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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13~17 평안의 복음 2014. 4. 13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영적인 전투를 위하여 성도가 갖추어야 할 무장에 대하여 지금까지 하나님의 전신갑주,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호심경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는다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평안의 복음의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는다는 말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역으로 비교해 봅니다. 개역한글에서는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입니다. 이것을 개정한 것인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의’를 ‘복음이’로 바꾸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의’란 주격인지 소유격인지 목적격인지 그 문맥을 보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개정역에서는 평안의 복음이 예비한 신을 신고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전투의 무장에서 복음의 신을 신는데 그 복음의 신이 평안의 복음이 예비한 신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평안의 복음이라는 말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설교제목을 평안의 복음이라고 하는데 복음이 어떤 평안을 주는지를 보겠습니다. 그러면 그 복음이 주는 평안이 예비한 신과 연결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보려면 국어사전을 보아야하는데 이렇게 파고 들어가면 나중에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뜻은 놓쳐버리고 문자에 갇혀버리게 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합니다. 그래서 한 단어란 그 자체의 의미보다는 다른 단어들과의 비교를 통하여 변별력을 나타내게 됩니다.


다른 번역을 좀 더 보겠습니다. 표준 새 번역입니다. “발에다가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채비를 하십시오.” 공동번역은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입니다. 여기에 영어 번역과 헬라어까지 이야기하면 단어 풀이하다가 한 시간 다 갈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소개하는 이유는 성경의 한 문장이나 한 단어를 볼 때에 과연 어떤 방향과 관점을 가지고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모든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요5:39). 그렇다고 성경 모든 글자가 다 예수를 증거 하느냐고 따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특히 학자일수록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증거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천지 창조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골1:16).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도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덧입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오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안의 복음으로 예비한 신을 신으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무장하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사도가 로마 군병들의 무장을 보고 신이라고 예기하였다고 봅니다. 군인이 전투에 나갈 때에 신발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로마 군병들이 신발을 가죽과 쇠붙이로 견고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적들이 길에다가 뾰족한 쇠붙이를 던져놓으면 말이나 사람들이 그것을 밟게 되면 부상으로 전투를 할 수 없기에 그렇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군에 가본 남자들은 전투화에 대한 추억들이 다 있을 것입니다. 저는 80년대 초에 군대를 갔는데 전투화가 발에 맞지 않다고 하니 발을 신에 맞추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대한민국의 군대가 이랬습니다. 그래서 무슨 전투를 한다고 하겠습니까? 어떻든 신은 전투에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전투의 신도 평안의 복음으로 예비 된 신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에베소서 2:14~18절에서 평안의 복음을 봅니다.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평화라는 말과 평안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에는 평화와 평안이 같은 말입니다. ‘에이레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평강, 안전, 화친, 화해, 태평 등으로 사용됩니다. 이 평화와 평안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메시아 왕국의 본질적인 특징을 나타내기에 메시아의 구원과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14절을 보시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라고 합니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의 화평이 되십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 된 것을 그의 죽으심으로 화목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원수된 것도 그의 육체로 헐어버리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을 폐하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시고 그 십자가로 원수 된 것을 소멸하시고 평안을 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안의 복음이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받은 자는 평안입니다.


요한복음 14:25~27절입니다.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께서 처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떠나신다고 하시자 제자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가서 내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합니다. 보혜사가 오시면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가르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평안을 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평안을 주시는데 이 평안을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평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면서 누린 평안은 바로 성령으로 인한 평안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고 하신 말씀은 성령으로 충만하셨기에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6:32~33절입니다.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제자들이 다 도망가고 예수님 홀로 계실 때가 온다고 하시면서 벌써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홀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고 합니다. 이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된 관계가 성령이며 처소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평안의 복음을 받은 자들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담대하라고 합니다. 세상을 이기신 분이 주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그 자리가 어디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저주 받은 죽음이며 실패의 자리로 보이는데 그것이 오히려 세상을 이긴 자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의 승리를 알지 못하면 오늘도 우리는 세상의 힘으로 세상에서 이기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안의 복음이 예비한 신을 신어야 사단을 대적하게 됩니다.


