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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설교] [동영상 설교]

에스겔 24:15- 27 빼앗김 2012. 6. 6

 

15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6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17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 18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말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19 백성이 내게 이르되 네가 행하는 이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너는 우리에게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므로 20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1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성소는 너희 세력의 영광이요 너희 눈의 기쁨이요 너희 마음에 아낌이 되거니와 내가 더럽힐 것이며 너희의 버려 둔 자녀를 칼에 엎드러지게 할지라................. 24 이같이 에스겔이 너희에게 표징이 되리니 그가 행한 대로 너희가 다 행할지라 이 일이 이루어지면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25 인자야 내가 그 힘과 그 즐거워하는 영광과 그 눈이 기뻐하는 것과 그 마음이 간절하게 생각하는 자녀를 데려가는 날 26 곧 그 날에 도피한 자가 네게 나와서 네 귀에 그 일을 들려주지 아니하겠느냐 27 그 날에 네 입이 열려서 도피한 자에게 말하고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너는 그들에게 표징이 되고 그들은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사람이 죽었는데 슬픔을 표시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죽음이 너무 엄청난 사건이라서 넋 나간 사람처럼 망연자실(茫然自失)한 경우일 것입니다. 아니면 전쟁이나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슬퍼할 수도 없는 급박한 상황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에스겔 선지자는 하루 전에 자기 아내가 죽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죽은 아내를 위하여 어떤 슬픔의 표시를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서 이 말씀을 전하고 저녁에 집에 들어오니 아내가 죽었습니다.

 

15~18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하시는데 에스겔의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라고 하십니다. 에스겔의 눈에 기뻐하는 것은 그의 아내입니다. 다른 번역은 ‘너의 가장 귀한 보물’이라고 합니다. 에스겔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의 아내는 선별기준이 까다롭습니다. 레위기 21장을 보시면 제사장의 아내는 이혼당한 여자도 안 되고 부정한 여인도 안 되고 처녀라야 합니다. 에스겔의 아내는 이러한 조건이 갖추어진 여인이었습니다. 제사장 집안에 시집가는 것은 존경받는 집안에 시집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서 남편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오게 되었습니다.

 

포로로 잡혀 와서 에스겔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그때부터 에스겔과 그의 아내는 고난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에스겔 1장에서 오늘 보는 24장까지 에스겔은 수많은 상징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이 너무나 기이해 보였기에 사람들은 에스겔을 조롱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포위되는 것을 아이들이 전쟁놀이 하는 것처럼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양식과 물을 저울로 달아서 먹어야 하고 쇠똥으로 떡을 구워서 먹게 합니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서 불에 태우고 칼로 치고 바람에 흩어버립니다. 이러한 에스겔의 행동과 말들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조롱을 받았습니다. 이런 에스겔을 유일하게 위로하고 사랑한 사람이 바로 에스겔의 아내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의 눈에 기뻐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내를 하나님께서 빼앗아 간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에스겔에서 임하고서부터 이런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은 선지자들의 공통적인 모습입니다. 모세조차 내가 이 백성들을 낳았습니까? 할 정도로 힘들어 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다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하면 속에서 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아모스에게 사람들이 예언하지 말라고 하니 아모스는 사자가 부르짖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고 합니다. 모두가 부득불 전하게 되었습니다.

 

에스겔의 사역에 다른 사람들은 조롱하여도 아내는 함께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의 눈에 아내는 기쁨이었습니다. 가장 소중한 보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아내를 빼앗아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죽음을 인하여 슬픔의 표시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에 머리를 풀고, 신발을 벗고, 슬피 통곡하며 입술을 가립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부의음식을 해오면 그것을 먹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사랑하고 자기 눈의 기쁨이 되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이런 슬픔의 표를 못하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이 말씀대로 에스겔이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19~21절을 봅니다. 에스겔의 이러한 상징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사람들이 묻습니다. 이에 에스겔이 주 여호와의 대답을 그들에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성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광이요 그들의 눈의 기쁨이며 너희의 마음에 아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더럽힐 것이며 너희의 버려둔 자녀를 칼에 엎드려지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에스겔의 아내의 죽음과 그 죽음에 대한 슬픔을 표하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여집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께서 파괴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성중에 남아있는 그들의 자녀들도 함께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광과 기쁨이라고 생각하고 그 마음에 아끼는 예루살렘을 우상의 전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8장에서 이미 보았습니다(겔8:5~18). 하나님의 성전 안에 온갖 우상숭배가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의 영광이며 기쁨이며 그 마음에 아낌이 된다는 것은 결국 우상을 그들의 영광으로 삼고 우상이 그들의 기쁨이며 우상이 그들의 마음의 아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우상을 하나님께서 파괴하여 버리심을 통하여 그들의 아끼는 것을 빼앗아 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그들의 자녀들조차 함께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22~24절입니다. 에스겔이 자기가 아끼는 아내를 하나님께서 빼앗아 갔을 때에 전혀 슬픔을 표하지 못한 것처럼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자들이든지 아직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들이든지 간에 슬픔을 표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초상을 제대로 치르고 장례의 절차를 따르는 것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때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 성이 무너지고 적들이 쳐들어와 칼로 죽이고 성이 불에 타는 상황에서는 장례치를 틈도 없습니다. 그래서 죄악 중에 패망하여 피차 바라보고 탄식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에스겔을 통하여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그대로 이루어짐으로 이렇게 말한 분이 여호와인줄 알 것이라고 합니다.

