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deo streaming by Ustream

[음성 설교] [동영상 설교]

에스겔 24:1-14 녹슨 가마 2012. 5. 30

 

1 아홉째 해 열째 달 열째 날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날짜 곧 오늘의 이름을 기록하라 바벨론 왕이 오늘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느니라 3 너는 이 반역하는 족속에게 비유를 베풀어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가마 하나를 걸라 4-5 건 후에 물을 붓고 양 떼에서 한 마리를 골라 각을 뜨고 그 넓적다리와 어깨 고기의 모든 좋은 덩이를 그 가운데에 모아 넣으며 고른 뼈를 가득히 담고 그 뼈를 위하여 가마 밑에 나무를 쌓아 넣고 잘 삶되 가마 속의 뼈가 무르도록 삶을지어다 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피를 흘린 성읍, 녹슨 가마 곧 그 속의 녹을 없이하지 아니한 가마여 화 있을진저 제비 뽑을 것도 없이 그 덩이를 하나하나 꺼낼지어다................... 14 나 여호와가 말하였은즉 그 일이 이루어질지라 내가 돌이키지도 아니하고 아끼지도 아니하며 뉘우치지도 아니하고 행하리니 그들이 네 모든 행위대로 너를 재판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루살렘 성읍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말씀이 24장을 통하여 마무리됩니다. 25장부터는 예루살렘 주변의 이방 나라들을 향한 심판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성읍을 녹슨 가마로 비유하면서 그 죄악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가지 비유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말씀합니다. 때로는 음식을 가지고 비유합니다.

 

호세아 7:8절입니다.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북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늘 우상 숭배를 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이 빵을 굽기 위하여 벌겋게 달아오른 화덕과 같다고 합니다. 음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잠시 불을 때지 않는 경우는 반죽이 발효되기까지 기다릴 뿐이라고 합니다. 이런 음란은 여호와를 배반하고 우상숭배를 한 것도 되지만 주변의 강대국을 의지한 것도 됩니다. 이렇게 온갖 주변나라에 혼합이 되어버린 것을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고 합니다. 밀가루 반죽으로 떡을 만드는데 뒤집지 않으면 밑에는 타 버리고 위에는 생 밀가루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에브라임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하였으면 남 유다는 정신을 차려야 함에도 그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지난주에 본 오홀라와 오홀리바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봅니다. 아홉째 해 열째 달 열째 날이라고 합니다. 이 날은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른 날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눈앞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을 여호야긴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온지 9년 10월 10일째로 봅니다. 이 날을 기원전으로 계산하면 588년 1월 15일로 봅니다. 어떤 계산은 몇 년의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만 이것은 한해를 계산하는 것의 방법적인 문제로 봅니다. 에스겔에게 이 날을 기록하라고 하신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하게 일어남을 보여줍니다.

 

3~4절입니다. 이 반역하는 족속에게 비유를 베풀라고 합니다. 그 비유는 가마 하나를 걸라고 합니다. 가마를 건 후에 물을 붓고 양 떼에서 한 마리를 끌어와서 각을 뜨고 그 넓적다리와 어깨 고기의 모든 좋은 덩이를 그 가운데에 모아 넣고 고른 뼈를 가득히 담고 그 뼈를 위하여 가마 밑에 나무를 쌓아 넣고 잘 삶되 가마 속의 뼈가 무르도록 삶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비유로 말씀만 하기보다는 지금까지 에스겔이 몸과 행위로 보여주었듯이 직접 이렇게 시연해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만 보면 마치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난 후에 남은 고기를 삶아서 백성들이 나누어 먹기 위한 모습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고기를 삶아서 먹는 것은 성경에 많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유월절 양도 잡아서 피를 뿌린 후에 불에 구워서 먹으라고 합니다(출12:9). 그런데 제사장의 위임 식 때에는 제물을 드린 후에 제사장들이 고기를 삶아서 먹습니다(레8:31).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가장 유월절을 잘 지킨 왕이 요시야 왕입니다. 요시야 왕은 유월절 양을 번제로 드린 후에 다른 성물을 삶아서 백성들에게 나누었습니다(대하 35:13).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드린 후에 고기를 가마솥에 넣어서 삶아먹습니다. 에스겔의 이 비유를 통하여 포로로 잡혀온 자들은 또다시 일말의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아주시고 우리는 그 고기를 삶아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심판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6~8절을 봅니다. “봉독” 그 가마를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이 피를 흘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피를 흘린 성읍 예루살렘이 녹슨 가마라고 합니다. 녹슨 가마에서 삶아진 고기를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좋은 고기들을 제비뽑을 것도 없이 그 덩이를 하나하나 꺼내라고 합니다. 제비 뽑을 것도 없다는 것은 솥 안에 제거하지 않은 녹으로 인하여 전혀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되었기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별 없이 하나하나 다 꺼내어 심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피를 흘린 성읍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피를 흘린 성읍이란 권세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사욕을 위하여 약한 자들의 피를 흘린 것입니다. 또한 이런 죄를 고발하는 선지자들의 피를 흘린 것입니다. 이런 피를 땅에 쏟아놓고 덮지도 않고 맨 바위위에 두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먹기 위하여 잡은 짐승의 피라도 덮어야 합니다(레17:13). 약속의 땅은 피를 흘리면 그 땅이 더럽게 되는 것입니다(민35:33). 그런데 사람의 피를 맨 바위위에 두었다는 말은 사람의 피를 흘리고서도 아주 당당하게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읍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 피를 맨 바위위에 두고 덮이지 않게 하심은 하나님의 분노를 나타내어 보응하신다고 합니다.

