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바로듣기]  [음성설교 다운받기]


잠언 19:10~20 슬기와 영광 2017. 12. 6

 

10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이 적당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 11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12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의 이슬 같으니라 13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14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15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16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거니와 자기의 행실을 삼가지 아니하는 자는 죽으리라 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18 네가 네 아들에게 희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되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 19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 네가 그를 건져 주면 다시 그런 일이 생기리라 20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

 

사람이 미련하게 살면 욕을 받지만 슬기롭게 살면 영광을 받습니다. 이러한 말은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키는 이유도 세상에서 미련하게 살지 말고 슬기롭게 살게 하여 자식이나 본인이 영광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미련함과 슬기로움으로 산다는 것이 성경에서는 정 반대가 됩니다. 세상의 지혜를 하나님은 미련하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미련함과 슬기로움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표준 새 번역으로 매 구절을 다시 봅니다. “미련한 사람이 사치스럽게 사는 것도 마땅하지 않은데, 하물며 종이 고관들을 다스리는 것이랴?” 잠언서 에서만 미련한 자가 76회가 나옵니다. 제일 먼저 1:7절에서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자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인데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자는 벌을 받고 멸망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미련한 자가 사치스럽게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데 하물며 종이 고관들을 다스리는 것이 어떻게 합당하느냐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성실한 종이 주인의 총애를 받아 높아진 이야기가 아니라 종이 반역하여 주인의 자리를 빼앗은 자에 대한 말입니다.

 

잠언 30:21~23절입니다. “21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22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과 23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세상에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의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이런 일들이 견딜 수 없는 일이라면 창조주를 반역한 인간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편 7:11~12절입니다. “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12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13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14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15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16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세상에 일어나는 반역들이 사람들을 견딜 수 없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반역하였기에 세상에서도 반역을 일삼으며 살아가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으로서 매일 분노하시고 심판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모르기에 하는 짓이라는 것이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은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행위는 그 마음의 생각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하니 그 행위가 다 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속이기 위하여 웅덩이를 팠지만 제가 만든 함정에 제가 빠지는 것이 여호와의 심판입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은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은 그의 영광이다.” 여호와께서 매일 분노하시는데 그 분노를 다 쏟으신다면 이 세상은 한 순간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노아 언약에서 물로 심판을 하시지 않겠다는 이유가 인간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은 사람의 슬기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맛본 사람만이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기에 그 사람의 슬기로움은 그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맛 본 결과이기에 하나님의 슬기로움입니다. 주의 오래 참으심에 대하여 몇 구절을 봅니다.

 

로마서 9:22~24절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인한 긍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디모데전서 1:16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바울 사도는 예수 믿는 자를 다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고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앞장서고 다메섹까지 예수 믿는 자를 잡으려고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긍휼을 입은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본을 보인다는 것은 나는 이렇게 잘 했으니 너희도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의 오래 참으심을 전한 것입니다.

 

어느 분의 문자가 온 것을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낮추시고, 가난하게 하시지 않는 한, 이 은혜를 힘입지 않는 한, 나에게선 하나님을 향한 자발적 추구는 일어나지 않는다. 결코 은혜가 없이는... 그런데 자기도 질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자기는 능히 지고 가는 양, 진지하고 경건하고 태연하게 철면피하게 선포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롬11:35’ 여기에 제가 답하기를 저를 포함한 목사들이죠!’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본을 보인다는 것은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오래 참아주셨다는 그 십자가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15절입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저주 맹세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나 바울도 다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된 줄로 알고 믿기에 그들의 편지에서 동일하게 하는 말이 주의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베드로나 바울처럼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동일하게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이나 베드로보다 2천 년이나 더 오래 참아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형제에 대하여 참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슬기가 아니라 은혜로 받은 슬기입니다.

 

본문 11절 후 반절입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그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어떤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면 참으로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광도 그 사람의 자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허물을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만이 상대방의 허물도 덮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슬기이며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그 사람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그 허물을 덮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허물을 덮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출애굽기 34:4~7절입니다. “4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 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 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시내산 앞에서 금송아지 사건으로 처음 돌 판이 깨어진 후의 일입니다. 돌 판이 깨어지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멸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두 돌 판을 깨뜨리고 자기 생명을 걸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습니다. 이제 두 번째 돌 판을 만들어 시내 산에 올라가는데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선포합니다.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인자는 천대이지만 벌은 삼사 대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영원과 잠시라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그 말씀을 듣고 엎드려 경배하면서 우리가 목이 곧은 백성이니 용서하여 주시고 동행하여 달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진노와 자비를 안 것입니다.

 

시편 30:5절입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위의 말씀을 한 절로 표현한 것입니다. 삼사 대를 잠깐으로 천대를 평생으로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분노대로 하신다면 단 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노보다 사랑이 영원하시기에 그 노염은 잠깐이지만 그 은총은 평생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시편 90편에서도 우리의 일생이 하나님의 진노 중에 지나가니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자비와 용서는 영원하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왕의 분노는 사자가 소리 지르는 것과 같고, 그의 은혜는 풀 위에 내리는 이슬과 같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을 대리하는 자입니다. 왕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다스린다면 정당한 분노를 발해야 하지만 은혜도 베풀어야 합니다. 분노는 잠깐이지만 은혜는 평생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왕이 타락하게 되면 분노와 은혜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합니다. 다윗이 간음과 살인을 하고 났을 때에 나단 선지자가 비유로 책망을 합니다. 그 말을 듣고 그런 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양은 네 배로 물어주면 되지만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다윗은 하나님의 분노 앞에서는 살 수가 없음을 알고 영원한 용서를 사모하게 됩니다.