 

25~27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지만 마지막 희망으로 여기며 그들의 힘이요 그들이 즐거워하고 그 눈이 기뻐하는 성전을 파괴하시고 그들의 마음에 간절하게 생각하는 자녀를 데려가신다고 합니다. 그들이 기뻐하는 것이 성전과 자녀였는데 이 둘을 다 하나님께서 빼앗아 가 버린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우상숭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멸망의 소식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에 도피한 자가 에스겔에게 와서 알려 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에스겔의 입이 열려서 도피한 자에게 말하고 다시는 잠잠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에스겔 33:21~22절을 봅니다. “21 우리가 사로잡힌 지 열두째 해 열째 달 다섯째 날에 예루살렘에서부터 도망하여 온 자가 내게 나아와 말하기를 그 성이 함락되었다 하였는데 22 그 도망한 자가 내게 나아오기 전날 저녁에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내 입을 여시더니 다음 아침 그 사람이 내게 나아올 그 때에 내 입이 열리기로 내가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였노라”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온 지 12년 만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렇게 하심을 통하여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서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그들의 영광이며 그들의 기쁨이라고 여긴 성전이 파괴된 것과 그들의 자녀의 죽음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에스겔을 통하여 미리 보여준 상징들이 이제는 성취가 됨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시고 이루어내신 분이 여호와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에스겔은 그동안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 될 것이라고 여호와의 말씀을 무수히 대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리가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는 한 예루살렘은 망하지 않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이미 우상의 신전이 되었고 제물은 우상에게 바치는 이방의 제의가 되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곳을 파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뜻을 에스겔의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를 위하여 애곡하지 못하게 하심을 통하여 또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을 보고서라도 잘못된 성전신앙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기쁨과 영광이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당 바로 앞의 풍성한 교회가 이사를 갔습니다. 안민동에 제법 잘 지어진 예배당을 구입하여 갔습니다. 몇 개월 전부터 안민동의 교회당 건물을 판다는 광고가 경남기독신문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신문에 풍성한 교회가 이곳에 입당하였다고 신문 하단에 칼라로 커다란 광고사진이 나왔습니다. 그동안 불법건물이라고 시청에서 벌금이 나왔습니다. 주변에서 민원이 들어간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제는 잘 지어진 건물을 구입하여 이사를 갔으니 그들의 눈에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당 건물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우리의 눈에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모양이든 저 모양이든 우리가 기뻐하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뻐하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빼앗아 가 버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욥의 반응은 주신이도 하나님이시며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복도 주신 분이 화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이런 신앙에 친구들이 인과율로 시비를 걸자 억울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에 그는 자기의 말을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 회개한다고 하였습니다. 에스겔은 그 눈에 기쁨이었던 아내를 빼앗기고도 슬픔을 표할 수 없었습니다. 벙어리 되게 하셔서 항의조차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길이 구원의 길입니다.

 

선지자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결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기 위하여 십자가로 가시는 길에 아무 말 없이 끌려가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53:7절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빌라도 앞에서 다른 변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가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버림받는 순간에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셨지만 하나님은 응답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버림받음을 통하여 이제는 빼앗는 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고 하늘 보좌에 등극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분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이제 무엇을 행하시는 것입니까? 누가복음 11:21-22절입니다. “2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일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제 이 일을 성령을 보내셔서 이루어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권세와 힘에 속하여 있던 자들을 주님께서 빼앗아 내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이 세상에서 주님에게로 빼앗겨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도 주님께 빼앗기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좋지만 우리의 소유를 빼앗기는 것을 싫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도 재물도 무엇이나 간에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빼앗아 갑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왔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주님께 빼앗기는 것이 구원입니다.

 

히브리서 10:32~39절을 봅니다. “봉독” 34절입니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세상이 볼 때에 세상에 빼앗기는 것처럼 보여도 이것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우리는 우리의 소유를 늘리기 위하여 기도하는데 자기의 소유를 빼앗기는 것을 기쁨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불가능해 보이는 이런 일이 지금도 간혹 일어나고 있는 것은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빼앗아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은 주의 백성들에게 반드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놀라지 말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귀하다고 아끼는 것들을 빼앗기는 재미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