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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 설교]  [동영상 설교]

에스겔 20:27-32 약속의 땅에서 우상숭배 2012. 4. 18

 

27 그런즉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 조상들이 또 내게 범죄 하여 나를 욕되게 하였느니라 28 내가 내 손을 들어 그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였더니 그들이 모든 높은 산과 모든 무성한 나무를 보고 거기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노하게 하는 제물을 올리며 거기서 또 분향하고 전제물을 부어 드린지라 29 이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다니는 산당이 무엇이냐 하였노라 (그것을 오늘날까지 1)바마라 일컫느니라) (히, 바마는 산당이라는 뜻인데 '바'는 다닌다는 뜻이요 '마'는 무엇이냐라는 뜻) 30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조상들의 풍속을 따라 너희 자신을 더럽히며 그 모든 가증한 것을 따라 행음하느냐 31 너희가 또 너희 아들을 화제로 삼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오늘까지 너희 자신을 우상들로 말미암아 더럽히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겠느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라 32 너희가 스스로 이르기를 우리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 족속 같이 되어서 목석을 경배하리라 하거니와 너희 마음에 품은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리라

 

애굽에서 우상숭배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출애굽 하여 광야에 나왔지만 여전히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광야 1세대를 광야에서 다 죽이십니다. 그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아무리 가나안 원주민들이 강하고 성벽이 튼튼하고 무기가 우수하다고 하여도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에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 이었습니다. 그리고 광야 2세대들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여호수아 5:1-12절을 봅니다. “봉독”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는 가나안과 그 주변의 왕들과 사람들의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고 합니다. 요단강을 건넌 후에 할례를 행하게 합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은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할례를 행하고 낫기를 기다릴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여호수아가 그곳 지명을 길갈이라고 하였습니다.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고서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애굽의 수치와 광야의 수치를 할례를 행하듯이 다 잘라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어떠하였습니까? 여호수아 24:31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여호수아와 광야 2세대의 장로들이 살아있을 동안 여호와를 섬겼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이후의 시대는 어떠하였습니까? 사사시대입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고 몇 번이나 거듭 증언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자기 마음대로 살았는지 온갖 음행과 우상숭배가 만연한 모습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와도 나아진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오늘 본문 27절을 봅니다. 너희 조상들이 또 내게 범죄 하여 나를 욕되게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지금 바벨론의 포로에 잡혀와 있는 그들의 조상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조상들이 범죄 한 것은 애굽과 광야에서 범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을 다 진멸해 버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28절 앞부분을 봅니다. “내가 내 손을 들어 그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였더니” 27절과 28절의 말씀의 중간에 아무런 접속사가 없습니다. 그들의 조상이 범죄 하여 나를 욕되게 하였고 또 나를 욕되게 하였다면 약속의 땅에 들여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약속의 땅에 들여놓는가 하는 말입니다.

 

공동번역은 이렇게 연결합니다. “27 그러니, 너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주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고 하며 일러라. '너희의 선조들은 나를 배신하여 나를 모욕하였지만, 28 나는 손을 들고 그들에게 주겠다고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이끌어 들였다.” “하였지만” 이라는 단어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여호와를 배신하고 모욕하였지만 여호와는 그들에게 주겠다고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이끌어 들였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이라고는 배신뿐인데 왜 이들을 약속의 땅에 들여놓으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의 표현을 신약에서 봅니다. 에베소서 2:3-5절입니다.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그러면 진노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구원하십니까? 3절과 4절 사이에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들어가야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새 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그러나”를 넣었습니다. 우리는 언약을 배신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신실하셔서 그 언약을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본문 28절을 다시 봅니다. “내가 내 손을 들어 그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였더니 그들이 모든 높은 산과 모든 무성한 나무를 보고 거기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노하게 하는 제물을 올리며 거기서 또 분향하고 전제물을 부어 드린지라” 애굽에서도 광야에서도 배신하고 범죄 한 그들을 하나님의 자기 언약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여놓았습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한 짓이라고는 우상숭배였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사사시대와 열 왕들의 시대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온 자들이 어떻게 배신하였는지 사사기에서 한 장면만 봅니다. 사사기 18장에서 미가 집안에서 우상숭배 하는 모습입니다. 미가집안이 레위인을 집안 제사장으로 삼습니다. 그 이유는 복 받기 위하여서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단 지파가 그곳으로 지나다가 이 레위인을 자기들의 제사장으로 데려갑니다.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제사장 하나 세워서 복을 받으려고 하는 이런 모습이 우상숭배의 모습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백성들이 왕이 없음으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고 합니다.

