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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설교] [동영상 설교]

에스겔 21:1-32 칼의 노래 2012. 5. 9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며 성소를 향하여 소리 내어 이스라엘 땅에게 예언하라 3 이스라엘 땅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지라 4 내가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 터이므로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모든 육체를 남에서 북까지 치리니 5 모든 육체는 나 여호와가 내 칼을 칼집에서 빼낸 줄을 알지라 칼이 다시 꽂히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6 인자야 탄식하되 너는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7 그들이 네게 묻기를 네가 어찌하여 탄식하느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재앙이 다가온다는 소문 때문이니 각 마음이 녹으며 모든 손이 약하여지며 각 영이 쇠하며 모든 무릎이 물과 같이 약해지리라 보라 재앙이 오나니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32 네가 불에 섶과 같이 될 것이며 네 피가 나라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네가 다시 기억되지 못할 것이니 나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라 하라

 

오늘 본문의 말씀을 칼의 노래라고 합니다. 칼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시적으로 칼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9-11절이 칼의 노래입니다. 칼의 노래라고 하니 소설가 김훈씨의 ‘칼의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아주 많은 고전을 섭렵하면서 칼의 노래를 발표하였는데 많은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런 소설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순신에게 감정이입이 됩니다. 동시에 일본은 물리쳐야 할 대적이 됩니다. 때로는 일본보다 더 미운 적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이순신을 이간질 하는 정치세력들입니다. 어느 신학교수는 이런 이순신의 삶의 모습을 아주 극찬하였던 글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비추어보면 이순신이나 일본이나 이순신을 모함하는 세력이나 다 칼로 심판한다는 말씀이 됩니다. 이러한 말씀에 우리가 동의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주에 보았던 20:47절을 다시 봅니다. “남쪽의 숲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너의 가운데에 불을 일으켜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 나무를 없애리니 맹렬한 불꽃이 꺼지지 아니하고 남에서 북까지 모든 얼굴이 그슬릴지라”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나무를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을 일으키셔서 다 태우시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이 불 대신에 칼을 사용하십니다. 21:1-5절입니다. “봉독” 20:3절을 보시면 의인과 악인을 끊을 것이라고 합니다.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를 구별하지 않고 불에 태우시듯이 의인과 악인을 함께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칼을 칼집에서 빼어 모든 육체를 남에서 북까지 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칼이 다시 꽂히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를 통하여 모든 육체가 여호와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스겔에게 여호와께서 탄식하라고 합니다. 6-7절입니다. “봉독” 포로로 잡혀와 있는 그들 앞에서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고 합니다. 그들이 어찌하여 탄식하느냐고 물으면 소문 때문이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 소문이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그 내용은 칼로 심판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 심판의 소문으로 인하여 각 마음이 녹으며 모든 손이 약하여지며 각 영이 쇠하며 모든 무릎이 물과 같이 약해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 재앙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전합니다.

 

8-17절입니다. “봉독”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 빛나도다!’ 칼을 잘 갈아서 빛이 나는 칼이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 칼은 무엇을 위한 칼입니까? 죽임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고 합니다. 슬피 부르짖으라고 합니다. 이 칼이 내 백성과 고관에게 함께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인자가 예언하며 손뼉을 쳐서 칼로 두 번 세 번 쓰이게 하라고 합니다. 이 칼이 사람을 죽이기 위한 큰 칼이며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놓았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칼을 향하여 군대를 명령하듯이 대열을 맞추어 좌우를 치라고 합니다. 인자가 손뼉을 치면서 예언한 것처럼 여호와께서 손뼉을 치면서 분노를 푸신다고 합니다.

 

