진 대화의 진행이 불만스럽다고 느끼고서는 좀 더 깊은 깨달음이 자기에게 있기에 새로운 관점에서 논쟁의 주제를 밝히는데 자기가 이바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네 번에 걸쳐 말하면서 엘리후는 엄격한 전통 보상론을 넘어서는 것으로 지금까지 논의 되지 않았던 고난 이해의 몇 가지 가능성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한다. 이로써 엘리후가 해답을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견해를 보여주는데 이바지 한다.

 

엘리후가 특히 밝혀내려고 했던 바는 하나님이 고난으로써 인간에게 유익한 의도를 이루신다는 점인데, 곧 하나님이 보상의 틀에 사로잡혀 재판하시는 분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고난은 사람에게 불의를 그만두라는 경고일 수 있고 또 선한 일로 다시 향하게 하는 계기일 수 있다. 이처럼 고난은 하나님의 교육적인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첫 번째 말). 다음으로 고난은 하나님이 자신의 교육 목표에 이르실 때 까지 오래 계속해서 사람을 시험하는 것일 수 있다(두 번째 말). 하나님은 그의 숭고하심 가운데서 스스로 목적을 정하시기 때문에, 사람은 참으면서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고(세 번째 말), 겸손히 굴복하여 숭고하신 하나님께 경배 및 찬양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네 번째 말). 이런 내용들을 인용하는 이유는 이런 내용들이 욥기를 보는 일에 더욱 풍성해 지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인용합니다.

 

오늘 본문 32:1~5절입니다. “봉독 우리가 함께 읽은 내용입니다. 엘리후는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이었기에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욥의 세 친구들의 말도 그치고 욥의 말도 그치는 것을 보고서 엘리후가 화를 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이 죄로 인하여 고난이 온 것이 아니라는 욥의 말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말이 그친 것입니다. 그리고 욥도 최후진술을 통하여 자신이 죄인이라서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최후진술을 합니다. 이 부분은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엘리후는 욥에게 화내는 이유는 욥이 하나님보다 더 의롭다고 하는 일에 화를 내고 욥의 세 친구들에게는 욥의 이러한 말에 대하여 대답을 하지 못함에 대하여 화를 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엘리후를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욥의 세 친구의 입장과 같은 사람으로 보면 욥의 세 친구들보다 더 완벽하게 하나님을 변호하려고 하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동시에 아주 교만한 자로 보일 수 있습니다. 욥과 세 친구를 여지없이 공격을 하지만 욥도 세 친구도 더 이상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지자적인 입장으로 보면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는 선지자가 거침없이 회개를 선포하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런 부분을 칼로 무 베듯이 정확하게 분리하여 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의로움으로 인한 분노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분노도 나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선지자로서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자들을 진멸하고서도 세상이 전혀 바뀌지 않는 모습을 보고 절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만이 여호와 편에 섰다고 하면서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보고 죽기까지 분노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자신에게 화가 미치기에 아예 말을 하지 않으려고 작정도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불이 나서 하는 수 없이 전하게 됩니다. 이렇게 선지자들조차 하나님의 분노와 자신의 의분들이 뒤섞여 있는 모습을 봅니다. 욥이 까닭 없는 고난 중에 자신의 생일을 저주까지 합니다. 하나님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따지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이러한 욥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수학공식과 같은 하나님 이해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후의 분노도 두 가지로 봐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선지자적인 분노입니다. 이미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교육적인 뜻이 있는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보다 자신이 의롭다고 하는 욥에 대한 책망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후가 말한 후에 하나님께서 엘리후의 말과 연결되는 말씀을 하시면서 욥에게 말씀하실 때에 욥은 입을 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너무 자신에 대하여 완벽한 신뢰를 하는 모습입니다. 마치 욥이 자신의 의를 주장하듯이 엘리후도 자신이 아는 하나님에 대하여 아주 확신 있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욥과 함께 하는 입장에서 말합니다. 자신을 더 높은 어떤 권위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은 자이기에 자신의 위엄으로는 욥을 누르지 못한다는 말도 합니다(33:6~7).

 

본문 6~10절입니다. “6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7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8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9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말하리라사람의 지혜는 연륜이 있다고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 하나님의 영 곧 전능자의 숨결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비슷한 말은 엘리바스도 말한 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말을 하나님의 이름과 그 권위로 말하기도 합니다. 특히 주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면서 성경에 없는 말을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본문 11~14절입니다. “11 보라 나는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노라 당신들의 슬기와 당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노라 12 내가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의 말에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13 당신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진상을 파악했으나 그를 추궁할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지니라 14 그가 내게 자기 이론을 제기하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이론으로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15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었더라

 

다른 번역으로 봅니다. “11 세 분이 말씀하시는 동안에, 나는 참으며 듣기만 하였습니다. 세 분이 지혜로운 말씀을 찾으시는 동안에, 나는 줄곧 기다렸습니다. 12 나는 세 분이 하시는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세 분께서는 어느 한 분도, 욥의 말을 반증하거나 그의 말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셨습니다. 13 그러고서도 어떻게 지혜를 발견했다고 주장하실 수 있으십니까? 세 분께서 이 일에 실패하셨으니, 내가 이제 욥 어른이 하나님의 대답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14 욥 어른이 나에게 직접 말을 걸어온 것이 아니므로, 나는 세 분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욥 어른께 대답하겠습니다. 15 욥 어른께서는 들으십시오. 세 분 친구가 놀라서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분들은 어른께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엘리후의 자신의 말이 하나님의 대답을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6~22절입니다. “16 당신들이 말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하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17 나는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18 내 속에는 말이 가득하니 내 영이 나를 압박함이니라 19 보라 내 배는 봉한 포도주통 같고 터지게 된 새 가죽 부대 같구나 20 내가 말을 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21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이가 속히 나를 데려가시리로다

