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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8:13~23 어찌 이럴 수가! 2014. 2. 5


13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누가 이러한 일을 들었는지 여러 나라 가운데 물어보라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14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15 무릇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들의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하게 하여 16 그들의 땅으로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의 머리를 흔들리라 17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 앞에서 흩어 버리기를 동풍으로 함 같이 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읽어보면 너무나 당황스러운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하나님의 개념들이 있습니다. 엄숙하고 거룩하고 높으신 분이시며 절대적인 능력을 가진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온갖 악한 일들이 다 기록이 되어있고 이러한 일에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답답해하시고 한탄하는 모습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예레미야서 설교 초반부에 ‘파토스의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정념(情念)의 하나님 정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런 표현들은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적인 표현입니다. 오늘 본문에 ‘어찌하여!’ 와 같은 표현입니다.


13절을 봅니다. ‘그러므로’는 바로 앞의 단락을 받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지난주에 보았던 토기장이와 진흙에 대한 말씀입니다. 진흙이란 토기장이의 의도대로 빚어질 뿐입니다. 어떤 용도로 사용하든지 간에 땅의 티끌이며 먼지인 인간은 토기장이인 하나님께 대하여 항의할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우리가 수용할 수가 없다고 여기는 것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창세기 3장 이후의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상담으로 예정론에 대한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바로와 애굽 사람은 들러리이며(택하지 않았기에..) 가나안 사람도 도구로 이용되는 사람이 되는가요? 그리고 지금도 다른 사람에게 전도해도 택하신 사람들만 말씀을 받는지요?” 여기에 대한 저의 답변은 이렇게 질문하는 우리가 창세기 3장 이후의 인간이라서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의 인간은 자신이 주체가 되어있습니다. 내가 주체성을 가지고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다고 여기기에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래서 지난주 수요일 설교를 보라고 답을 했습니다. 지난주의 말씀을 보아도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시지만 그들이 악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신다는 말씀과 파멸하려고 하시지만 그들이 악에서 돌이키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주체적인 의지의 결단을 요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인간이 스스로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말씀임을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도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하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시고 어찌하여 이렇게 하느냐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다시 본문13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너희는 누가 이런 일을 들었는지 여러 나라 가운데서 물어보라고”고 합니다. 우리가 억울하면 길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런 식의 표현입니다.


그 책망의 말씀은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처녀로 부르십니다. 처녀라는 표상은 하나님께서 한 정결한 신부로 맞이하신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처녀가 아니라 온갖 남자들과 바람을 피웠다는 것이 가증한 일을 행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가증한 일이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들의 고집대로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통하여 돌아오라는 말씀을 듣고서도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란 결국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우상숭배를 말합니다.


14절입니다.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느냐고 합니다. 레바논에 대하여 인터넷 다음에서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브리태니커 사전을 옮겨놓은 모양입니다. 레바논의 산맥들 평균높이가 해발 2100미터이며 가장 높은 곳은 3039미터가 되며 여러 봉우리들이 눈에 덮여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산은 다공질의 석회암으로 땅이 척박하지만 지하의 샘들이 많아서 관개수로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을 수가 있고 레바논의 산맥들이 눈이 덮인 것을 보고 먼 옛날에 라반(아랍어로 희다)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레바논 산의 꼭대기들이 돌로 되어있고 그 곳의 눈은 항상 있었기에 그곳에서 흐르는 물들이 차고 마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레바논 산의 눈이 그 바위를 떠나지 않고 그 물이 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의 환경을 알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반석을 떠나겠느냐고 하시며 그 물이 어찌 마르겠느냐고 합니다. 눈이라는 것은 날이 따뜻하면 녹아집니다. 그러나 레바논 산의 눈은 만년설처럼 사시사철 그 바위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산에서 흘러내리는 찬물도 마르지 않는데 어찌하여 처녀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을 떠남으로 그 물이 말라버렸는지를 탄식하며 묻고 있는 것입니다. 반석에 대한 말씀들이 성경에 많이 나오지만 신명기 32장에서만 몇 절을 봅니다.


신명기 32:3~4, 15, 18절입니다. “3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 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15절입니다.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신18절입니다.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이스라엘을 낳은 여호와의 이름을 반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배부르게 되자 자기를 지으신 그 반석을 업신여기고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분노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럴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15절입니다. 무릇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 분향하였다고 합니다. 허무한 것이란 모든 우상들이 다 허무한 것이기에 우상숭배를 말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길 곧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하게 하는 일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야할 길이란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가야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런 길에서 돌이켜 곁길로 간다는 것은 여호와의 인도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또한 길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소에 살아가야할 삶의 방식을 말하기도 합니다. 반석이 되신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의 인도를 받아 살아야하는데 이들은 끊임없이 그들이 원하는 길로 행한 것입니다.


