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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설교] [동영상 설교]

에스겔 26:1~27:36 두로의 심판 2012. 6. 27

 

1 열한째 해 어느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르기를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 3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두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여 바다가 그 파도를 굽이치게 함 같이 여러 민족들이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4 그들이 두로의 성벽을 무너뜨리며 그 망대를 헐 것이요 나도 티끌을 그 위에서 쓸어 버려 맨 바위가 되게 하며 5 바다 가운데에 그물 치는 곳이 되게 하리니 내가 말하였음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가 이방의 노략거리가 될 것이요 6 들에 있는 그의 딸들은 칼에 죽으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두로가 받을 심판의 내용이 26장에서 28장까지 나옵니다. 전에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약 2천 5백 년 전의 이런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계시하셨으며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계시하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을 가지고 성경을 봅니다. 그러면 성경의 한 구절을 통하여 전체를 볼 수가 있고 전체를 통하여 또 한 구절을 보게 됩니다. 두로가 받은 심판의 원인과 그 결과들을 보면서 이 세상 전체의 심판과 멸망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래전의 두로의 이야기는 바로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에스겔 26:1~2절입니다. 여호야김이 사로 잡혀 온지 11째 달 어느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두로가 심판을 받는 직접적인 이유는 단 한절입니다. 2절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서 좋아한 것입니다. 두로는 바다의 무역을 주로 담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육지 무역의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문이 깨어져 버림으로 이제 자신들이 모든 무역을 관장할 수 있겠다고 좋아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역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주도권도 두로가 가지게 되기에 좋아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심판을 당합니다. 다음 주에 볼 28장에서 두로 왕에 대한 애가를 보면 심판을 받는 구체적인 이유들이 나옵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그러나 두로의 직접적인 심판의 이유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뻐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읍입니다. 그곳에 성전이 있습니다. 이런 성전이 있는 곳이 멸망을 하였다면 온 세상이 다 멸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 회개하여야 하는데 그 멸망에 이익을 챙기려고 하고 있기에 주변의 나라들이 다 심판을 받습니다. 오늘날로 말씀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 회개하여야 하는데 십자가 이야기 하면서 종교적인 거래를 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기 19:5~6절입니다.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온 세계가 다 여호와께 속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심판을 당한다면 다른 온 세계도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에스겔 26:3~6절입니다. 두로는 예루살렘의 북서쪽 해변에 위치한 바위로 된 섬에 성읍이 있습니다. 이곳은 해상무역이 활발한 곳으로 두로와 무역하는 지명만 20곳이 넘습니다. 그리고 무역의 물품들은 온갖 귀중품과 사치품을 포함하여 수십 종류가 됩니다. 그러므로 무역으로 번성한 성읍입니다. 이뿐 아니라 천연적인 요새로 적들이 함부로 공격할 수도 없는 그런 성읍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니 성벽이 무너지고 망대가 무너집니다. 그 위의 티끌을 쓸어버려 맨 바위가 되게 하십니다. 그 유명한 성읍이 그물 치는 곳이 되며 이방의 노략거리가 되고 들에 있는 그의 딸들은 칼에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반석위의 성읍이 맨 바위가 되도록 심판하심을 통하여 그들이 여호와가 어떤 분이심을 알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도대체 여호와가 누구신데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 좋아했다고 해서 이렇게 모질게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까? 두로가 무역하여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나라를 잔인하게 정복하여 부요한 성읍이 된 것도 아닙니다. 무역으로 부요한 성읍이 되었는데 단지 예루살렘 멸망한 것을 보고 좋아하였다고 이렇게 말간 반석이 되도록 심판하신다니 여호와가 너무한 것이 아닙니까? 라이벌 관계의 식당이 한쪽에서 문을 닫게 되거나, 경쟁관계의 마주보고 있는 교회당이 한쪽이 문을 닫게 된다면 속으로 웃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가지고 완전히 심판하신다는 것은 너무한 것이 아니냐고 얼마든지 항의가 나올 만합니다. 그러나 이런 항의들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보겠습니다.

 

2천 년 전에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라는 한 청년이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믿지 않는다고 영원한 지옥형벌의 심판을 내린다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두로는 예루살렘과 관계가 좋았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는 성전과 왕궁을 짓기 위하여 나무를 수입하여 오고 대신 곡식과 기름을 주었습니다. 그런 두로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 좋아한 것은 조금의 도의적인 문제는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생판 알지도 못하는 2천 년 전에 십자가 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지옥에 보낸다면 하나님이 정당한 것입니까? 그뿐 아니라 온 세상을 심판하신다면 과연 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 9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강퍅하게 하실 자를 강퍅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에서와 야곱을 향하여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왕을 강퍅하게 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시려고 하셨답니다. 이런 일에 우리가 무슨 항의를 하겠습니까? 그래도 계속 항의를 하면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자기 원하는 대로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믿든지 아니 믿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물론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아멘으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지를 보아야 예수님을 중심으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주일 낮에 보는 에베소서 1:10절의 말씀대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간에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시키시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 나의 입장과 처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주여 옳습니다. 이런 자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에스겔 26:7~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말과 병거와 기병과 군대와 백성의 큰 무리를 거느리고 두로를 취게 하실 때에 3~5절처럼 심판을 행하십니다. 7~14절은 그러한 심판을 더욱 상세하게 보여줍니다. 12절을 보시면 그들의 재물을 빼앗고 무역한 것을 노략하며 성을 헐고 기뻐하는 집을 무너뜨리고 재목과 흙을 다 물 가운데서 던질 것이라고 합니다. 물로 인하여 무역하여 부요하게 되었는데 오히려 물속에 가라앉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랑거리가 오히려 멸망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에스겔 26:15~21절입니다. 두로의 멸망을 보면서 두로와 무역하던 바다의 모든 왕들이 그 보좌에서 내려 조복을 벗으며 수 좋은 옷을 버리고 벌벌 떨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두로를 향하여 애가를 부르게 됩니다. 어찌 그리 멸망 하였는고! 바다 가운데 여러 섬들이 두로를 보고 놀랄 것이라고 합니다. 바다의 큰물이 두로에 오르게 하며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내려가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 되지 못하게 하여 사람들이 두로를 찾아도 다시는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좋아하였다는 이유로 영원한 멸망을 말씀하십니다.