 

본문 13절입니다. 미련한 아들은 아버지에게 파멸을 가져다주고, 다투기를 잘하는 아내는 새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과 같다.” 미련한 아들을 둔 아버지, 다투기를 잘하는 아내를 둔 남편은 괴로울 것입니다. 아들이라고 하는 짓이 늘 미련한 짓만 행하고, 아내라고 하는 자가 늘 다투기를 잘한다면 그 아버지와 남편이 얼마나 힘들까요? 아내가 어느 정도로 다투기를 잘하는가하면 비가 올 때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과 같다고 합니다. 옛날 지하 예배당과 지금의 건물에도 비가 많이 오면 샙니다. 비가 새면 이곳저곳에 그릇을 받쳐 둡니다. 얼마나 신경이 쓰이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미련한 아들과 다투기를 잘하는 아내를 둔 분이 세상의 아버지와 남편이 아니라 하나님 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시며 이스라엘의 남편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들과 아내를 둔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못하십니다(121:4). 그러므로 애 먹이는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 있는 분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주께서 주신다.” 조상에게 물려받는 유산이 있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잠언 18:22절에서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도 오늘 말씀과 연결하면 슬기로운 아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란 오늘 본문 11절에서 본 대로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알고 그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남자가 복음을 알고 있는 여자는 만났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깊은 잠에 빠지고, 나태한 사람은 굶주릴 것이다.” 성경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살후3:10). 젊은 여자가 게으름을 익혀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면 쓸데없는 말을 하고 일만 만드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가정을 돌보라고 합니다(딤전5:13,14). 아이를 다 키웠다면 봉사하는 일이라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살이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일에도 게으르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을 힘써 알자고 합니다(6:3). 복음을 전하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것을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정말로 그 십자가의 사랑을 알았다면 그 사랑을 더 알고 더 받기를 소원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반응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제 목숨을 지키지만, 자기 행실을 주의하지 않는 사람은 죽는다.” 성경에서 계명을 지킨다는 말씀은 문자대로 보면 율법을 지킨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계명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기 목숨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킨다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자기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계명을 지키는 것과 자기 행실을 주의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이런 말씀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문자를 전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이 됩니다. 율법조문은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립니다(고후3:6).

 

본문 17절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주께서 그 선행을 넉넉하게 갚아 주신다.”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 베푸는 것에 대하여 성경이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고린도후서 8:9절을 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부요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섬겨주심으로 우리가 믿음에 부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제는 단지 물질만이 아닙니다. 복음에 목말라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입니다. 네 아들을 훈계하여라. 그래야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를 죽일 생각은 품지 말아야 한다.” 공동번역은 이렇습니다. 아들에게 매를 들어야 희망이 있다. 그러나 들볶아 죽여서는 안 된다.”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을 다시 봅니다. “네가 네 아들에게 희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되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종종 말씀드리지만 복음을 듣고 나면 자녀들에게 복음을 권하는 일을 몇 번 해보고는 포기합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인데 말한다고 되느냐고 합니다. 아주 믿음이 좋은 모습처럼 보이지만 자녀가 공부 안한다고 하고, 취직 안한다고 하고, 결혼 안한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그렇게 쉽게 포기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자녀에게 훈계, , 징계를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들볶아 죽일 정도는 하지 말라고 합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내가 알고 받았다면 어떻게 하든지 전하려고 할 것입니다.

 

본문 19절입니다. 성격이 불같은 사람은 벌을 받는다. 네가 그를 구하여 준다고 해도 그 때뿐, 구하여 줄 일이 또 생길 것이다.” 공동번역입니다. 성미가 사나운 사람은 벌을 받는다. 그런 사람은 빼내 주어도 또한 매한가지다.” 성미가 불 같이 사나운 사람이 사고를 잘 칩니다. 그래서 벌을 받을 때에 그 사람을 구하여 냅니다. 그런데 구하여 주어도 그 때 뿐이지 매 한가지라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렇지 않습니까? 급할 때에 살려만 달라고 하다가 그 문제가 해결되면 여전히 그대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다 미련한 자식이며 다투기를 잘하는 아내들입니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본 대로 주님의 분노는 잠깐이지만 주님의 자비와 긍휼은 영원하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본문 20절입니다. 충고를 듣고 훈계를 받아들여라. 그리하면 마침내 지혜롭게 된다.” 김성관 목사님이 수만 명의 교인들에게 16년 동안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는데 듣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은퇴하고서도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십자가 컨퍼런스를 하는데 강사가 밥을 사주면서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충고와 훈계를 좋아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말씀을 들음으로 마침내 지혜롭게 됩니다.

 

지혜롭게 된다는 것은 11절의 말씀과 연결하면 슬기롭게 되는 것입니다. 슬기롭게 되는 것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이며 허물을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슬기로워서 노하기를 더디 하고 허물을 용서하는 사람은 그것이 자기의 영광이 됩니다. 이러한 일은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는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 그것도 속히 갚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원수였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원수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을 듣고 믿게 되었다면 분노가 더디게 일어날 것이며 허물을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슬기이며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 놀라운 슬기와 영광을 자기 백성에게도 부어주시는 것이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슬기와 영광을 맛보고 누리실 뿐 아니라 흘러 차고 넘쳐서 이웃에게로도 흘러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그 슬기로움과 영광, 곧 노하기를 더디 하고 허물을 용서하는 그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