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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 설교]  [동영상 설교]

에스겔 20:33-44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2012. 4. 25

 

3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반드시 다스릴지라 34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여러 나라에서 나오게 하며 너희의 흩어진 여러 지방에서 모아내고 35 너희를 인도하여 여러 나라 광야에 이르러 거기에서 너희를 대면하여 심판하되 36 내가 애굽 땅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을 심판한 것 같이 너희를 심판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7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38 너희 가운데에서 반역하는 자와 내게 범죄 하는 자를 모두 제하여 버릴지라 그들을 그 머물러 살던 땅에서는 나오게 하여도 이스라엘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는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 42 내가 내 손을 들어 너희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고 43 거기에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미워하리라 44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우상숭배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기 언약 때문에 출애굽을 시키십니다. 그러나 출애굽 하여 광야에 나왔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불신하고 여전히 우상숭배를 하였기에 광야 1세대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광야에서 다 죽습니다. 광야 2세대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도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나라에서도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에스겔 20:1-32절까지의 내용이었습니다.

 

에스겔 20:31-32절입니다. “봉독” 포로로 잡혀와 있는 오늘까지 너희 자신을 우상으로 더럽힌다고 합니다. 이들이 하는 말이 우리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 족속 같이 되어서 목석을 경배하리라고 합니다. 우상숭배 하다가 포로로 잡혀 왔는데도 어떻게 이방 나라의 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우상들을 경배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자신들이 살아계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지만 오히려 목석의 우상을 섬기는 나라에 망한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나라가 훨씬 더 크고 강한 나라이니 그런 신을 섬기는 것이 낫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어제 창원 밀알 장애인 선교단 설립 15주년 행사에 다녀왔습니다. 우편으로 안내가 왔는데 가지 않으려고 하다가 단장이 전화가 와서 꼭 참석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오랫동안 지원해 왔기에 기념패를 하나 전달한다고 하여서 갔습니다. 창원에서 장애인 교실을 운영하는 교회가 네 곳뿐이라고 합니다. 시설이나 여건이 마련되지 않기도 하지만 형편이 되는데도 안하는 곳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덧붙이는 말이 장애인들도 크고 좋은 교회당에 가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이 왜 자꾸만 이방의 목석을 경배하려고 하는지를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보기 위한 것입니다. 이들이 우상을 섬기려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보다 목석으로 만든 신이 능력이 있기에 이렇게 크고 강한 나라가 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너희 마음에 품은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목석을 경배하여 그들처럼 크고 강한 나라가 되려고 하는 그 마음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우상숭배하려고 하는 대로 버려두시지 않고 막으신다고 합니다.

 

왜 막으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앞에서도 보았습니다만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서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은 반드시 신실하게 이루어내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신실하게 이루어내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과 자비를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자신의 이름을 위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속성도 함께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이 많습니다. 택함을 받았기에 고난이 많은 것입니다. 택함을 받지 않았다면 목석으로 만든 신들을 섬기며 풍요와 다산을 바라며 음행을 종교적인 제의로 삼고 살아도 그대로 버려두십니다.

 

오늘본문 33-36절입니다.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시기를 반드시 너희를 다스리겠다고 하십니다. 다스리신다는 것은 버리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스리시는 것입니까?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 나라에 흩어진 그들을 다시 모아내신다고 합니다. 여러 나라의 광야에 이르게 하여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 광야에서 심판 한 것 같이 너희를 심판하리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순종하여 사랑으로 다스림을 받기 보다는 불순종하여 매로 다스림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을 싫어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민수기 14:22-24절입니다. “22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광야에서 온전히 하나님을 따른 사람은 갈렙 뿐이라고 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라로서 들어갑니다만 온전히 따른 사람은 이방인으로서 유다지파에 편입된 갈렙 뿐입니다(창15:19, 수14:6,14).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하여 지금 바벨론과 여러 지역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그들을 다시 광야로 이끌어 내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심판을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것을 제 2의 출애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심판을 하시는데 어떻게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까? 민수기에서 보았듯이 광야에서 심판을 행하시는데 약속의 땅을 보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온전히 따랐기에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고 합니다. 이 갈렙의 일을 한 곳에서 더 봅니다.