18-22절입니다. “봉독” 이 칼이 바벨론 왕의 칼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왕이 쳐들어오는 모습을 에스겔이 미리 연극으로 보여줍니다.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쳐들어오는 길을 그리고 예루살렘과 암몬족속의 랍바로 가는 길목에서 점을 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과 암몬이 함께 바벨론을 반역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 다 공격하려고 오는데 먼저 어디를 칠 것인지 삼거리에서 점을 치는 것입니다. 그 점을 치는 방법은 화살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제물의 간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으로 가는 점괘를 얻은 것입니다. 이런 점괘조차도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왕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오게 하시기 위하여 점괘를 맞추어주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점치듯이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가면 그들로 심판받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의 소원하는 바를 맞추어 줄 수도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가 여호와의 계시인양 아합에게 승리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합을 죽이려고 여호와께서 거짓말 하는 영을 보냈기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왕상22:22).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점치는 모습을 보고서 어떻게 생각하였겠습니까? 이것은 거짓 점괘라고 본 것입니다. 23절을 봅니다. 그들에게 맹약하였다는 것은 예루살렘의 왕이 바벨론 왕에게 충성하겠다고 맹세하고서는 배신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런 점괘를 거짓으로 여긴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점을 치는 것을 금지하셨기에 이들은 점을 치는 것을 거짓으로 보았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저것은 점괘이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여호와의 언약을 거역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언약을 배반할 때는 언제이고 이방나라가 자기들을 치기위하여 점을 치는 것을 보고서는 거짓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해석을 하면서 사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바벨론이라는 칼을 빼들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 왕과 맺은 맹약도 어겼기에 바벨론 왕은 자기들을 배반하였다고 예루살렘을 공격하지만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자신의 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24-27절입니다. “봉독” 여호와의 칼이 임한 것은 그들의 악과 허물과 죄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백성의 대표인 시드기야 왕입니다. 극악하여 중상을 당한 이스라엘 왕의 날이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 날이 곧 죄악의 마지막 때라고 합니다. 이러한 왕의 관을 제거하며 왕관을 벗기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라고 합니다. 시드기야 왕의 멸망의 모습을 말하면서 세 번이나 엎드러 뜨린다고 합니다. 세 번이란 완전하게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고 합니다. 전통적인 해석들은 여기서 메시아를 말하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문맥으로는 바벨론이 점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바벨론도 결국은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그 전에 암몬의 심판입니다.

 

28-29절입니다. “봉독” 암몬 족속도 죄악의 마지막 때를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암몬은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향하는 것을 보고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연기되었을 뿐입니다. 결국 이 암몬도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이들은 허무한 것을 보며 거짓 복술을 하는 자가 너를 중상 당한 악인의 목 위에 두라고 합니다. 이들이 평소에 믿었던 것들이 우상들이며 그들은 점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도 심판을 당합니다.

 

30-32절입니다. “봉독” 이 본문을 암몬과 연결하여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저는 바벨론으로 봅니다. 바벨론이 여호와의 칼이 되어서 심판을 집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심판이 집행되었기에 그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네가 지음 받은 곳, 출생한 곳에서 여호와가 심판하시겠다고 합니다. 바벨론이 완전히 심판당하여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도록 하시겠다고 합니다. 바벨론은 메데 바사 제국에 의하여 멸망당합니다. 이러한 바벨론의 멸망에 대하여 많은 선지자들이 예언하였고 그대로 되었습니다(사 13,14장, 렘50).

 

이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합니다. 고린도전서 10:11절입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한글 개역에서는 거울이라고 하였습니다. 에스겔서의 말씀도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을 통하여 우리에게 적용을 하자면 지금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향하여 푸른 나무나 마른 나무나, 의인이나 악인이나 간에 불과 칼로서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를 살펴봅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나타나는 불과 칼의 대한 말씀은 창세기 3:24절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의 일입니다.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길을 차단하기 위하여 천사들과 두로 도는 불 칼이 막고 있습니다. 성경 최초로 나타난 불과 칼이란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성경 전체에서 불과 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언약을 주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민수기 32:41절입니다. “내가 내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이 정의를 붙들고 내 대적들에게 복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할 것이라” 출애굽과 광야 40년을 통하여 여호와가 어떤 분이심을 알게 하시고 나서 여호와께서 번쩍이는 칼을 가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대적들에게 복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대적들이 누구입니까? 여호수아 5:13-15절입니다. “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14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여호수아는 여호와가 무조건 자기 편 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군대 장관은 여호수아의 편이 아니라 여호와의 편이기에 그렇게 말하는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너는 여호와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말씀이 이러한데도 주객전도가 일어나면 그것이 여호와의 원수입니다.

 

예레미야 23:29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여호와의 말씀이 불이며 바위를 부수는 방망이 같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는다는 것은 지금 그 불에 태워지는 것이며 그 방망이에 깨어지는 것이며 그 칼에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찔림을 받아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갑니다. 이런 자들은 창세전에 택함을 입은 자들의 반응이지만 택함을 입지 않았다면 찔림을 받고서는 복음을 배척합니다.

 

스가랴 13:7-9절입니다.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8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9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칼이 목자를 친다는 이 말씀의 성취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일어납니다(마26:31). 제자들이 다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십니다. 그 제자들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십니다. 그때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이것이 언약의 목표입니다.

 

히브리서 4:12-13절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불과 칼을 받으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가 벌거벗은 듯이 드러납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우리는 칼의 노래를 들으면서 우리 대신에 칼을 받으신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