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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20:45-49 비유로 말하는 자 2012. 5. 2

 

45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46 인자야 너는 얼굴을 남으로 향하라 남으로 향하여 소리 내어 남쪽의 숲을 쳐서 예언하라 47 남쪽의 숲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너의 가운데에 불을 일으켜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 나무를 없애리니 맹렬한 불꽃이 꺼지지 아니하고 남에서 북까지 모든 얼굴이 그슬릴지라 48 혈기 있는 모든 자는 나 여호와가 그 불을 일으킨 줄을 알리니 그것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 49 내가 이르되 아하 주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비유로 말하는 자가 아니냐 하나이다 하니라

 

오늘 말씀은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을 일으키셔서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 나무를 없애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이런 말이 비유로 들리기에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에스겔을 향하여 비유로 말하는 자가 아니냐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듣는 에스겔 자신도 괴로운 것입니다. 49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내가 아뢰었다. "주 하나님, 그들은 저를 가리켜 말하기를 '모호한 비유나 들어서 말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비유로 말하는 자라는 의미와 그 비유인 불로 태우는 것에 대하여 보려고 합니다.

 

에스겔 20장에서는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우상 숭배한다는 것으로 고발합니다. 이것도 일종의 비유형식입니다. 하나님이 남편이 되시는데 그 남편을 배반하여 다른 것을 따라간 것이 바로 음행이며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에스겔을 향하여 비유를 말하는 자라고 한 것은 그들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여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유이긴 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러함에도 그런 비유가 자기들에게 못 마땅하기에 거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적으로 비유를 사용하시는 이유는 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듣게 하시고 알아듣지 말아야 할 사람은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골라내시는 한 방법입니다.

 

마태복음 13:10-17절을 봅니다. “봉독” 씨 뿌리는 비유를 듣고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지 묻자 거기에 대한 답변이 이 말씀입니다. 알아들을 자만 알아듣게 하시기 위한 조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비유를 깨닫는 사람은 복이 있는 자라고 하시면서 따로 비유를 설명하여 주십니다. 이 씨 뿌리는 비유는 좋은 밭이 되자고 하면 그것을 말도 되지 않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씨앗이 되셔서 길가와 같고 돌짝밭과 같고 가시덤불과 같은 우리의 마음에 열매를 맺고야 말겠다는 예수님의 뜻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은 이 비유를 거꾸로 해석합니다.

 

마태복음 21:45-46절입니다.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비유를 알아듣습니다. 이 비유가 무슨 비유였습니까? 악한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품꾼입니다. 그런데 소출을 제대로 바치지 않고 그 주인의 종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마지막에는 그 아들을 죽여 버렸다는 비유의 말씀을 하신 후에 그 주인이 이 농부를 어떻게 하겠느냐는 묻습니다. 그들이 답하기를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세를 제때에 바칠 다른 사람에게 준다고 답을 합니다.

 