 

여호수아 14:6-15절입니다. “봉독” 아주 유명한 본문이라서 대부분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갈렙이 온전히 여호와께 충성하였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지난주에도 보았습니다만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 때로부터 45년이 지났지만 갈렙의 믿음은 여전히 온전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그들을 이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갈렙이 거인족인 아낙 자손이 사는 헤브론을 차지합니다.  그때 그 땅에 전쟁이 그쳤다고 합니다.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약속의 땅이 많이 남았습니다. 완전히 다 차지하기는 다윗 시대에 이루어지는데 그 땅에 전쟁이 그쳤다는 말은 승리의 깃발을 세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셨음을 보여주는 예표가 됩니다. 역사 적으로는 2천 년 전에 이미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는 이미 전쟁이 끝났습니다. 사단이 쫓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는 진행 중입니다. 재림하시면 그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이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광야라는 곳에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어떤 심판을 받는 것입니까?

 

37절을 봅니다.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맨다고 하십니다.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계산할 때에 짐승을 좁은 곳으로 몰아서 한 줄로 세워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게 하여 십일조로 바쳐질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27:32절입니다.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 여기서 십일조로 선택되는 것을 다른 것과 바꾸지 못하게 합니다. 짐승들이 알아서 줄서서 갈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택이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임을 보여줍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몰아내시는 것은 이런 방식의 심판을 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에서 출애굽의 과정에서 심판을 하시는데 언약을 믿지 못한 자들은 광야에서 죽게 만드시지만 언약을 믿는 자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갈렙을 통하여 보여주듯이 지금 바벨론 포로지에서 다시 광야로 이끌어 내어 막대기 아래로 통과시키면서 언약의 줄로 묶는 것입니다. 마치 십일조의 짐승을 10번째 마다 표시하듯이 지금 언약으로 묶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원은 심판과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언약의 줄에 묶이는 자는 구원을 받는 것이지만 언약의 줄에 묶이지 않는 자는 심판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언약의 줄에 묶이는 것입니까? 사람으로는 방법이 없습니다. 짐승들이 선택받기 위하여 10번째로 들어가는 일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언약의 줄에 묶인 자들의 결과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 결과는 절대로 우상을 섬기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강한 팔과 큰 능력으로 다스리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우상을 따라 갈지라도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언약을 위하여 반드시 다스리시는데 그런 우상이 헛된 것임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언약만을 믿게 만드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을 받는 자는 어떤 모습입니까? 38-39절입니다. “봉독” 언약의 줄에 매어지지 아니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반역하고 범죄 하는 자를 모두 제하여 버린다고 합니다. 그들을 그 머물러 살던 땅에서 나오게 하여도 이스라엘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심으로 여호와인줄 알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제 1의 출애굽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39절입니다. 내 말을 듣지 아니하려거든 가서 각각 그 우상을 섬기라고 합니다. 이 후에 다시는 너희 예물과 너희 우상들로 거룩한 내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나 간에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 까지 자기라는 우상을 섬기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심판의 자리에서 구원받아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언약의 줄로 매임을 받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전혀 자기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매이는 것입니다. 마치 짐승들이 막대기 아래로 지나다가 십일조로 걸려드는 모양입니다. 이렇게 언약의 줄에 매인 자들은 자기 마음대로 우상을 섬길 수가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우상을 따라가면 그 우상이 깨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심판을 받는 사람은 우상을 따라 가는데 그 우상이 깨어지지도 않고 자기 자신도 깨어지지 않고 승승장구 하는 것입니다.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승승장구(乘勝長驅)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승리하는 곳에 올라타서 오래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권불십년(權不十年)이며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처럼 그렇게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렇게 오래가지 못할 것에 사람들마다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임금이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요16:11)을 모르고 세상의 영광을 위하여 달려가는 자가 바로 심판을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본문 40-44절입니다. “봉독” 광야에 몰아내셔서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구원과 심판의 기준은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닙니다. 만약 사람에게 달려있다고 한다면 단 한명도 구원에 이를 자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기 언약과 그 이름을 위하여 구원하시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우상을 섬기다가 깨어지는 자들입니다. 이제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높은 곳에서 여호와를 섬기게 됩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역시 여호와를 제대로 섬긴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고 제사가 회복되고 열심히 율법을 지켰지만 자기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고 자랑하였습니다. 그 결과 자기를 미워해야 생명을 얻는다(요12:25)는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언제 어떻게 성취가 되는 것입니까? 에스겔 36:31-32절을 봅니다. “봉독” ‘그때에’ 라는 것은 25-26절의 말씀대로 새 영을 부어주심으로만 됩니다. 새 영이 부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완성된 새 언약으로 부어집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의 행위를 미워하게 됩니다. 동시에 예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디도서 3:4-7절입니다.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러한 은혜와 소망이 우리에게도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