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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5:1~7 치료하는 혀 2017. 8. 23

 

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2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4 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5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 6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 7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여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

 

오늘도 말에 대한 내용이 많은 본문입니다. 1절에 유순한 대답과 과격한 말, 2절의 지혜 있는 자의 혀와 미련한 자의 입, 4절의 온순한 혀와 패역한 혀, 5절의 훈계, 7절의 지혜로운 자의 입술과 같은 표현들은 다 말을 뜻하는 내용입니다. 잠언에는 이러한 말에 대한 내용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오늘은 4절의 온순한 혀는 생명나무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보겠습니다. 앞에서는 지혜가 생명나무라는 말씀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온순한 혀가 생명나무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른 말에 대한 내용들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지만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뜻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도 말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말을 잘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지난주에도 보았습니다만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말에 대한 내용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과격한 말을 하지 말고 부드럽게 말하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말을 과격하게 하는 사람이 있고 부드럽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기질 상 나오는 것입니다. 과격하게 말해도 진실을 말할 수가 있고 부드럽게 말하여도 거짓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드러운 답변이 분노를 쉬게 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지만 그 안에 참된 진리를 담고 있다면 그런 부드러운 말도 과격한 분노를 일으키는 요인이 됩니다.

 

이사야 30:10절입니다.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고 합니다. 바른 말이 그들에게 분노케 하는 것이기에 부드러운 말을 하라고 합니다. 부드러운 말이 거짓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투의 과격함과 부드러움의 문제가 아니라 여기서는 바른 말이냐 거짓된 말이냐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부드러운 말을 하여도 그 내용이 진리를 전하면 과격한 말로 들리는 것이며 아무리 과격한 말로 하여도 그 내용이 거짓말이면 부드러운 말로 들리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거짓 선지자들이 확실한 평강을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된 선지자는 입만 열면 전쟁과 재앙을 말하니 누가 부드러운 말을 하는 자로 보입니까?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하신 모든 말씀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들렸겠습니까?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의 말씀이 얼마나 사람들을 격분케 하는 말씀이신지 그 말씀을 들은 자들은 예수를 어떻게 하면 죽일까를 의논하고 결국 성전을 허는 자, 율법을 어기는 자,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몰아서 십자가에 처형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격분하여 예수님을 배척한 자들은 율법의 의로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부드럽게 하시든지 분노하시든지 간에 격분이 일어나는 말씀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1:28~30절입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예수님의 이 말씀에 아멘하고 다가가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율법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자신이 해결할 수 없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죄를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자들이라면 예수님의 이 말씀이 참으로 부드러운 음성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으로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을 부르시고 영접하셨기에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이 말씀자체가 분노를 유발하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말씀이 부드럽게 들리는 자가 있고 격노하는 자가 있습니다.

 

오늘 찬송한 528장의 1절입니다. 우리를 오라고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이런 가사가 주님의 음성으로 부드럽게 들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이 죄가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부르심이 부드러운 음성이 됩니다. 그런데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이 가사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가 드러날수록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의 음성은 부드럽게 들릴 것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는다고 합니다.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하게 베풉니다. 방금 1과 연결하여 보면 주님께서 부르시는 소리가 부드러운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에게 대하여 주님은 그 지식을 선하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자라면 그 받은 은혜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받은 지혜와 지식을 선하게 베푸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자는 그 받은 은혜가 없기에 자기의 것을 쏟아냄으로 미련한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주께 받은 은혜가 없기에 선악체계와 인과율 외에는 말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십니다. 오늘 문맥을 따라 살펴보면 진리를 전하는 자와 거짓을 전하는 자를 다 살펴보신다는 말씀도 됩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우리의 안고 일어섬을 다 아십니다. 우리가 하늘 꼭대기에 올라간다고 하여도 주님 앞에서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음부에 자리를 펼지라도 그곳도 주님 앞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빛과 흑암이 일반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주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의식이 있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과 마음의 의도까지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본문 4절을 끝에서 보도록 하고 5절을 먼저 봅니다.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아비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길을 갈 때나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성경의 아버지의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하나님의 바른 말씀으로 훈계를 하는데 이것을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입니다. 심지어 이런 자들은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비의 훈계와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는 자가 됩니다. 이런 말씀은 단지 부모효도를 말하는 유교적인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보물이라고 하니 우리는 세상에서 말하는 보물로 여깁니다. 그래서 의롭게 정직하게 살면 많은 보물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잠언 16:8절을 봅니다.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공의를 겸하면 소득이 적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적은 소득이 불의로 많은 소득을 모은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의인이라면 세상의 재물을 복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복으로 여기는 자가 됩니다. 만약 썩어지고 불탈 것을 복으로 여긴다면 그 자체가 고통이 됩니다.