 

사사시대를 지나고 왕들의 시대가 됩니다. 왕이 없어서 백성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면 이제 왕이 세워졌으니 제대로 여호와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왕들이 세워져도 여전하였습니다. 초대 왕인 사울왕도 제대로 왕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민심수습차원으로 제사를 드림으로 버림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간음과 살인을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아내를 천명이나 두었습니다. 특히 이방 나라와 정략적인 결혼을 하였기에 그들이 들여온 우상을 위한 신전도 많이 지어준 것입니다. 그 결과 솔로몬 사후에 나라가 남북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나라가 남북으로 나누어졌을 때에 북 이스라엘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단과 벧엘에 신전을 지어놓고 그 안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원하는 자를 아무나 세웁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우리를 구원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게 합니다. 이것도 정략적인 차원입니다. 남쪽에 있는 성전으로 사람들이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한 것입니다. 이러하였기에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먼저 멸망합니다. 그러면 남 유다는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남 유다도 이에 못지않게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당합니다.

 

본문 29절입니다. “이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다니는 산당이 무엇이냐 하였노라(그것을 오늘날까지 바마라 일컫느니라” ) 약속의 땅에 산당이 얼마나 많았는지 여호와께서 너희가 다니는 산당이 무엇이냐고 하셨습니다. 산당이 무엇이냐는 여호와의 책망을 듣고서 그들이 산당을 ‘바마’로 불렀습니다. '바'는 다닌다는 뜻이요 '마'는 무엇이냐라는 뜻이기에 산당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이런 산당이 얼마나 많았는지 봅니다.

 

예레미야 11:9-14절입니다. “봉독” 예레미야 선지자와 에스겔 선지자는 동 시대의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 중에 반역이 있다고 합니다. 그 반역이란 여호와의 말씀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으로 돌아가서 다른 신을 섬긴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앙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럴 때에 이들이 평소에 섬기든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어도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평소에 섬기던 그 신들이 성읍의 수와 같다고 합니다. 또 예루살렘의 거리의 수대로 그 수치스러운 물건 곧 바알에게 분향하는 제단을 쌓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남 유다의 성읍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성읍의 수만큼이나 신들이 많았고 가장 큰 성읍이 예루살렘인데 이 예루살렘에는 그 거리의 수대로 바알의 제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이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 있는 자들에게도 임한 말씀입니다. 이들이 에스겔에게 나아와서 묻습니다.

 

에스겔 20:1-3절을 봅니다. “봉독” 그러나 그렇게 묻기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즉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판이 집행된다는 말씀입니다. 에스겔 20:30-31절을 봅니다. “봉독” 같은 말씀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평소에는 우상숭배만 하다가 위기가 오니 여호와께 묻기 위하여 나온 그들에게 묻기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기도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레미야서에서도 오늘 본문 에스겔서에서도 나옵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우상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우상이 바알입니다. 바알은 풍요와 다산의 신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 안에는 바알이 가득하였습니다.

 

호세아 2:1-23절을 봅니다. “봉독” 음란한 여인 고멜과 같은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것으로 온갖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 우상인 바알을 향하여 내 남편이라고 하면서 따라 나선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바알을 섬긴 날 수 대로 심판하시고 다시 데려오십니다.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소에 자기 남편이라고 따라간 자가 바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교회당으로 왜 이렇게 모입니까? 우리가 이곳에 모여서 나의 소원과 나의 만족을 위하여 구하고 있다면 이곳이 바로 바알의 전이 됩니다. 내가 지극한 정성을 바쳐서 내가 평소에 원하는 소원을 이루고자 한다면 이것이 바알의 전입니다. 그러면 이 대방동에만 몇 개의 바알의 전이 있습니까? 골목마다 늘려 있는 것이 바알의 전입니다. 이런 바알의 전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어떻게 구원하여 내시는 것입니까? 바알을 따라가는 자를 가시로 막고 담으로 막아도 따라가는 그들을 완전히 심판하여 돌이키십니다.

 

지금 에스겔과 예레미야와 호세아와 오늘 이 시대를 함께 연결하여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 여전히 우상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들의 마음에는 우상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32절입니다. 우리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 족속 같이 되어서 목석을 경배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들의 마음에 품은 생각입니다. 우상숭배로 포로로 잡혀가 있는 중에도 그 마음은 우상이 가득합니다.

 

오늘 우리가 바벨론이라는 이 유배지에 살면서 우리의 마음에 무엇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것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풍요와 다산이라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32절을 봅니다. 그 마음에 품은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우리의 평소 마음이 늘 우상숭배이기에 결코 우리 마음에 품은 대로 되지 않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뜻이 우상숭배로 가득하면 할수록 범사에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나의 뜻대로 해주지 않느냐고 항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인 십자가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이런 모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면 나의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이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그런 과정이 연단입니다. 그런 연단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은 나의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