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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설교] [동영상 설교]

에스겔 23:1-49 오홀라와 오홀리바 2012. 5. 23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두 여인이 있었으니 한 어머니의 딸이라 3 그들이 애굽에서 행음하되 어렸을 때에 행음하여 그들의 유방이 눌리며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나니 4 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 .............................. 48 이같이 내가 이 땅에서 음란을 그치게 한즉 모든 여인이 정신이 깨어 너희 음행을 본받지 아니하리라 49 그들이 너희 음란으로 너희에게 보응한즉 너희가 모든 우상을 위하던 죄를 담당할지라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시니라

 

에스겔 16장과 함께 에스겔 23장은 미성년자 관람불가를 붙여할 정도의 성적인 표현들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성적인 비유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지 못한 것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20장에서 보았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부터 음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내로 삼아 출애굽을 시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남편 되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애굽과 앗수르와 바벨론을 번갈아가면서 의지하였기에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하였습니다. 이것을 보고서도 남 유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우상숭배를 하였기에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하였다는 내용이 23장의 말씀입니다.

 

에스겔 23:1-4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합니다. 두 여인이 있었는데 한 어머니의 딸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행음하되 어렸을 때에 행음하여 그들의 유방이 눌리며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 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애굽에서 나올 마음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세상에 정붙이고 살기에 떠나기 싫다는 것이 음행입니다. 그 이름이 형이 오홀라요 동생의 이름이 오홀리바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히브리어로 장막 또는 회막 이라는 ‘오헬’이 들어가는 말로서 오홀라는 ‘그녀의 장막’ 오홀리바는 ‘나의 장막이 그녀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결혼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창세기 24:67절입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이삭이 리브가를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인다는 것은 그를 아내로 맞은 것입니다. 또한 이 단어는 단지 사람이 사는 장막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회막과 성막이라는 단어에도 함께 쓰이는 것이 오헬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결혼한 사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남 북으로 나뉘어 졌기에 언니와 동생으로 표현하면서 오홀라와 오홀리바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23:5-10절입니다. “봉독” 오홀라 곧 북 이스라엘의 음행을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오홀라가 여호와께 속하였을 때에 행음하였다고 합니다. 여호와께 속하였다는 것이 결혼한 아내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앗수르를 의지하는 정치적인 선택이 여호와께 간음하는 것이 됩니다. 신랑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는데 앗수르가 얼마나 멋있어 보이는지 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고 고관과 감독이며 준수한 청년이며 말 타는 자들이며 잘 생겼습니다. 그들과 행음을 하고 그들의 모든 우상들로 자신을 더럽혔습니다. 고대의 정치적인 결탁으로 주종관계를 맺으면 그들의 우상도 함께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버릇이 애굽에서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들은 앗수르 사람들에게 넘겨버렸습니다. 그들의 하체가 드러나고 그들의 자녀가 빼앗기고 칼에 죽임을 당하고 여인들에게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에스겔 23:11-21절입니다. “봉독” 이러한 심판을 당하는 것을 동생이 보았다면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오히려 그의 언니보다 음욕을 더하였다고 합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하는 것을 보았다면 앗수르를 경계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앗수르와 연애를 한 것입니다. 앗수르의 힘과 능력을 의지한 것입니다. 두 여인이 한 길로 행하므로 유다도 더러워졌습니다. 유다는 앗수르만 의지한 것이 아니라 바벨론도 의지하였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을 사랑하여 사절을 보냈습니다. 여호와만 계셔야 할 자기 장막에 간부(姦夫)를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간부가 그러하듯이 연애하고 나면 마음이 돌아서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유다에 와서 약탈하고서는 유다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빼 먹을 것이 없는데 보호하여 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싫어하였다는 것이 17절의 말씀입니다. 이런 유다를 하나님께서도 싫어하십니다. 북 이스라엘을 앗수르에 넘겨 심판하게 하시듯이 남 유다를 바벨론에 넘겨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애굽에 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내셨는데 그 애굽 때의 일을 수치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애굽 때의 행음을 아직도 생각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23:22-27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은 자신의 신실한 언약을 생각하시는데 이스라엘은 기어코 옛날의 행음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지금도 여전히 여호와 외에 다른 것들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들을 심판하십니다. 22절을 보시면 네가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을 충동하여 그들이 사방에서 너를 치러 올 것이라고 합니다. 남 유다의 마지막 왕이 바벨론을 배반하고 애굽을 의지하였습니다. 이러므로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그들의 법대로 심판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여호와께서 질투하셔서 바벨론의 손에 넘기신 것입니다. 그러자 바벨론은 자신의 법대로 재판합니다.

