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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5:1~16 ()의 출처는? 2016. 8. 31

 

1 엘리후가 말을 이어 이르되 2 그대는 이것을 합당하게 여기느냐 그대는 그대의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이냐 3 그대는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범죄 하지 않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묻지마는 4 내가 그대와 및 그대와 함께 있는 그대의 친구들에게 대답하리라

 

오늘이 831일입니다. 이번 여름에는 무척이나 더웠습니다. 말복이 지나고 처서가 와도 더위는 물러갈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며칠 전부터 이불을 덮어야 잘 수가 있는 날씨가 왔습니다. 창원시장이 지역별 기후대책을 마련하여야 한다는 말을 하였지만 그러나 사람들이 무슨 수로 기후대책을 마련할 수가 있겠습니까? 기후를 우리가 조정할 수가 없습니다. 온갖 기후문제를 의논하고 해결하려고 하지만 인간탐심의 끝없음과 인간의 무능함만 드러납니다. 인간들끼리 아무리 의논해도 답은 없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끼리 알아보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느 집사님과 이 설교를 잠시 나누다가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의 일들을 사람들끼리 알아서 의논하고 해결하려고 하지만 결코 해결되지 않음을 세상을 보면 너무나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지구상의 인구들이 약 72억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구는 이 인구들이 다 같이 평화롭게 먹고 살아갈 자원이 충분합니다. 그런데도 하루에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통계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진리의 문제를 사람들끼리 알아보고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진리의 문제를 우리끼리 알아보고 연구하여 이것이 진리라고 밝혀낸다고 하여도 그것으로 상대방을 설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논리상 자신이 상대방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마지못해 인정을 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연구하여 그보다 더 완벽한 이론으로 그 이론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다만 그럴 환경과 능력이 되지 않아서 마지못하여 있는 것이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이론에 항복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인정하여도 마음으로는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어제 어떤 분이 홈페이지에 질문을 했습니다. 그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질문: 하나님()이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라면 인간은 피조 된 유한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격차라고 하는 것은 마치 인간과 강아지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라 할 수 있겠지요. 무슨 말인가 하면 한낱 인간이 과연 하나님()을 포착할 수 있으며 이해하거나 파악하여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이런 맥락에서 구약성경을 볼 때 구약의 하나님을 인간이 어떻게 포착하고 믿었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유한이 무한을 포착 하거나 소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으로 계시 하신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도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지 않으면 책에 기록된 문자일 뿐이죠!

 

재 질문: 하나님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주셔야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을 알 수 있다(1:17)는 것에 이견은 없습니다. 제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신의 속성에 대한 앎의 문제가 아니라 인지에 대한 부분입니다. 유한이 무한을 포착하거나 소유 할 수 없는데 1) 어떻게 모세(인간/유한)는 하나님(무한)을 인지하여 포착했을까? (인간이 만들어 낸 잡다한 신은 인간이 얼마든지 인지하고 조정하고 소유할 수 있지만) 2) 그리고 인간의 지각과 오감, 이성으로 포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알아듣고 문자로 정리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모세는 모세오경을 기록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재 답변: 계시 인식의 문제를 말씀하신 거군요! 좀 유치한 예를 들자면 사람이 개미에게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개미가 되어야겠지요! 베르베르의 개미라는 소설에는 개미의 페르몬을 연구하여 개미를 움직이는 내용도 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피조물이며 유한한 죄인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에게는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꺼지지 않는 모습으로 모세를 부르시고 모세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는 친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성막의 구조까지 다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구약의 계시 전달을 신약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3절입니다.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구약의 계시 전달의 방법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음성과 환상과 꿈으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계시 전달을 통하여 계시하시고자 하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5:39). 그러므로 그 계시 전달의 완성 곧 마지막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날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는 자들은, 그 아들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기록된 계시의 말씀을 통하여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받음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게 되는 것이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한 모습입니다.