신명기 1:30~33절입니다. “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33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인도하여 내셨는지 애굽에서부터 광야에서 인도하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함에도 이들이 믿지 않아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 언약의 신실함으로 이들을 약속의 땅에 들여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여호와의 인도하시는 길을 가지 않고 이방인들이 가는 그 길로 간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입니다.


16절입니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행하지 않고 곁길로 갔기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땅이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거리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심판의 결과로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놀라서 그의 머리를 흔들 것이라고 합니다. 머리를 흔든다는 것이 어떤 상황인지 욥기 16:4절입니다.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욥이 졸지에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더구나 자신의 몸은 전신에 병이 들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이런 욥의 멸망을 보고서 머리를 흔든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인하여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7절입니다. 예루살렘을 그들의 원수 앞에서 흩어 버리기를 동풍으로 함 같이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 동풍이란 이스라엘의 동쪽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인데 이 바람이 불면 풀들도 말라버리는 그런 바람입니다. 이러한 재난을 당할 때에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등을 보이시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신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얼굴을 보이시는 것이 이스라엘의 복입니다. 물론 얼굴을 보이실 때에 분노하시는 얼굴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예 등을 보이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배신으로 인하여 여호와께서 등을 보이시겠다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얼굴을 비추어 주시는 것이 제사장의 축복의 내용입니다.


신명기 6:22~27절입니다.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여호와께서 얼굴을 비추어주시는 것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등을 보이시고 얼굴을 보이시지 않으신다는 것은 저주요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의 선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께로 돌아오라는 선지자를 배척하려고 합니다.


18절입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하나이다” 선지자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지자를 공격합니다. 그 공격은 말로서 공격합니다. 꾀를 내자고 하는 것은 예레미야의 선포에 흠을 잡아 공격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듣기 싫었으면 선지자가 전하는 여호와의 말씀에 시비를 걸어서 틀린 말이라고 하여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청원합니다.


19~23절입니다. “19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와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옵소서 20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하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유익한 말을 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21 그러하온즉 그들의 자녀를 기근에 내어 주시며 그들을 칼의 세력에 넘기시며 그들의 아내들은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며 그 장정은 죽음을 당하며 그 청년은 전장에서 칼을 맞게 하시며 22 주께서 군대로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게 하사 그들의 집에서 부르짖음이 들리게 하옵소서 이는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구덩이를 팠고 내 발을 빠뜨리려고 올무를 놓았음이니이다 23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주께서 다 아시오니 그 악을 사하지 마옵시며 그들의 죄를 주의 목전에서 지우지 마시고 그들을 주 앞에 넘어지게 하시되 주께서 노하시는 때에 이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하니라”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발입니다. 이 고발대로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반석이신 여호와를 떠나고 그의 행하신 일도 잊어버린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다시 돌이켜서 그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성전을 재건하게 하시고 메시야를 보내십니다. 그 메시아는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와 전혀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저주와 심판을 대신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저주 받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고개를 흔듭니다.


시편 22:1~8절입니다.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시편 기자가 주의 영에 의하여 눈에 보듯이 그리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37~42절입니다.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 패를 붙였더라 38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고난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언을 통하여 분명하여 집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무엇을 말한 것인지 드러납니다. 율법으로는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고 선지자들이 새로운 언약을 내다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세운 언약이 새 언약입니다. 이 언약으로 자기 백성의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심판을 내려달라고 하였지만 예수그리스도는 그 심판을 자신이 받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어찌 이럴 수가! 여호와의 탄식이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 백성들에게는 감탄의 말이 됩니다. 어찌 이럴 수가! 이 놀라운 감탄이 십자가를 통하여 더욱더 분명하여 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감탄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4:9~16절입니다.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이렇게 다루어가셨습니다. 이 사도의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는 자들이 세상에 무엇을 보여주어야 합니까? 세상도 부러워하는 힘과 권세를 가지고 예수 믿는 힘을 과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서 고개 흔듦을 당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믿지 않는 나보다 너는 못하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런 수치와 조롱을 당할 때에 그들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하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그렇게 하였지만 그 결과는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찌 이럴 수가! 또 다시 이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말씀을 나누고 있는 것도 ‘어찌 이럴 수가!’ 이런 감탄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러한 탄식과 감탄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