 

야고보서 5:1~6절입니다. “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4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6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서 기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의로 가득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자들도 역시 부자입니다. 그러므로 물질만의 부자가 아니라 자기의 행위로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자들이 있다면 이런 자들도 동일하게 말세에 임할 고생으로 인하여 울고 통곡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갖춘 것들이 다 썩고 좀을 먹을 것처럼 우리의 의라는 것들도 그 심판의 날에 다 날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살육의 날에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며 마음을 살찌게 하였다는 말씀은 단지 물질 적인 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라는 것으로 인하여 참된 의인을 정죄하고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에게 대항하지 않고 참으로 부드러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여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다고 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참된 지식을 전파합니다. 참된 지식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된 그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이미 내가 들리면 내가 그 인줄 알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8:28).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리스도 영이 임한 사람이라면 그 입술로 지식을 전파합니다. 그 지식이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그런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마음의 정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련한 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 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온순한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다른 용례를 살펴보면 치료 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용례를 보면 화평, 공손함, 양약, 회복, 온순의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치료하는 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온순한 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마르페인데 이 단어의 어원은 라파입니다. ‘라파라고 하면 여호와 라파가 생각납니다. 그러므로 온순한 혀라는 말은 치료하는 혀 곧 치료하는 말씀으로 보시면 됩니다.

 

예레미야 14:19절입니다. 주께서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나이까 주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라도 좋은 것이 없고 치료 받기를 기다리나 두려움만 보나이다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백성들에게 선포하지만 자신은 그 심판의 말씀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않으시냐고 합니다. 선지자는 단지 심판의 말씀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심판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성실함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20~21절입니다. “20 여호와여 우리의 악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나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21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온순한 혀라는 말은 온순한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며 온순한 말씀의 선포란 치료하는 말씀입니다. 치료를 하려면 고통이 따릅니다. 수술을 하려면 칼로 찢고 도려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온순한 혀가 생명의 샘이 된다는 말씀이며 치료하는 혀라는 말씀입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범죄 하였음을 시인하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말라기 4:1~2절입니다.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1)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오늘 본문의 온순한 혀라는 단어의 온순한 이라는 단어가 치료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이 치료한다는 말이 여기에 같이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온순한 혀라는 말을 치료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치료하는 말씀은 여기서는 치료하는 광선이라고 합니다. 이 치료하는 광선이라는 각주를 보면 광선이 날개입니다. 그렇다면 치료하는 날개로 번역해도 됩니다. 이제 어떤 말씀이 기억이 납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시면서 하신 말씀이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품으려고 그렇게 수많은 선지자를 보냈지만 너희가 원치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치료를 받는 길은 오직 주의 품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원치 않았습니다.

 

이어지는 3~6절입니다. “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모세에게 명령한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율법으로 돌아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주의 긍휼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렇게 돌이키는 자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듣는 말들이 치료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들이 치료하는 말을 전하자 그들은 자신들을 욕한다고 하면서 부드러운 말을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신다고 합니다. 그 엘리야가 오면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킨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주로 그 땅을 친다고 합니다. 이것이 온순한 혀, 치료하는 혀로 나타내는 구약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여기에 예언된 엘리야가 언제 왔습니까?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 후 약 400년이 지나서 세례요한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이 오리라고 한 엘리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14, 17:10~13). 그런데 온순한 혀, 치료하는 혀, 치료하는 광선, 치료하는 말씀을 전하는 세례요한이 어떻게 전하였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였습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외칩니다.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을 맞이하는 것이 곧 회개하는 것이라고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주께로 돌이키는 일입니다. 이것이 치료하는 혀의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말은 어떻습니까?

 

야고보서 3:1~12절입니다.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 우리가 말들의 입에 1)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2)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을 가지고 사람이 말조심을 해야 한다고 하면 윤리도덕적인 교훈이 됩니다. 여기서 선생 된 우리라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말을 실수를 하지 않아야 온전한 자라고 합니다. 그러면 말의 실수가 없는 온전한 자라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설교를 정확하게 원고를 작성하고 그 원고대로 하나도 틀리지 않게 하면 온전한 설교를 한 것입니까? 무디가 설교를 하고 나니 어느 교수가 문법적으로 틀린 곳이 많다는 지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실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혀, 곧 사람의 말이 복음을 전하지 않고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것이 바로 지옥에서 나오는 불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과격한 말씀입니까? 율법의 의로 자기들을 치장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자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도 가로막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혀가 쉬지 않는 악이며 죽이는 독이 가득한 혀가 되는 것입니다.

 

한 입으로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한 입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면서 참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이런 모습이 마땅하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낼 수 있으며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고 합니다. 즉 열매로 안다는 말씀입니다. 한 입에 두 말을 할 수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두 말을 한다는 것이 말씀을 섞는 것입니다. 혼잡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죽이는 말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2:14~17절입니다.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순전함으로, 온순한 혀로, 치료하는 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복음을 전하였는데 어떤 자들에게는 사망의 향기가 되고 어떤 자들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됩니다. 은혜의 복음이 사망의 소식으로 들리는 자들은 육체로 모양을 내려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복음이 생명의 향기로 맡아지는 자들은 죄인을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주님의 말씀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혀, 곧 치료하는 혀는 순전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16~17절입니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온순한 혀, 치료하는 혀로 전해지는 순전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받는 자들이 치료가 됩니다. 무엇에서 치료하는 것이 됩니까? 불의한 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 치료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치료가 일어나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의 혀도 복음으로 인하여 치료하는 혀가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