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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4:19~24 부요한 자와 가난한 자 2017. 8. 9

 

19 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리고 불의한 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리느니라 20 가난한 자는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 21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22 악을 도모하는 자는 잘못 가는 것이 아니냐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 23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 24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

 

잠언의 주제들이 너무 많습니다. 한절 한절마다 그 의미들을 성경 전체에서 확인해 보아야 할 내용들입니다. 왜 성경전체에서 그 의미들을 살펴보아야하는가 하면 단지 우리의 문화적인 이해 속에서 선 이해가 되어있는 단어의 개념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면 세상의 여러 가지 교훈을 주는 책과 구별이 안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의 수많은 내용들을 우리의 문화와 환경 속에서 배워온 내용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살펴볼 악인과 선인, 부요한 자와 가난한 자. 악을 도모하는 자와 선을 도모하는 자에 대하여서도 성경 전체를 통하여 살펴보아야 할 내용들입니다.

 

본문 19절입니다. 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리고 불의한 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린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우리의 문화 속에서 읽고 해석한다면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볼 수 있는 내용이 됩니다. 모든 일은 결국 바른 길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억울한 간첩누명을 쓰거나 살인 누명을 쓴 자들이 수십 년 뒤에 무죄로 판결나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거짓을 참은 이길 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 역사 속에서는 얼마나 거짓이 이기고 있는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여러 곳에서도 의인이 고난을 받고 악인이 형통함에 대하여 고민하고 항의한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럴 때에 성경은 믿음으로 살라고 합니다. 악인이 심판을 받을 것이며 의인이 신원함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악인이고 누가 선인이냐는 것입니다. 누가 불의한 자이며 누가 의인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볼 때에 자기 자신을 자꾸만 선인과 의인의 부류에 속한 자로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모든 성경의 악한 자를 자기 자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보게 된다면 이것이 자기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의 의지와 결단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야 이렇게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자들은 한 결 같이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인간은 항상 악을 도모할 뿐입니다. 선을 도모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본문 22절입니다. 악을 도모하는 자는 잘못 가는 것이 아니냐?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의 큰 제목인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의 내용으로 묶을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만 19절과 연결하여 먼저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의 인간은 항상 악을 도모하는 자들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고 노아 홍수전과 홍수 후에 증거하고 있습니다(6:5. 8:21). 그러므로 인간은 선을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끼리 선을 도모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선이라고 하는 기준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들은 외식하는 자들이 아닌 그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한다는 목적으로 율법을 목숨처럼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참으로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5:20). 그러면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 성경을 살펴봐야 합니다.

 

로마서 3:9~18절입니다.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1)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이러한 인간에서 무슨 의가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의가 있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19~24절입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이것이 유일하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길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 19절을 봅니다. 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려지고 불의한 자는 아인의 문에 엎드려진다는 말씀을 권선징악이나 사필귀정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의인이시기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가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엎드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이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이름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나의 주인 됨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되지만 그렇지 않는 악인들은 결국 마지막 날에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빌립보서 2:5~11절입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1)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2)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3)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동등 되신 분이 스스로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 속에 오신 예수님은 낮아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 앞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만이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역사 속에서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다면 마지막 날에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지 않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가난한 자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20절입니다. 가난한 자는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속한 부를 준다고 하셨다면 많은 사람들이 따라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에 수많은 무리들이 따르며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세상의 것을 주시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 표적과 기적들을 통하여 결국은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를 주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을 때에 사람들은 다 떠나가 버린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항상 악을 도모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진리나 생명에 관심이 있는 자들이 아님이 드러난 것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업신여김을 받는 이웃이 누구이겠습니까? 가난한 자입니다. 빈곤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빈곤한 사람에게 구제를 하는 것은 모든 종교나 인간의 철학에서도 다 나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동양의 유교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유교에서 사람의 본성에서 나오는 네 가지 마음씨가 있습니다. ()에서 우러나오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에서 우러나오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에서 우러나오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에서 우러나오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합니다. 측은지심이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애처롭게 보는 마음입니다. 성경이 이런 내용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면 성경도 일반적인 종교의 경전이나 인간의 윤리도덕적인 책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를 성경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구약의 율법에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가난한 자를 돌보라고 하신 이유는 너희도 애굽에서 가난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처럼 살았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따라 구원하여 내셨기에 약속의 땅에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잘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시편에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자들을 경건한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자들이기에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들로 표현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고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감을 잊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고 오히려 학대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멸시한 것입니다.

