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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소서 6:13~17 의의 호심경(護心鏡)(1)   2 014. 2. 23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영적인 전투는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공중권세 잡은 자 곧 사탄을 대적하는 싸움입니다. 사탄은 무엇으로 성도를 공격하는가 하면 거짓말과 유혹과 위협과 의심하게 함으로 공격합니다. 이런 공격을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여 가장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하는 것처럼 하도록 하여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게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 아무리 무장하여도 사탄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도 사탄이 밀 까부르듯이 하려고 청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심으로 돌이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사탄의 이런 요구를 허락하셔서 베드로가 세 번이나 부인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따라갔다면 베드로가 영웅이 됩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의 양들을 목양할 수가 없습니다. 실패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입어야 하는 것은 의의 호심경입니다. 전에 번역에는 의의 흉배로 되어있습니다. 흉배(胸背)란 우리식의 번역입니다. 이러한 흉배는 조선시대 왕이나 관리들이 비단에 용이나 학을 수놓아 가슴에 붙이던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갑옷의 개념과 달라서 이번에 번역하면서 호심경(護心鏡)이라고 했습니다. 호심경이란 가슴과 배와 등까지 보호하는 것으로 칼이나 활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갑옷입니다. 성경에서 사람의 내장들을 사람의 중심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장기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군인들이 호심경을 입듯이 영적인 전투를 하는 성도에게 의로서 호심경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를 이해하기 위하여 이 ‘의’의 문제로 고민한 사람들을 통하여 의가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째는 시편 73편 1~17절입니다.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4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5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7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8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9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16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신데 어떻게 악인이 형통하여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문제로 인하여 시편기자는 거의 미끄러질 뻔 하였다고 합니다. 악인이 형통하여 죽을 때에 고통도 없고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없고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더 하여지는 것을 보고 내가 매일 의롭게 살려고 마음을 깨끗이 하고 손을 씻어 무죄하다고 하는 것이 헛되다고 합니다. 그렇게 의롭게 사는데 당하는 것은 종일 재앙을 당하여 아침마다 징벌을 받으니 이럴 바에서 의롭게 살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하였는데 성소에 들어가서 마침내 그 대답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성소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18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1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 대한 답을 얻었습니다. 세상의 평가기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을 보니 그런 악인들은 반드시 멸망을 받음을 알았기에 주님만 사모하게 되며 나는 약하여지지만 하나님만이 내 마음의 반석이며 나의 영원한 분깃이라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박국 1:13절입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주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데 어떻게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히 계시는가 하는 항의입니다. 4절입니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악인의 형통을 그대로 두시니 율법이 해이해지고 정의가 굽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의로우신 하나님께 따지고 있습니다.


2:1~4절입니다. “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의 답변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라고 합니다. 더 답답하여지지 않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의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하는 자들에게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로마서 1:16~17절입니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은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주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오직 은혜로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어주는 행위로 된다면 행함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기에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내용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을 전하는 바울사도가 복음을 받기 전에는 어떤 의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빌립보서 3:5~9절입니다.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하는 자가 바울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무리들을 다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고 생각한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 참된 의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증거 하기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난 의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행위의 의는 배설물이라고 합니다. 자기를 의롭게 한다고 생각한 것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 다 배설물로 보인 것입니다. 배설물이라고 고상하게 번역하였지만 실감나게 말하면 똥입니다. 자기의 행위로 의에 이르고자 하는 것들이 다 똥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똥으로 범벅이 된 것을 자기 의라고 내어 놓는 것이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율법으로 죄를 알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치장하였습니다.