 

이러한 계시가 임한 구약과 신약의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죄를 알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모세는 신발을 벗어야 했으며, 이사야 선지자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하며, 베드로는 자신이 죄인이기에 주님께 나를 떠나 달라고 하며, 바울은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합니다. 이렇게 계시를 받은 자들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이정도로 답을 한다고 하자 설명에 감사하다는 말로 마쳤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렇게 답변을 하고 수용한다고 하여도 그것으로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1~13절입니다. “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지난주일 저녁에 집사님과 나눈 결론이 이 말씀이었습니다. 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에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이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원해서 이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기 나라와 그 영광에 이르게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원하심으로 사도들을 부르시고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복음을 전하였는데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람이 말을 전했는데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더구나 바울사도는 복음을 전할 때에 너무나 약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전하였습니다(고전2:2). 말도 어눌하였습니다(고후11:6). 육체적으로 연약하여 사람들이 시험에 들 만한 것이 바울의 육체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천사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바울을 영접하였습니다. 심지어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눈이라도 빼주려고 하였습니다(4:14~15). 갈라디아서 교인들만이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이렇게 연약한 바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이런 것은 사람의 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끼리 알아낸 진리로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갈라디아 교회는 다른 복음 전하는 자들이 오니 그들이 또 흔들린 것입니다. 사도가 직접 전한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기를 하나님의 천사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람의 말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처럼 받았지만 돌아서면 흔들리는 것이 연약한 인생의 모습입니다.

 

오늘 저녁에 신천지에서 9개월을 훈련을 받은 청년을 어느 아버지가 상담하기 위하여 데리고 온다고 합니다. 이 청년이 어느 목사라도 만나겠다는 자심감이 충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20대 초반입니다. 자신이 9개월 동안 신천지에서 배운 것을 절대 진리로 확신하기에 누구에게도 한번 붙자는 생각인 것입니다. 이런 청년에게 제가 논리 정연하게 성경의 말씀을 완벽하게 전한다고 하여도 이 청년을 설득하여낼 능력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오래 전에 우리교회 처음 오신 분이 성경공부를 한다고 해서 신천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신천지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성경으로 주고받기 시작하였습니다. 두 시간 넘게 말했는데 나중에 자신이 신천지교인이라고 실토를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자신이 144천에 올라가 있을 때 나를 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한 가지 배운 것은 자기가 성경을 더 연구해야겠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성경의 지식에서 부족하다고 하여서 결코 승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목사가 설교를 왜 하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저는 거저 제가 받은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고 연구도 합니다. 그러면서 받은 은혜를 나눌 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자의 사람이 나중에 받아들이기도 하고 후자의 사람이 나중에 아니라고도 합니다. 이런 일들을 많이 겪다가 보니 사람이 전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다만 광야의 외치는 소리처럼 외칠 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나가는 바람소리로 들릴 것이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복음으로 들릴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복음으로 알아들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오늘 본문과 연결이 됩니다.

 

본문 1~4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봅니다. “1 엘리후가 다시 말을 이었다. 2 욥 어른은 1)'하나님께서도 나를 옳다고 하실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지만, 3 또 하나님께 "내가 죄를 짓는다고 하여, 그것이 2)하나님께 무슨 영향이라도 미칩니까? 또 제가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여, 내가 얻는 이익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시는데, 그것도 옳지 못합니다. 4 이제 어른과 세 친구 분들께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2절에서 하나님께서도 나를 옳다고 하실 것이라는 말을 욥이 한 것으로 엘리후가 말합니다. 욥은 이미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 번역이 까다로운 것은 욥이 그렇게 한 말을 가지고 엘리후가 공격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으로 보면 그대의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이냐고 번역이 되었습니다. 욥이 세 친구들의 말과 엘리후의 말에 항복을 하지 않으니 엘리후가 질문하는 말은 너의 의가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온 의냐고 묻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의가 과연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묻고 싶어서 설교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욥은 처음에는 재앙이 왔을 때에 입술로도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 주신이도 하나님이시며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내가 그런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였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복도 주셨으니 재앙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난이 깊어지고 오래갑니다. 여기에 세 친구들이 욥의 죄로 인하여 이런 재앙이 왔다고 하였을 때에 욥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나온 말이 나는 죄가 없이 이렇게 재앙을 당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생일까지 저주를 하게 됩니다. 이런 모습을 다 지켜본 엘리후는 욥에게 과연 너의 의로움의 출처가 어디냐고 묻는 것입니다.