 

잠언 14:31절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가난한 자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하라고 두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난한 자를 학대하였습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멸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라고 합니다. 가난하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가 주를 공경하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잠언 19:7절입니다.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성경은 참으로 인간의 실상을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그의 혈육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는데 친구야 더욱 그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친구가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부자와 사귀려고 하지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가난한 자가 사귀려고 하면 피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진짜 가난한 자로 오신 분이 누구십니까? 오는 주일 오전에 양과 염소에 대한 말씀과도 연결이 되는 말씀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곤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땅에 참으로 가난하고 지극히 작은 자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난함이란 절대적으로 가난한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는 상태가 이 가난함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에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참으로 가난한 모습입니다. 이렇게 가난해 지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8:9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부요하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그의 가난함으로 인하여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의 가난하심이 왜 우리의 부요가 됩니까?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세상의 물질적인 부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가난한 자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면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잠언 19:7절처럼 도망갈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런데도 도망가지 않는 자가 나온다면 그 사람이 택한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6:1~13절입니다.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1)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2)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바울사도가 겉으로 보기에 어떤 모습으로 고린도에 갔습니까? 환난, 궁핍, 고난, 매 맞음, 갇힘, 난동, 수고로움, 자지 못함, 먹지 못함, 악한 이름, 속이는 자 같음, 무명한 자, 죽은 자, 징계를 받는 자, 근심하는 자, 가난한 자, 아무 것도 없는 자, 이런 모습으로 복음 전하는 바울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의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와서 보암직한 내용을 전하자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이 흔들린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 대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좁아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넓히라고 합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습니다. 세계 최대의 교회가 한국에 교단별로 여러 교회가 있다고 자랑합니다. 그런 교회가 사도들이 전한 이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은 이렇게 가난한 모습으로 증거 되어야 마땅합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로 증거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누가 정말 택한 자인지 드러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모습으로 전하는 복음을 정말로 알아들은 사람들은 무엇을 알아보게 됩니까? 깨끗함, 지식, 오래 참음, 자비, 성령의 감화, 거짓 없는 사랑,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가짐, 영광, 아름다운 이름, 참됨, 유명함, 항상 기뻐함, 부요한 자, 모든 것을 가진 자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받은 자의 시각입니다. 무엇이 부요한 것인지 무엇이 가난한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에 부요하지 못하면 세상의 썩어질 부요를 찾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26~29절입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무엇에 부요하기를 원합니까? 육체를 따라 세상의 썩어질 것에 부요함을 구하는 자라면 아직 복음이 들리지 않은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가난한 사람이라면 세상의 경제적인 가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의가 더러운 누더기와 같은 자임을 아는 자가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에서 아주 부요한 자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 자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세상적인 그 어떤 조건으로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이력이나 가문이나 부함을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세상의 윤리 도덕적인 것으로 치장한 것도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는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부요함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의 부요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믿음의 부요함이란 이어지는 말씀에 나옵니다.

 

30~31절입니다.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이라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가 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라면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부요하신 분으로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가난해 지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부요함을 주신 결과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들로 부요하게 되는 자가 믿음에 부요한 사람입니다.

 

디모데전서 6:7~10절입니다.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1)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다른 교훈을 말한다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말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6~10절입니다.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늘 조 집사님의 시모가 별세하여 입관에 참여하고 왔습니다. 유족들이 마지막으로 시신을 보는 자리입니다. 얼마 후에 저 자리에 제가 누워있을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 잔잔한 은혜가 밀려옴을 느꼈습니다. 그 자리가 낯설거나 거리끼는 자리가 아니라 아주 평안한 자리였습니다. 우리가 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을 알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고 부 하려고 하면 여러 가지 시험과 올무에 빠집니다. 결국은 파멸과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릅니다. 이렇게 명백한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을 잘 섬기면 세상의 부자가 된다고 하는 자들은 미혹되어 있는 것입니다.

 

17~19절입니다. “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우리의 소망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며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고 합니다. 우리가 참된 생명을 취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부함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두고 사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벌거벗겨져 죽은 그 십자가의 죽음은 겉으로 보기에 가장 가난하고 가장 저주 받아 죽는 죽음인데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의 다 이루심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그 영광과 하늘에 신령한 복을 믿고, 받고, 채워지는 자들이 참으로 부요한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