 

엘리후가 그동안 할 말을 얼마나 참고 있었는지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내 속에 말이 가득하다고 하면서 내 영이 나를 압박한다고 합니다. 내 배는 봉한 포도주 통과 같고 포도주가 발효하여 터지게 된 새 가죽 부대와 같다고 합니다. 그러니 입만 열면 말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사람의 낯을 보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이가 속히 나를 데려가실 것이라고 합니다. 욥이 자신의 죄로 인하여 이런 고난이 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엘리후가 욥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엘리후가 욥의 세 친구들과 같은 편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선지자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로 지금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욥의 세 친구들도 엘리후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에 다 필요하기에 등장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이 죄를 지었기에 이러한 고난을 당한다고 확정을 하고서 공격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욥이 그렇지 않다고 버팀으로 할 말이 없게 되었을 때에 엘리후가 등장합니다.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들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엘리후가 등장하기 전 까지는 욥의 고난에 대한 해석을 인과율인가 아닌가에 초점이 있었다면 이제는 고난도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방법이라는 말을 엘리후가 합니다. 고난에 대한 해석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33:1~7절입니다. “1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내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 2 내가 입을 여니 내 혀가 입에서 말하는구나 3 내 마음의 정직함이 곧 내 말이며 내 입술이 아는 바가 진실을 말하느니라 4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5 그대가 할 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내 앞에 진술하라 6 나와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7 내 위엄으로는 그대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는 그대를 누르지 못하느니라엘리후는 자신을 욥과 같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함으로 욥과 동일한 입장에 자신을 두고 말합니다.

 

8~12절입니다. “8 그대는 실로 내가 듣는 데서 말하였고 나는 그대의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9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거늘 10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11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12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엘리후는 욥의 재앙이 죄로 인하여 왔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욥의 말을 가지고 욥을 책망합니다. 자신이 깨끗하며 악인이 아니고 순전하며 불의도 없는데 하나님이 나를 원수로 여겼다가는 이 말을 한 것을 책망합니다. 이런 말은 자신이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여기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욥의 세 친구들도 하였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엘리후도 욥의 세 친구들과 같은 입장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후의 말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차이는 낯선 고난의 유무입니다.

 

13~18절입니다. “13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14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 15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에 환상을 볼 때에 16 그가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로써 두렵게 하시니 17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18 그는 사람의 혼을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을 칼에 맞아 멸망하지 않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욥에게 일일이 대답하지 않으신다고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을 하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말씀하시지만 사람은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은 참으로 오늘날도 우리에게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습니까?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은 구약에서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에는 아들로 말씀하십니다(1:1~2). 하나님께서 여러 방법으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사람의 행실을 버리며 교만을 막고 사람의 혼을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을 칼에 맞아 멸망하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13~22절입니다. “19 혹은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20 그의 생명은 음식을 싫어하고 그의 마음은 별미를 싫어하며 21 그의 살은 파리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나서 22 그의 마음은 구덩이에, 그의 생명은 멸하는 자에게 가까워지느니라참으로 극심한 고통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게는 이런 말이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앞에서도 많이 본 내용입니다. 우리도 이런 말들을 잘 합니다만 엘리후는 욥의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23~28절입니다. “23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중보자로 함께 있어서 그의 정당함을 보일진대 24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25 그런즉 그의 살이 청년보다 부드러워지며 젊음을 회복하리라 26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말미암아 기뻐 외치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의 공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 27 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범죄 하여 옳은 것을 그르쳤으나 내게 무익하였구나 28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

 

중보자와 대속물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고난 중에 회개하는 것이 대속물이 되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범죄 하여 옳은 것을 그르쳤다는 말을 하는 자를 중보자를 보내어 구원한다는 엘리후의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엘리후도 욥의 고난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한 고난으로 해석을 하지만 욥의 고난의 본질을 아직 모르고 피상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엘리후도 욥의 친구들과의 관점은 다르지만 어떻게 피조물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다고 하느냐는 것이 잘못 된 것이라고 책망을 하는 것은 욥의 세 친구들의 입장과 같은 모습입니다.

 

29~33절입니다. “29 실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30 그들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이끌어 생명의 빛을 그들에게 비추려 하심이니라 31 욥이여 내 말을 귀담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 32 만일 할 말이 있거든 대답하라 내가 기쁜 마음으로 그대를 의롭다 하리니 그대는 말하라 33 만일 없으면 내 말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지혜로 그대를 가르치리라

 

엘리후는 고난조차 그들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이끌어 생명의 빛을 비추게 하려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이런 부분에서 엘리후는 분명히 욥의 친구들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난에 대한 해석을 신약까지 연장하여 봐야 합니다. 고난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의 교훈과 훈계로 보는 내용도 있지만 예수님의 고난과 성도들이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은 죄와 상관없이 고난의 길을 가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아들로 받아들이는 자들을 채찍질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과 그의 거룩함에 참여시키시기 위하여 고난을 주십니다. 엘리후는 이런 맥락에서 고난을 말한 것이라면 옳은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가 아님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고난이 있듯이 성도가 복음으로 인한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체제와 전혀 다른 복음의 체제가 있기에 이 복음으로 고난 받는 일이 반드시 있다는 말입니다.

 

디모데후서 1:8~12절입니다. “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은 본인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받는 낯선 고난입니다. 이러한 고난은 엘리후도 알지 못한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이 가장 크지만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의 고난의 신비와 그 크심을 말씀합니다. 그 십자가로 나타난 고난의 신비는 천사들도 몰랐던 내용입니다. 오직 성도들만 알 수 있는 고난의 신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