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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7:1~9 사랑을 구하는 자 2017. 10. 25

 

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2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들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 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4 악을 행하는 자는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6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7 지나친 말을 하는 것도 미련한 자에게 합당하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겠느냐 8 뇌물은 그 임자가 보기에 보석 같은즉 그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 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본문 1절을 봅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다투어도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육이 집에 가득하다는 것은 구약적인 배경으로 봐야 합니다. 구약에서 제사를 드리고 나면 제물을 제사장에게 돌려드리는 것이 있고 제사 드리는 가족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제육이 가득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도 다투는 것보다 제사를 드릴 제물이 없을 정도로 가난해도 화목한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4~8절입니다. “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6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7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8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

 

엘가나는 아내가 두 사람입니다.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고 브닌나는 자식이 있습니다. 엘가나가 온 가족과 함께 실로에 가서 제사를 드리고 나서 제물의 분깃을 나누어 먹습니다. 그런데 한나를 더 사랑하여 분깃의 갑절을 주니 브닌나가 한나를 격분시킵니다. 그러니 제사를 드리고 나서 제물을 나누어 먹는 자리가 불화의 자리가 됩니다. 이것은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의 상태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엘리와 그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있는 시대에 제사장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때에 한나는 기도하여 자녀를 얻어 하나님께 바칩니다. 자식 있는 자로 인하여 핍박받는 자식 없는 여인에게서 나온 사무엘이 결국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합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불화하면서 살아갑니까? 가정불화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가난함 때문에 불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탐심으로 인하여 불화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봐도 오늘 이 시대만큼 부요한 적이 없습니다. 나라의 경제규모가 세계 10위에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행복지수를 세계의 58위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인 방글라데시가 행복지수는 높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목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물질로는 인간의 욕망을 결코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화목하려면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3:23~25절입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예수님의 피로써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자라면 자신과 하나님사이에 화목이 일어났기에 같은 은혜를 입은 자라면 화목하게 됩니다. 이러한 화목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14:9~11절입니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이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을 받은 자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들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고 합니다. 화목에 대하여 사무엘서를 보았습니다만 사무엘이 한나의 서원에 따라 성전에 바쳐지지만 레위지파가 아니라 에브라임지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사무엘에게 임함으로 엘리의 두 아들들은 언약궤를 메고 나갔지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여호와를 섬기는 사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슬기로운 자의 모습입니다. 물론 이런 슬기라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임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의 모습은 엘리와 홉니와 비느하스가 같은 자가 됩니다. 다음 주에 미련한자에 대하여 봅니다.

 

3절입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십니다. 은이나 금을 연단하는 것은 불을 통과합니다. 수천도의 온도에서 은이나 금이 들어있는 광석이 녹아서 은과 금이 남아집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누가 무엇으로 연단을 하시는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음을 아시기에 우리를 연단시키시는데 그 연단이 말씀으로 인한 연단입니다. 이러한 연단을 통하여 자신을 살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살리는 것입니다. 요셉의 발이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이 쇠사슬에 매인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 까지 그의 말씀이 단련하였다고 합니다(105:18~19). 여호와의 연단은 고난이지만 이 고난을 통하여 자신과 이웃을 살리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고 합니다. 악을 행하고 거짓말 하는 자는 사악하고 악한 말을 잘 듣습니다. 그런데 사악하고 악한 입술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드러나면 누가 그 말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이리가 양의 가죽을 입고 오듯이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고 옵니다. 그러므로 사악하고 악한 말은 보암직한 모습으로 옵니다. 종교적으로는 신비하고 거룩한 모습으로도 옵니다. 자기 귀를 즐겁게 하려고 사욕을 쫓을 스승을 찾는 자들에게 그들을 가장 만족시켜줄만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복음을 말한다고 하면서 복음적이지 않은 내용들을 비판합니다. 저도 그렇게 많이 합니다. 그러다 보면 복음이 좋은 것보다 복음으로 복음 아닌 것을 비판하는 재미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그러하였습니다.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여 쫓아낸 것은 잘하였지만 그러다 보니 처음 사랑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말을 듣기 좋아합니까?

 

요한복음 8:43~47절입니다.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시는데도 사람들이 진리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이 세상의 사람들이 그 아비 마귀의 지배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세상의 자랑이 될 만한 것으로 미혹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시는데도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악한 자에 속한 자는 진리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주의하라고 한 것입니다(고후11:4). 말은 복음, 예수, 영이라고 말은 하지만 다른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분별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분별이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각색된 말이 아닙니다.