로마서 10:1~4절입니다.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유대인들이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마침이며 완성입니다. 율법의 요구가 바로 의를 요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인간의 의로운 행위로 인하여는 결코 의에 이를 수가 없음을 밝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증거 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거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을 변개시키려는 사탄의 미혹들이 나옵니다. 핍박받는 교회가 로마의 공인을 얻고 심지어 로마의 국교가 됨으로 힘을 가진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복음을 버리고 믿음에서 행함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중세 천년이 암흑기라고 할 정도로 복음이 왜곡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의에 대한 해석이 왜곡 된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결코 의가 나올 수가 없기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나아가야 하는데 교회가 힘을 원하였기에 믿음에서 행함으로 나간 것이 다른 복음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기 피로 값 주고 산 교회는 건물이나 교회의 전통들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피로 되는 것이기에 오직 믿음으로라는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개혁자의 이름들이 루터와 칼뱅이지만 다른 사람들도 복음이 무엇인지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것인지 아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자들은 소수였으며 핍박을 받았습니다. 루터라는 책을 보면 루터 당시의 마인츠의 추기경과 신성로마제국의 고문은 자신이 똥임을 인정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내 안에 선한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는 쓸모없고 악취 나는 한 덩어리의 똥에 불과 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중세시대의 추기경이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중세시대 때에 이들이 알고 있었던 의라는 것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내가 믿음으로 의롭게 살지 못하면 심판을 받는 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온갖 행위들이 다 나왔습니다. 고행과 금욕과 보속의 이론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면죄부를 파는 행위까지 나온 것입니다. 베드로 대성당을 짓는 일에 돈이 모자라니 헌금을 하는 만큼 죄가 속하여진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이 땅의 교회들도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복은 행함으로 받는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한국의 교회들이 중세시대와 다를 바 없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루터’라는 책에서 인용합니다.


루터가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발견하기 전에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증오 하였습니다. 교황권 아래 있을 때에 루터의 의에 대한 이해가 어떠하였는가 하면 시편 31:1절에 ‘주의 의’로 나를 건져달라는 말씀을 어떻게 읽었는가 하면 ‘주의 의’ 또는 ‘주의 진리’라고 읽은 순간 이 의가 하나님께서 죄를 벌하시는 냉혹한 진노라고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바울사도가 증거 한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났다’는 사도 바울의 글을 읽을 때에 진정으로 그를 증오했다고 합니다. 물론 나중에야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이해하고서는 하나님의 의란 그 분의 은총으로서 그것을 통하여 그 분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또 의롭게 보존 하시는 것임을 배우고 알게 되어 기쁨을 누리게 되었고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루터가 증오한 것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자신이 의롭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서신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 말씀을 보면서도 이 조차 증오한 것은 중세시대의 하나님의 의에 대한 해석이 바울의 복음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때에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의를 분배한다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의를 주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때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의를 주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교회가 구원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였기에 지금도 가톨릭은 교회당이라는 장소를 거룩한 공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데모하는 자들이 성당에 가면 경찰이 들어오지 못하기에 그곳에서 농성을 합니다. 요즈음은 조계사에도 갑니다. 그런데 교회는 오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할 뿐 아니라 정부에 적극 협조하는 교회들이 많기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의를 분배하여 주기는 하지만 그렇게 분배된 의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롭게 되는 지위에 앉힌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최후의 심판 때에 신자가 그리스도의 선물을 사용하고 참으로 정당하게 다루었는지를 판단 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개혁교회의 이론과 별 다를 바 없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은 나, 거듭난 나의 행위에 따라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하늘에서도 상급을 받는다는 이런 이론들이 중세 종교개혁 이전의 생각들입니다.


그러면 루터의 하나님의 의에 대한 것이 이런 생각과 전적으로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의 의와 나눌 수 없이 일치되고 합병이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이 믿음으로 받았다는 것이 은혜의 선물이기에 신자는 모든 시험에 합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런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 불리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주신다고 하신 것이며 또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에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내용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로서 루터는 사도바울이 인용한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는 하박국 선지자의 글이 납득이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종교개혁자가 된 것입니다.


‘루터의 발견은 단지 새롭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전대미문의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기독교 윤리학의 구조를 산산이 조각내 버렸다. 모든 인간 행동의 기본적인 동기로 그처럼 오랫동안 당연시 되어 온 보상과 공로가 그 효력을 상실했다. 교회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주장되던 선행들은 성서상의 근거를 박탈당했다. 이러한 전환은 개인의 믿음과 의 그 이상의 것을 문제 삼았다. 총체적인 삶이 영향을 받고 재고되어야 했다. 장래의 대결과 투쟁을 시종하여 거기에는 한 가지 목적만이 있었다.’ 이것이 루터를 연구하여 루터라는 책을 쓴 저자의 말입니다. 그래서 그 책의 부제를 하나님과 악마 사이의 인간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악마 사이에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드러냄으로 악마와 싸웠다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전투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수를 입으라는 말씀에서 처음으로 본 것이 진리의 띠에 대한 말씀입니다.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복음이 진리이며 그리스도가 진리이기에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이 진리의 띠를 띠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진리는 우리가 소유하여 우리가 조종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라 그 진리가 우리를 묶어서 끌고 가는 진리임을 보았습니다. 이런 진리관이 바로 사탄을 대적하는 진리관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의 호심경을 붙이는 것도 자기의 의로 무장을 하게 되면 바울사도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처럼 자기 의로 그리스도를 배척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궤계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행위를 믿게 만드는 것이 사탄의 일입니다.