평안의 복음을 신는 것이란 바로 예수님의 평안을 우리가 덧입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예수님 홀로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이 됩니다.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가시는 그 길에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물론 십자가 앞에서 세 번이나 간절히 간구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됨에서 떨어지는 고통을 예수님만이 아시시게 이 방법 외에 다른 길이 없는지 간구하셨지만 아버지는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 길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이 다 도망갔지만 아버지가 함께 하신 다고 하신 것이 바로 성령이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통하여 자기의 영을 자기 백성들에게 부어주었습니다.


사도행전 4:17~21절입니다.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이들의 재판이 무서워 도망간 제자들이 평안의 복음으로 무장이 되니 이렇게 담대해집니다. 이 평안의 복음은 환난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이 있지만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십자가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지금 평안의 복음으로 신을 신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5:40~42절입니다. “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산헤드린 공회가 사도들을 위협하여도 굴하지 않고 계속 복음을 전합니다. 그래서 감옥에 가두었더니 감옥 문이 잠겨 있는데도 천사들이 그들을 끄집어내어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들을 잡아와서 위협하고 협박하고 매를 때리고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데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합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평안입니다. 이것이 평안의 복음이 예비한 신입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다시 잡혀서 내일 처형을 당한다고 하는데도 감옥에서 얼마나 깊이 잠이 들었든지 천사가 깨워도 알아채지 못하자 옆구리를 쳐서 깨웁니다(행12:7). 이런 것이 바로 평안의 복음이 예비한 신을 신은 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무장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으로는 결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평안의 복음이 예비한 신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이루어내신 그 평안의 복음이 이렇게 무장시키십니다.


사도행전 20:23~24절입니다.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만나서 말한 내용입니다. 성령께서 알려주시기를 각 성에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는 곳으로 갑니다. 그 길을 가는 것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합니다. 이것이 평안의 복음이 예비한 신을 신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평안의 복음이 예비한 신을 신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지만 담대할 수 있는 평안의 복음으로 무장이 되어있습니까? 저에게 종종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님처럼 설교하면 다른 교회와 노회에서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제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기둥과 같이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지 않는 한 별 간섭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있고 소문이 나고 있습니다. 아직은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지는 않습니다. 뒤로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노회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목사 제명 또는 면직을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설교를 다 공개해 놓았기에 공격하려면 얼마든지 총회의 헌법으로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문제로 겁을 낸다면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저의 능력이 아니라 복음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 갑니다.


로마서 16:25~27절입니다.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영원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나타난 이 복음우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평안의 복음이 예비한 신을 신은 사람은 복음으로 우리는 능히 견고하게 하실 그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세세 무궁토록 돌립니다.


베드로전서 1:9~12절입니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이 복음은 하늘의 천사들도 알지 못한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시종을 드는 천사들도 하나님을 대적한 천사들도 이 복음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상을 이기고 사탄을 이기는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8~17절입니다.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 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평안의 복음이 예비한 신을 신은 자의 모습들이 이러하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말씀은 우리가 이루어낼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앞에서도 보았습니다만 복음의 능력이 이렇게 만들어 내십니다. 죽을 때 까지 이렇게 되어야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졸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말씀이고 또한 그 말씀을 신실하게 이루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실천하느냐는 문제로 보지 마시고 이런 말씀을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신다고 보시기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죽었다고 복창하게 됩니다. 이 말씀들을 이 역사 안에서 우리에게 이루시고야 마시는 자기 약속에 전능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시기까지 자기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을 때 까지 악을 악으로 갚고 욕을 욕으로 갚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요소들이 이 세상에서 다 털려지게 됩니다. 결국 자신이 죄인의 괴수인줄 알기에 자기를 욕하고 핍박하는 자를 향하여 복을 빌 수 있도록 만드신 후에 데리고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이렇게 많은 원수들을 배치하여 두신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을 알면 이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별로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두려움과 난리의 소문들에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러한 사람들에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어 올 것입니다.


14~15절을 봅니다.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복입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이 근심하는 것으로 근심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평안이 마음에 누려지면 주변의 사람들이 압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평안을 누리느냐고 물어올 때에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대답하도록 준비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평안의 복음이 예비한 신을 신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여 이 두려움과 난리의 소문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참된 소망에 대하여 말하는 주의 용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