 

이런 가마에 대한 이야기는 에스겔 11장에서 나왔습니다. 예루살렘 성읍은 안전한 가마로 보고 그 안에 자기들은 고기가 된다고 한 것입니다(겔11:3). 그러나 그 성읍 안에서 많이 죽여 시체로 채웠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피를 흘린 성읍이라서 그 가마로 여긴 성읍에서 끌려 나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같은 비유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의 해석과 하나님의 해석이 다른 것입니다. 이런 가마와 고기의 비유를 미가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죄악을 그대로 고발하는데 사용합니다.

 

미가 3:1-3절입니다. “1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2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3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이런 모습을 5절에서 이렇게 고발합니다. “5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선지자가 무당이 되어버렸습니다. 복채를 많이 바치면 어떠한 저주도 없애주고 복을 주겠다고 합니다.

 

10~12절을 봅니다. “10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11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12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예루살렘이 피와 죄악을 건설되었다는 것이 오늘 이 땅의 현실이며 교회의 현실이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 정성을 바치면 나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무당 푸닥거리 같은 짓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은 시온, 그 예루살렘이 이렇게 피와 죄로 채워진 성읍이 되었습니다. 이 예루살렘이 바로 녹슨 가마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깊이 녹이 쓸었는지 출애굽 하여 가나안에 정착하여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면서도 이미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였습니다. 제사를 멸시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희생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런 희생의 제사를 멸시 한 것은 하나님의 희생을 발로 밟아버린 행위가 됩니다. 

 

사무엘상 2:12~17절입니다. “봉독” 제사 드린 후에 고기를 삶고 있으면 제사장의 사환이 갈고리로 가져와서 찍어서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지금 에스겔서에서는 심판의 상징이 됩니다. 그리고 심지어 여호와께서 기름을 태우는 제사를 드리기도 전에 제사장에게 구워드릴 고기를 내라고 한 것입니다. 제사 드린 후에 삶아서 함께 먹는데 이렇게 삶아 먹는 것이 싫다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도 전에 제물을 빼앗아 갔으니 이 소년들의 죄가 심히 큼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그 근본부터 녹이 쓴 가마입니다.

 

에스겔 24:9~12절입니다. “봉독” 이런 성읍을 향한 말씀이 ‘화 있을 진저’입니다. 피를 흘린 성읍에 대한 심판을 위하여 예루살렘이라는 가마 솥 밑에 나무를 많이 쌓습니다. 이것은 바벨론의 많은 군대가 에워싸고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마솥에 불을 피우듯이 바벨론이 포위하여 공격을 하는데 무려 18개월을 포위하여 공격하니 안전하여 가마와 같다고 생각한 그 예루살렘 성읍이 지옥의 도가니가 됩니다. 계속하여 불을 세게 피워 고기를 삶아 녹이고 국물을 조리고 그 뼈를 태웁니다. 그 가마가 빈 후에 숯불위에 놓아 뜨겁게 하며 그 가마의 놋을 달궈서 그 속에 더러운 것을 녹게 하며 녹이 소멸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성읍이 수고하므로 스스로 피곤하나 많은 녹이 그 속에서 벗겨지지 아니하며 불에서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다가 제가 어릴 때에 저의 아버지께서 무쇠 솥을 불에 달구는 모습이 생각이 났습니다. 소죽을 끓이는 커다란 무쇠 솥을 시장에서 사와서 바로 아궁이에 걸지 않고 마당에서 며칠을 불에 달구는 것입니다. 막대기를 세워서 솥을 거꾸로 놓고는 그 밑에서 은근한 잿불을 며칠 동안 피웠습니다. 지금 추정하건데 그렇게 함으로 무쇠 솥의 독을 없앤 것으로 보입니다. 무쇠를 주물로 부어 솥을 만들면 그 안에 얼마나 강한 독성이 남아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소를 먹이기 위한 무쇠 솥을 불로 연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려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근원부터 녹이 쓸었다는 것입니다. 이 녹은 단지 쇠에서 일어나는 벌건 부식정도가 아닙니다. 11절을 보시면 그 가마가 놋으로 되어 있습니다. 놋으로 된 가마에 녹이 쓸었다는 것은 푸른 녹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금속의 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죄악을 말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인데 하나는 6절에서 피를 흘린 성읍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13절에서 음란입니다.

 

13~14절을 봅니다. 너의 더러운 것들 중에 음란이 그 하나라고 합니다. 설교 시작 부분에서 호세아서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음란한지 늘 불에 벌겋게 달아있는 화덕과 같다고 합니다. 이 음란을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려고 하나 깨끗하여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미 에스겔 16장과 에스겔 22장과 23장을 통하여 어떻게 음란한지를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분노를 예루살렘에 풀기 전에는 네 더러움이 다시 깨끗하여 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기에 반드시 심판하신다고 하십니다. 그 결과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입니다. 가마솥에 불을 붙여서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다 태우십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예루살렘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에 잡혀간 지 70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심판을 받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다시는 피를 흘리거나 음란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노력하였습니다. 피를 흘리지 않으려고 음란하지 않으려고 율법을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지켰는지 율법만이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들과 율법을 지키기 위한 구체적인 세목들까지 만들어서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누구의 피를 흘렸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흘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기 백성들의 그 벗겨지지 아니하는 더러운 녹을 제거하실 수가 있습니까?

 

로마서 11:36절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모든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졌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모델로 시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물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이 그 가마솥의 녹처럼 피 흘림과 음란이었습니다. 음란이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려고 하니 피를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통하여 모든 인간이 불순종 아래 갇혔을 알게 하시고 오직 긍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김입니다. 그 긍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나타났습니다.

 

베드로 전서 1:18~25절을 봅니다. “봉독”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이 피 흘림과 음란이 대표적으로 포함되는 죄들입니다. 이런 더러움에서 깨끗해지는 길은 금이나 은이 아닙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보배로운 피로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소식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를 붙들고 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