 

3절도 봅니다.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면서 내가 아무리 의로워도 그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합니다. 번역의 뉘앙스에 따라 욥의 말로도 되고 엘리후의 말로도 되지만 욥은 이미 앞에서 이런 말들을 다 했습니다. 욥은 자신이 의롭게 살아도 이런 재앙이 온다면 내가 의롭게 할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고 하면서 내가 범죄 하지 않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후는 욥이 한 말을 가지고 욥의 불의함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욥의 이런 고민들은 시편 73편에서도 하박국서에서도 보았습니다만 이러한 욥의 말을 엘리후가 책망합니다. 그래서 들으라고 합니다.

 

본문 5~8절입니다. “5 그대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 6 그대가 범죄 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7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 그대의 악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요 그대의 공의는 어떤 인생에게도 있느니라

 

우리는 엘리후를 욥의 세 친구 편에 세워야 하는지 하나님의 편에 세워야 하는지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때는 아직 확정하지 말자고 말을 했습니다. 엘리후에 말이 인과율적인 표현도 분명히 있습니다만 고난의 해석이 깊고 넓어지는 면을 앞에서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욥이 의롭다고 주장하는 그 의의 출처에 대하여 엘리후가 질문함으로 욥이 주장하는 그 의가 과연 욥의 행위로 인한 것인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의가 되는지 고민하게 하는 좋은 질문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이 가중되자 내가 범죄를 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내가 의로운들 내가 무엇을 하나님께서 드리고 받겠느냐는 말을 했습니다.

 

욥기 9:22~24절입니다. “22 일이 다 일반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순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23 홀연히 재앙이 내려 도륙될 때에 무죄한 자의 고난을 그가 비웃으시리라 24 세상이 악인의 손에 붙이웠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리워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이뇨욥은 하나님께서 순전한 자나 악한 자를 동일하게 심판하신다고 하면서 홀연한 재앙이 내려 도륙 될 때에 무죄한 자의 고난을 그가 비웃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분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들을 욥이 하였기 때문에 엘리후는 그런 말을 하는 욥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5~8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봅니다. “5 욥 어른은 하늘을 보시기 바랍니다. 구름이 얼마나 높이 있습니까? 6 비록 욥께서 죄를 지었다고 한들 하나님께 무슨 손해가 가며, 어른의 죄악이 크다고 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미치겠습니까? 7 또 욥께서 의로운 일을 하셨다고 한들 하나님께 무슨 보탬이 되며, 하나님이 어른에게서 얻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8 욥께서 죄를 지었다고 해도, 어른과 다름없는 사람에게나 손해를 입히며, 욥께서 의로운 일을 했다고 해도, 그것은 다만, 사람에게나 영향을 미칠 뿐입니다.”

 