계속하여 루터의 싸움이 어떤 것인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의 가장 내적인 자아가 성취하고자 투쟁하는 것, 그리고 모든 선의의 품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전율 하리 만치 루터가 훼손시킨 것은 바로 이 인습적인, 양심 지향의 도덕성이다. 문제는 도덕성인가 비도덕성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악마다. 양심에 대한 이 뚜렷한 침해는 인간을 짐승보다 고상하게 만들어 주는 것, 선악을 구별하는 자식 바로 그것의 신성함을 제거해 버렸다. 종교개혁 시대의 가장 큰 두 개의 전환점-루터와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점-은 인류에게 굴욕만을 안겨 주었던 것 같다. 먼저 인간은 자신의 지배력을 상실했고, 다음에는 창조의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이 평가를 보면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것이 얼마나 인간으로 하여금 자존심 상하게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과 대적하기 위하여 의의 호심경을 입는 다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복음이 증거 되고 열매 맺는 곳마다 그것을 방해하려는 악마가 있습니다. 이것이 악마나 본성이며 오늘날에는 더 교묘하게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 사탄의 간계들 중에 하나가 악마가 없다고 말합니다. 악마는 신학자들이 질투하시고, 싸우시고, 분노하시고, 살아계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란 철학적인 개념으로 ‘향상 시키는 것’을 기꺼이 도와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혈과 육으로 나오는 모든 것들은 결코 마귀를 대적하여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것으로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러한 사상들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탄도 쟁취하고자 노력하는 세상을 위하여 십자가 깃발 아래서 싸우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탄의 능력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그는 특정한 영역 내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까지는 전 세계가 그 영역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과 평생의 삶이 늘 영적인 전투의 현장이 됩니다. 이러한 싸움에서 우리가 무장할 것은 진리의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입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어주는 행위가 아닙니다. 믿고 나서 추가되는 행위도 아닙니다. 오직 그 아들의 피로서 단번에 의롭다 함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단번에 이루신 의를 흠집 내기 위하여 계속하여 도발합니다. 네가 그러고서도 예수 믿는다고 할 수 있느냐는 말로 공격합니다. 자기 행위에 가치를 두도록 만듭니다. 우리가 땅의 티끌이며 배설물인데 이러한 자들이 오직 그의 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자기의 자존심과 자기의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복음 안다는 것 마저 이용하려고 듭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공격입니다. 이러한 공격을 막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사탄의 공격을 대적하는 하나님의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0절입니다.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세상에서 천하지 않고 멸시 받지 않고 있는 자들이라면 이 복음이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영이 임하시면 자신이 세상의 가장 큰 부자라도 자신이 똥임을 아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거듭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자신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심을 믿기에 결코 자기를 자랑 할 수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탄을 대적하는 믿음입니다.


고린도후서 5:21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기 위하여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죄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죄를 알지도 못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율법 아래 오셔서 죄가 되셔서 대신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의 피로 하나님의 의가 된 자들이 의의 호심경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로 사탄의 공격들을 무력화 시킬 수 있습니다.


종종 말씀드린 내용입니다만 한문의 의(義)라는 글자는 나(我)위에 양(羊)이 올라가 있는 모양입니다. 나아(我)자는 손수(手)변에 창과(戈)자입니다. 노아라는 영화의 두발가인과 같이 창을 들고 사는 자입니다. 이런 자가 의롭게 되는 길은 오직 일찍 죽임당한 어린 양이 덮여져야 합니다. 마치 유월절 밤에 어린 양의 피가 발린 집에 죽음의 천사가 넘어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을 대적하는 무장은 어린 양의 피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