 

25절을 봅니다. 바벨론이 자신들의 법대로 재판하는 것은 코와 귀를 칼로 깎아버리는 것입니다. 이 법이 최근에도 유지되고 있는 곳이 옛날 바벨론 사람들이 살던 곳입니다. 2010년도 타임지 표지 인물에 젊은 이슬람 여성인데 코가 베어진 사진이 실렸습니다. 며칠 전에 이 여인의 코가 복원수술 되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이 여인의 이름이 아이샤 인데 아프간 여인입니다. 18살 때에 남편과 시댁식구들의 학대를 못 견뎌 친정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이 여인을 잡아와서 재판을 하는데 그 지역의 탈레반 사령관이 재판관이 되어서 다른 여인들이 그런 짓을 못하도록 귀와 코를 칼로 베어버리게 하였습니다. 간음 한 것도 아닌데 그런 처벌을 하고 죽도록 버려두었습니다. 그 여인을 미군이 몰래 구하여 비밀리에 미국으로 데려와 치료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가지고 미군은 선이고 탈레반은 악이라는 구도를 만들기도 합니다만 둘 다 똑 같습니다. 미군이 탈레반 포로들을 학대한 사진들도 몇 번이나 보도가 되었습니다. 귀와 코를 베었다고 하니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조선 군인들과 민간인들을 죽이고 그 성과를 보고하기 위하여 코와 귀를 베어간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신격화 한 신사 옆에 12만 6천명의 귀와 코를 베어간 무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잔인한 만행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가요? 월남전에 파병한 군인들의 용감한 전투소식만 보도되었지 그들의 만행은 숨겨졌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 세상이 지옥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심판을 하십니까? 25-27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코가 베어지고 귀가 베어지고 자녀를 빼앗기고 그 남은 자는 불에 살라지고 옷을 벗기고 장식품을 빼앗깁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애굽 땅에서부터 행음하던 것을 그치게 하여 너로 그들을 향하여 눈을 들지도 못하게 하며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도 못하게 하리라고 합니다. 코와 귀가 잘린 여인이 다른 남자를 쳐다볼 수도 없지요! 누가 이렇게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판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심판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다른 남편을 쳐다보지 못하게 하시기 위한 지극한 사랑입니다.

 

28-35절입니다. “봉독” 오홀라가 마신 잔을 오홀리바도 마시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잔입니다. 이렇게 심판을 행하시는 것은 여호와를 잊었고 여호와를 등 뒤에 버렸다고 합니다. 즉 배신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그 음란과 음행의 죄를 담당하라고 합니다.

 

36-42절입니다. “봉독” 우상숭배만 한 것이 아니라 혼합종교가 되었습니다. 한 날에 우상을 위하여 남편 되신 여호와께 낳아드린 자녀를 우상의 제물로 바치고 또 성소에 들어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소와 안식일을 더럽힌 것입니다. 이것이 혼합종교가 된 것입니다. 사절을 먼 곳에서 불러와서 그들을 환대하였습니다. 그들을 대접하기 위하여 화장을 하고 화려한 자리에 앉아 상을 차리고 하나님의 향과 기름을 그 위에 놓고 즐긴 것입니다. 온갖 이방의 우상들을 수입하여 섬겼습니다.

 

43-49절입니다. “봉독” 이렇게 음란하여 간통이 습관이 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로우신 남편에게 재판을 당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간통한 여인이며 또 피가 손에 묻은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과 정치적인 동맹을 맺으며 그런 나라들에게 조공을 바친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더욱 착취하였습니다. 이러한 나라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데 한 때 의지하였던 바벨론을 통하여 심판하십니다. 돌로 치며 칼로 죽이고 자녀도 죽이고 집들도 불살라 버립니다. 이같이 이 땅에서 음란을 그치게 한 즉 모든 여인이 정신이 깨어 너희 음행을 본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모든 우상을 위하던 죄를 담당할 찌라고 합니다. 이 말씀대로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이렇게 하심을 통하여 여호와임을 알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완전히 멸망시켜버리면 여호와의 언약이 파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의 형벌의 날을 70년으로 정하셨다고 전하였습니다. 그 때가 차면 다시 돌아오게 하십니다. 때가 되어 돌아온 그들이 어떤 모습을 보였습니까?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왜 이렇게 멸망하였는지를 돌아보니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자는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리새파 운동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율법을 철저히 지키자는 자들조차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을 지키는 그들이 또 다른 음행을 하는 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말은 율법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믿게 하는 것인데 율법을 지킨다는 자기들의 의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에 이것이 우상숭배인 간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49절을 봅니다. 너희가 모든 우상을 위하던 죄를 담당할지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그 우상숭배의 죄를 담당하여 포로로 잡혀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습니다. 그곳에서도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포로에서 돌아와서 율법을 지킨다고 하였지만 이것도 역시 음행의 다른 모습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직접 담당하여야 한다면 단 한명도 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어느 한명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킬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창세전 언약을 완성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셔서 모든 율법을 그 뜻과 의미에서 까지 완벽하게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예수님께 대신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의 말씀처럼 그는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대신 심판을 당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심판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8:1-11절입니다. “봉독”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입니다. 모세 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고소할 거리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이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합니다. 그러자 어른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가 다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묻습니다. 누가 너를 정죄하느냐? 아무도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 여인의 정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셨기에 예수님을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 정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간음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겠지만 더 궁극적인 것은 예수님의 용서 안에 계속하여 거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6:9-11절입니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전에는 이런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이런 자들이 성도입니다. 이 몸으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