욥이 한 말을 가지고 엘리후가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죄 없이 재앙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악인이나 의인이나 차별이 없이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욥에게 엘리후는 높으신 하나님을 그렇게 말하는 욥 자신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보라고 합니다. 높이 뜬 구름을 보라고 합니다. 우리도 가을 하늘의 구름을 보시기바랍니다. 얼마나 높은지 그 구름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잠시 보이다 사라지는 구름도 우리가 어떻게 못하는데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이렇다 저렇다고 말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므로 욥이 죄를 지어도 그런 것은 인간에게나 손해를 입하는 것이며 의로운 일을 했다고 해도 그것은 사람에게나 영향을 미칠 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묘사에 대하여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스러운 분이시며 스스로 자족하시는 분이시기에 인간의 그 어떤 선한 행위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더 높이거나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낮추거나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잘 정리한 것이 요리문답이라는 교리공부에 나옵니다만 그런 교리 공부들도 사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조직하여 둔 것이기에 인본주의적인 생각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후의 이런 말들은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라고 이름 하는 곳에서 사람의 행위에 따라 하나님이 응대하여야 하는 그런 하나님을 말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해놓고서 그 다음으로 세상에서 복을 받고 성공하는 일은 사람하기 나름이라고 합니다. 물론 어떤 곳에서는 구원도 사람하기 나름이라고 하는 곳도 많습니다. 물론 그런 곳은 기독교라고 할 수 없지만 겉으로는 기독교라고 합니다. 그런 곳에서는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도 자신의 처소를 크게 만들려면 사람의 헌신과 충성도에 따라 달라진다고 합니다. 이런 발상들이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치입니다. 욥의 말과 욥의 세 친구들과 엘리후의 말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를 계시하시는지 봐야 합니다.

 

이사야 66: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사람들이 최고의 힘을 모아서 할 수 있는 것이 여호와를 위하여 집을 지어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여호와를 위하여 집을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이며 땅은 하나님의 발판인데 인간이 지구에다가 전 지구적인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어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다고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의 발판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무엇으로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는 자를 돌보신다고 합니다.

 

본문 9~16절입니다. “9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군주들의 힘에 눌려 소리치나 10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구나 11 땅의 짐승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가르치시고 하늘의 새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지혜롭게 하시는 이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이도 없구나 12 그들이 악인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부르짖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음은 13 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14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말하는 그대일까보냐 15 그러나 지금은 그가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 악행을 끝까지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16 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세상에서 부르짖을 일이 많지만 사람들은 그 부르짖을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도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거저 악을 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부르짖을 일이란 여러 가지 학대도 있고 군주들의 학대도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사회구조악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여호와께서 부르짖지 않기에 응답을 하지 않는다고 엘리후가 말합니다. 욥도 지금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고통에 대하여 악을 쓰며 부르짖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교만이라고 합니다. 이러함에도 욥은 하나님을 뵐 수도 없고 일의 판단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기다릴 뿐이라고 하는 욥을 책망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엘리후의 말과 욥의 말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엘리후는 욥이 하는 말이 세상의 억울함을 당하는 자들이 부르짖기는 하지만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는 그런 모습을 취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모습이 교만한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욥은 아직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니 입을 닫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후가 욥의 말을 인용하여 한 14절을 세 가지 측면으로 봐야 합니다. 첫째는 엘리후가 말한 것처럼 욥의 불신앙으로 말한 것으로 봅니다. 자포자기(自暴自棄) 하여 한 말로 들릴 수가 있습니다. 둘째는 자기 의를 주장하는 모습입니다. 흔히 억울한 일을 당하면 하나님은 아실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의 의를 주장할 수가 있습니다. 셋째는 정말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일임하는 믿음의 고백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것이라고 보십니까? 그런데 저는 욥의 이 말 안에 이런 내용이 다 담길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란 단편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문제를 다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욥이 결국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들었을 때에는 자신이 입을 닫고 회개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의를 덧입은 자들은 자신의 죄를 알기에 하나님의 의만 의지하고 자랑하는 것이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의 신앙고백이 됩니다.

 

로마서 3:19~27절입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욥기를 통하여 의의 출처에 대한 논쟁들을 미리 성경에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욥과, 욥의 세 친구들과. 엘리후의 주장들을 통하여 결국 의의 출처가 무엇인지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의의 출처란 인간의 그 어떤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구약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우리의 그 어떤 행위나 조건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욥기도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화목제물을 보여주시기 위한 장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의를 덧입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나 행한 것이 죄 뿐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만 의지하고 자랑하게 됩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