 

본문 5절입니다.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라고 합니다. 거룩한 처소에 계시는 하나님은 고아와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관이라고 합니다(68:5). 그러므로 시편에서 고아 과부 나그네는 자기 힘이 없기에 하나님만 의지하는 경건한 자를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자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난한 자들이 재앙을 받는 것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전적으로 주께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6절입니다.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라고 합니다. 여기서 손자나 자식은 히브리어로 이라는 같은 단어입니다. 노인과 아버지는 다른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단어이지만 문맥에 따라 손자가 되고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대로 보면 손자가 없는 노인은 면류관도 없고 아버지가 없는 고아는 영화로움도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말씀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유대인들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을 아주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유대인인 바울사도는 예수님을 만난 후로 결혼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문자적인 것이라면 결혼을 하지 않으면 자식도 손자도 없게 되는데 이들에게 무엇이 면류관이며 영화가 되겠습니까? 바울사도는 복음을 전하여 복음을 받은 자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합니다(고전4:17,딤전1:8,딤후1:2).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바울은 아들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4:1). 그러므로 복음으로 낳은 형제들이 자신의 아들이며 기쁨이며 면류관이라고 합니다. 혈육의 관계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쁨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7절입니다. 지나친 말을 하는 것도 미련한 자에게 합당하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겠느냐고 합니다. 미련한 자가 거만하게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는 말을 하는 것이 합당치 않는데 하물며 존귀한 자에게 거짓말이 합당하겠느냐고 합니다. 거짓말에 대하여서는 앞에서 요한복음을 통하여 찾아보았습니다. 거짓의 아비가 마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존귀에 처한 것처럼 보이더라고 그가 거짓말을 한다면 결코 존귀한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 것은 그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이 나옵니다. 우리는 어떤 말이 나옵니까?

 

에베소서 4:29~32절입니다.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우리의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와야 할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제 전주에 두 번째 다녀왔습니다. 복음을 들은 어떤 분은 다닐 교회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목사가 사기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처음 보는 사람인데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소개하면서 눈물부터 흘리는 것입니다. 극심한 고난 중에 욥기를 들으면서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힘듦을 견뎌낼 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8절입니다. 뇌물은 그 임자가 보기에 보석 같은즉 그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일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비꼬는 말인지 잘 분별이 안 됩니다. 이럴 때는 성경전체를 통하여 뇌물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10:17). 재판관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뇌물을 받지 말라고 합니다. 뇌물은 지혜자의 눈으로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한다고 합니다(16:19).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할 것이며 모든 백성은 아멘 하라고 합니다(27:25). 이런 말씀에 비추어보면 이 말씀은 뇌물을 받는 것을 비웃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라고 합니다. 오늘 설교제목은 여기서 정하였습니다만 오늘 말씀을 보면서 우리의 허물이 드러났습니까? 덮어졌습니까? 드러나는 내용도 있었지만 허물이 덮어지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로마서 3장과 요한 일서의 내용은 우리의 죄와 허물이 예수님의 피로 가려지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말씀들을 보면 나의 허물들이 또 드러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지, 가난한 자를 조롱하지는 않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이런 말씀들을 보면 우리의 허물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허물이 말씀으로 드러날수록 성도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덮어주는 이야기가 어디서 최초로 나옵니까?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자신이 벌거벗음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린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왜 찾아오십니까? 혼내고 책망하려고 찾아오십니까? 가죽옷으로 가려주시기 위하여 오십니까? 우리가 우리를 가리고 덮는 것으로는 결코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덮어주셔야 하십니다. 이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노아언약입니다. 노아와 그 가족이 하나님의 은혜로 덮어주심을 은혜를 입어서 방주를 만들고 홍수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술 취하여 벌거벗고 자는 것을 함은 덮어주지 않고 조롱하였지만 셈과 야벳은 뒷걸음으로 들어가서 아버지를 덮어주었습니다. 노아가 깨고 나서 이 일을 알고 함을 저주한 것은 하나님의 덮어주심을 은혜를 모르는 것이 저주라는 말입니다.

 

모세언약에서는 언약궤 안에 들어있는 세 가지 물건이 다 하나님을 배반한 증거물들입니다. 돌 판은 금송아지 숭배로 인하여 깨어지고 두 번째 만들어진 돌 판입니다. 만나 항아리는 이틀 분 거두어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이틀 분 거두어 와서는 썩어버린 것과 안식일에 거두러 가지 말라고 했는데 거두러 간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하나님의 권위부여를 대적한 증거물입니다. 이러한 배반의 증거물들을 언약궤 뚜껑으로 덮고 그 위에 어린 양의 피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언약궤 뚜껑의 이름이 속죄소이며 시은좌입니다. 이것이 덮어줌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구하는 자는 허물을 덮어주지만 허물을 자꾸 들추어내는 것은 친구사이를 이간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질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사탄입니다. 사탄은 대적하는 자이며 참소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를 완벽하게 덮어주시는데 이것을 부족한 것으로 말하고 속이는 것이 사탄의 이간질입니다. 사탄의 이간질이 참으로 교묘하게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일한 것도 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거래하게 만들어 결국 나의 이름과 나의 가치를 높이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사탄의 이간질입니다.

 

로마서 13:11~14절입니다.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허물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가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는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입은 무화과 나뭇잎의 옷, 자기 행위의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입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면 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형제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그 피로 이루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26~29절입니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이러한 사랑은 사람이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이런 사랑이 우리에게도 흘러넘치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