 

27장은 두로에 대한 애가입니다. 여러 편의 애가가 들어있습니다. 두로가 심판을 철저하게 심판을 받았기에 그에 대한 애가도 많습니다. 그 영광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두로를 화려한 선박으로 비유합니다. 타이타닉호가 만들어졌을 때에 세계 최고로 화려하고 안전한 배라고 결코 바다에 가라않지 아니할 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부호들이 그 배를 타고 여행할 때에 그 안의 화려함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빙산에 충돌함으로 배가 가라않고 말았습니다. 타이타닉호가 얼마나 엄청난 배였는지 영화로 나왔습니다.

 

이처럼 두로의 화려함을 큰 선박에 비유합니다. 3절을 봅니다. 두로가 자기를 향하여 말하기를 나는 온전히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그 배의 화려함을 4~17절을 봅니다. “봉독” 온갖 좋은 재료들을 수입하여 만들었습니다. 유능한 사람들이 사공이 되고 지혜로운 자가 선장이 되고 노인들과 지혜 있는 자들이 그 배의 틈을 막고 무역을 하였다고 합니다. 용감한 군인들이 병정이 되고 방패와 투구를 달고 다른 용사들은 사방 성위에 있었고 용사들은 여러 망대에 있었으며 그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두로와 무역하는 나라들과 물품들을 12~25절입니다. “봉독” 각 나라와 무역품들의 상세한 이름들이 나옵니다. 생필품으로부터 군대의 물품과 온갖 사치품과 보석들까지 무역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두로는 바다 중심에서 풍부하여 영화가 매우 컸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나라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닙니까? 대한민국도 무역중심의 나라인데 계속하여 무역을 늘리고 있지만 그런데 웬일인지 국가가 생기고 오늘날처럼 빚이 많은 적이 없습니다. 나라의 무역을 늘고 수입은 늘었다고 하지만 개인의 채무와 국가의 빚은 위험할 정도로 늘었습니다. 겉으로는 온갖 화려함으로 가득하지만 이런 나라들의 결국은 두로와 같을 것입니다.

 

두로가 어떻게 멸망하는지 26~36절을 봅니다. “봉독” 그 유명한 사공들과 선장들과 기술자들이 다 동원되어 결코 침몰하지 않으리라고 한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듯이 두로가 바다 한 가운데 빠질 것이라고 합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될 때에 그 배에서 울부짖은 사람들과 그 배에 투자한 사람들과 가족들이 다들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두로라는 성읍의 멸망을 크고 화려한 배의 침몰로 비유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두로의 멸망을 보면서 통곡하며 슬픈 노래를 불러 애도 합니다. 두로와 같이 바다 가운데서 적막한 자 누구인고! 많은 민족의 상인들이 다 두로를 비웃게 됩니다. 네가 공포의 대상이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멸망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서 회개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이득을 계산하며 좋아하였던 두로의 멸망입니다. 이러한 멸망이 국지적인 심판이었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온 세상에 회개할 분명한 증거를 주셨습니다(행17:30,31).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온 세상이 두로처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의 멸망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17장과 18장에서 바벨론을 마치 두로처럼 말합니다.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를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이 바벨론은 그 당시에 로마를 말합니다. 온 세상의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그 거대한 제국 로마가 세계 경제와 정치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라들을 정복하고 병합하면서 온갖 무역으로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로마의 모습이나 두로의 모습이 거의 비슷합니다. 두로가 무너짐으로 두로와 거래하던 자들이 애가를 부르듯이 바벨론과 무역하며 거래하다가 바벨론의 멸망을 보고서 탄식하는 내용입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로마의 멸망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멸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나라들이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까? 멸망한 두로와 로마의 전철을 밟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세상이 멸망할 때 까지 바벨론이라는 음녀에 취하여 돌아가게 됩니다. 온 세상의 관심사는 오직 경제에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은 귀신도 부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온 세상이 바벨론의 음녀에 취하여 돌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 대한민국과 세계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세상의 경제활동을 하지 말고 집단농장을 만들어 자력 경제체제로 살아가면 됩니까?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한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세상의 부와 영광에 속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결국 두로처럼 바벨론처럼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로와 바벨론과 거래하여 세상의 영광을 취하려고 하지 말고 이런 세상에서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온 세상을 심판하실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거래하려고 한 것도 회개하고, 교회 다니며 신과 거래하려고 한 것도 회개하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며 구원이며 의로움이며 거룩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