이어서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자가 받는다고 하면서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고 그 돌이 사람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합니다. 이 비유가 바로 자기들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예수를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비유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알아듣고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심판받을 자를 심판받게 하시고 구원하실 자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비유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45-48절입니다. “봉독” 간단한 한 가지의 비유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합니다. 에스겔의 얼굴을 남쪽으로 향하여 남쪽의 숲을 쳐서 예언하라고 합니다. 남쪽의 숲에 여호와께서 불을 일으키시는데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 나무를 맹렬한 불로 태워서 없애버린다고 합니다. 물론 이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는 사람을 말합니다. 맹렬한 불꽃이 꺼지지 아니하고 남에서 북까지 모든 얼굴을 그슬리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여호와임을 알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를 다 태우신다고 합니다. 푸른 나무란 의인을 말하고 마른 나무는 악인을 말합니다. 그런데 모두다 태워버린다는 말은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롬3:10). 그러나 성경에서 종종 의인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들도 상대적인 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을 푸른 나무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3:31절입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이 말씀의 배경은 27-30절입니다.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예수님이 푸른 나무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예수님을 이렇게 대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른 나무는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이제 너희와 너희 자식을 위하여 울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날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그 날은 1차적으로는 예루살렘의 멸망입니다. 로마에 의하여 불과 칼로 멸망할 예루살렘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 날에는 아이가 없는 여자가 복되다고 하신 것은 자기 눈앞에 아이들이 죽임 당하는 것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이 날에 산들을 대하여 우리에게 무너지라고 할 정도로 두려운 멸망의 날인데 이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고 이제 요한 계시록에서는 전 세계적인 종말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6:12-17절입니다.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불의 심판에서 피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불의 심판을 십자가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피하는 것이 얼마나 크고 영원한 복인지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명백한 말씀을 모호한 비유라고 하면서 못 알아듣겠다고 하는 자들이 나오는가 하면 자기들만이 성경을 특별하게 계시를 받아서 비유로 풀 수 있다는 신천지도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다시 본문을 봅니다. 남쪽을 향하여 말하라고 하신 남쪽은 에스겔 21:2절을 보시면 예루살렘을 말씀합니다. 여기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칼로 심판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과 21장에서 칼로 심판하신다는 내용이 다 연결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불과 칼로 심판하신다는 말씀이신데 그 본문이 길어서 오늘은 불로서의 심판만 보고 다음 주에 칼로서의 심판을 보려고 합니다. 이 비유는 모호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들은 사람들은 에스겔을 향하여 비유로만 말하는 자라고 한 것은 너의 말을 듣기 싫다는 말입니다. 이들의 결국은 바벨론의 불과 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불로써의 심판 하시는 것을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보려고 합니다. 먼저 하나님 자신을 소멸하는 불이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4:24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나 이 소멸하는 불은 심판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도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4절입니다. “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그러므로 불이란 심판과 정화를 동시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1:1-3절에서는 여호와를 악한 말로 원망하였기에 그 진의 끝을 불살라 버리는 다베라 사건이 있습니다. 만약 오늘 우리의 원망에 하나님께 불로 심판하시면 이미 불에 다 살라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의 불을 예레미야 15:14절에서도 말씀합니다. “네 원수와 함께 네가 알지 못하는 땅에 이르게 하리니 이는 나의 진노의 맹렬한 불이 너희를 사르려 함이라” 여호와의 진노의 맹렬한 불이 너희를 사르려 한다고 하시는 말씀이 바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70년 만에 돌아오게 됩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심판과 정화가 함께 일어납니다.

 

스가랴 13:9절입니다. “9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스가랴 선지자가 또 예언을 합니다. 바로 앞의 말씀은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리라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인용하십니다. 온 땅의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서 던져 은 같이 연단하여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말라기 3:1-2절입니다. “봉독” 구약의 마지막 성경에서 언약의 사자가 와서 자기 백성을 금을 연단하듯이 불로 연단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든 예언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12:49절입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예수님께서 이 땅을 불을 던지려고 왔다고 합니다. 평행구절인 마태복음에서는 칼을 던지려고 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의 불과 칼의 심판이 구약에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과정을 통하여 보여주셨다면 이 모든 결론은 예수님께서 불과 칼로 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만사형통하고 행복하고 즐거운 것이 아니라 불과 같은 연단을 받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베드로전서 1:5-7절입니다.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지난주일 낮에 신령한 복의 말씀을 보면서 썩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늘의 기업을 보았습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은 자들은 이 세상에서 믿음의 시련을 당합니다. 그런 시련을 통하여 불로 연단된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이 나온다고 합니다. 금이란 불로 연단되었지만 결국은 닳아서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금보다 더 귀한 것이 신앙의 연단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보배로운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도에게 닥치는 여러 가지 시련으로 하여금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불과 같은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연단이 되지만 그렇지 아니한 자들은 마지막 불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제 이런 말씀은 비유가 아니라 실체로 나타날 때가 곧 올 것입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에 타듯이 그런 날이 온 세상에 임하게 될 날이 곧 옵니다.

 

베드로후서 3:8-14절입니다. “봉독” 불에 타 없어질 것들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지금 불같은 시련을 통하여 썩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나라를 받게 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믿고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