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다운받기] 

에베소서 6:13~17 구원의 투구 2014. 4. 27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마치 구원파가 질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은 자신은 이미 구원을 확보한 사람이라는 전제하에 당신은 구원을 받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에 대한 질문에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으면 구원 얻는 비결을 알려준다고 합니다. 그러한 구원의 비결을 통하여 구원을 얻어내었다고 여기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적 구원욕구입니다. 이러한 사적인 구원을 말하지만 그 내용에는 죄 사함도 말하고 거듭남의 비밀도 말하고 영혼의 구원도 말하지만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무엇입니까?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구원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구원이란 내가 주인공 되는 구원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만유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보여주기 위한 구원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우리들도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고 거저 나의 사적인 구원을 필요로만 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모습을 에베소서 2장에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라고 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들도 구원을 말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구원이란 이 세상의 풍속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성경의 구원이란 나의 이름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이름의 영광과 거룩을 위한 구원입니다.


에스겔서 36:16~28절입니다. “16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7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고국 땅에 거주할 때에 그들의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행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18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 위에 쏟아 19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여러 나라에 헤쳤더니 20 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21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4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29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 데에서 구원하고 곡식이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닥치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30 또 나무의 열매와 밭의 소산을 풍성하게 하여 너희가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여러 나라에게 당하지 아니하게 하리니 31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 3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


하나님의 구원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약속의 땅에 들여놓았지만 이들이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것뿐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이렇게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것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하나님은 구원하여 내십니다. 그 이유를 계속하여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데 너희를 위한 구원이 아니라 나의 이름을 위한 구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이름으로 언약하신 바를 이루어 내시기 위한 구원입니다. 그래서 맑은 물을 뿌리고 새 영을 부어주셔서 구원을 이루어내십니다. 이러한 구원을 받은 자는 비로소 자기 죄를 알고 자기를 미워합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구원을 얻는 자는 자신을 치장하여 가는 사람이 아니라 가면 갈수록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줄 알기에 자신을 밉게 보며 부끄러워하고 한탄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데 오늘 말씀은 구원의 투구를 쓰라고 합니다. 투구는 머리에 쓰는 보호용 기구입니다. 우리의 머리는 생각하는 곳입니다. 우리의 생각들을 향하여 사탄이 대적하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투구를 쓰라고 합니다. 사탄의 공격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을 오해하도록 만듭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구원이라는 것을 크게 두 가지로 봅니다. 하나는 자력구원 하나는 타력구원입니다. 공산주의와 불교는 자력구원입니다. 기독교는 타력구원입니다. 공산주의는 이미 망했으니 불교를 이야기하자면 불교는 전적인 자력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믿는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부처가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는 먼저 깨달은 자 이기에 너희도 사성제와 팔정도를 통하여 스스로 해탈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완전한 타력구원입니다. 그런데 완전한 타력구원이라고 하니 사람들은 안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미 선악과를 따 먹고 인과율에 갇혀있는 인간들로서는 전적인 은혜로만 구원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위를 보태는 것이 훨씬 받아들이기 쉬운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50% 사람 50%라고 이야기하면 오히려 좋아합니다. 일본의 어떤 목사는 하나님 95% 사람 5%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5%라고 하더라도 이것을 인간이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하면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가 5% 아니라 1%라고 하여도 구원이란 인간의 행함에 달리게 됩니다. 이보다 더 좋은 이론이라고 내세우는 것이 하나님 100% 사람 100%라고 합니다. 이것을 약분하면 50%대 50%이며 더 약분하면 1:1입니다. 이런 것이 오히려 자력구원으로 가게 만드는 길입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대부분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로 구원 얻고 행함으로 복도 받고 상도 받자는 이야기를 합니다. 구원을 오해한 모습들입니다.


디모데후서 1:9~12절입니다.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신 것입니다. 영원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뜻대로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인간의 일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숙제를 풀어내시는 일로 인하여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선물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에 우리가 무엇을 보태드린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방해만 한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백성들에게는 구원이 일어나는 이유는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아들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나타났는데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복음을 말하고 구원을 말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복음의 이야기들이 나옵니다만 과연 썩지 아니할 것을 복음의 내용으로 얼마나 제시하고 있습니까? 사람들마다 썩어지고 낡아지고 없어지고 불에 태워 사라질 것들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복음을 전하는 것은 고난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내가 의탁한 것을 그가 능히 지키실 것을 믿는다고 합니다. 이런 믿음이 바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졌는데 그 선물을 주신 분이 그 믿음의 결국인 구원을 능히 지키실 것을 믿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투구를 쓰는 것입니다. 구원을 투구를 쓴다는 것은 구원이란 내 하기 나름대로 구원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 전 자기 약속을 이루어내시는 결과임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35~40절입니다.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구원이란 아버지와 아들의 일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투구를 쓰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의 구원을 흔들려고 할 때에 지금까지 본 말씀으로도 충분한 구원의 투구가 됩니다.


요한복음 10:26~29절입니다.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이나 10장의 말씀에서 예수님께 오는 자가 있고 오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고 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께서 예수님께서 오게 하시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로 나누어집니다. 예수님께 오는 자는 아버지께서 보내시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는 예수님께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다 찾아내시며 또한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투구를 쓰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구원을 면허증처럼 소유한다면 음주운전하면 면허취소가 되듯이 구원이 나의 행위로 나온다면 얼마든지 구원도 취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세상의 논리에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자기 생각과 이론으로 무장되어 있는 자는 믿지 못할 내용입니다.


고린도후서 10:4~6절입니다.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이 본문은 앞에서도 보았고 다음 주에도 볼 말씀이기도 합니다만 사탄의 견고한 진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인간들의 모든 이론과 생각들입니다. 이론과 생각은 어디서 합니까? 머리가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론과 생각으로 무장되어 있는 것들을 복음으로 해체시키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이론과 생각들을 무너뜨리고  오직 주의 은혜만 의지하게 합니다. 이렇게 주의 은혜만 의지하는 자들에게 사탄은 또다시 불화살을 쏘고 자기들의 무기를 휘두릅니다. 그 공격을 막아내는 구원의 투구가 바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19~2:10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신 것을 우리로 알게 하시는데 그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자는 그가 머리가 된 교회만이 알게 됩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아는 일에 우리가 얼마나 전적으로 타락하였는지를 2:1절부터 나옵니다. 원래의 에베소서는 한 편지로 되어있기에 이렇게 장절로 되어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주 후대에 찾아보기 편하도록 임의로 붙여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결하여 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나타나고 자기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태가 어떠하였습니까?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움직일수록 악취만 진동할 뿐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긍휼과 사랑으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원이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투구를 쓴 것입니다. 누가 이 구원을 빼앗아 갈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원해서 나온 구원이 아닙니다. 달음박질 한다고 얻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원 전 약속으로 인하여 일어난 구원이기에 이 구원을 투구를 쓰라는 말은 구원이 너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임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8:28~30절입니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정하신자를 이미 영화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투구를 쓴 모습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투구가 어떤 것인지 이어지는 말씀을 계속봅니다.


로마서 8:31~39절입니다.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구원의 투구가 어떠한지 분명합니다.


끝으로 데살로니가전서 5:1~11절입니다. “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8절에서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합니다. 이미 구원이란 소망도 포함이 됩니다. 그래서 이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또한 구원의 투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간에 자기와 함께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의 날이 처음 믿을 때 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종말에 더욱 구원이라는 소망의 투구를 쓰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