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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18~20 무엇을 기도합니까? 2014. 5. 18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지난주에 성령 안에서 기도라는 말씀을 보면서 오늘 한 번 더 기도에 대한 말씀을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18절을 보시면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 또는 항상 기도하라는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잠도 안자고 기도하라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한 끊임없이 이 세상의 신이 우리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것들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의 자랑거리들을 구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기도하고 있습니까?


대구 서머나 카페에 강 장로님이 저의 고린도전서 설교를 올리고 있습니다. 제가 한 번씩 훑어보고 있습니다. 10년 전에 한 설교인데 복음을 제대로 전했는지 점검도하지만 결국 이런 일도 제 이름이 나오기에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올라오는 글들 중에 가장 조회 수가 적습니다. 이런 것이 보이는 것이 저는 저의 이름에 관심을 두고 산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죄인이라서 저는 항상 모든 일에 기도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구원하시는데 저는 아직 제 이름에 연연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를 주님은 버리셔도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의 긍휼만 항상 바라본다는 기도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원고 중에 있는 예화를 말하려고 이 말까지 하였습니다. 베르베르의 ‘뇌’라는 소설을 보면 제일 첫 장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끌려 행동하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나는 도대체 왜 행동하는가?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을 기도합니까?’입니다. 기도는 행동입니다. 도대체 무엇에 끌려 기도라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까? 베르베르의 소설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통을 멎게 하기 위하여,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생존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안락의 욕구를 추구하기 위하여” 이 네 가지 중에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이 있습니까? 즉 자기 몸의 욕망에 끌려 행동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나 예배라는 행동도 무엇을 위한 행동입니까? 소설가가 말한 것들에서 벗어난 적이 있습니까?


골로새서 3:1~6절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이 말씀을 백번은 넘게 인용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살림을 받은 자, 위로부터 거듭난 자, 성령이 임하여 죄의 와의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받는 자는 날마다 위에 것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에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이론과 생각까지 다 무너지고 그리스도에게 복종되어지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기도를 하기 싫으니 아예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정말 기도할 것뿐입니다. 우리가 육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혈과 육으로 노력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농부는 농사를 부지런히 지어야 합니다.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거름을 주어야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지 않고 기도만 한다고 농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이나 공부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위엣 것을 찾으라는 말씀에 아멘이 됩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땅의 것들이 무너지는 경험도 있어야 하고 땅의 것들에 대하여 실망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위에 것을 찾게 되는데 그러한 기도를 바울사도가 에베소서에서 두 번이나 하고 있습니다. 항상 성령으로 기도한 바울이 도대체 무엇을 구하는 기도를 하였는지 다시 봅니다.


에베소서 1:15~19절입니다.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 교회는 바울사도가 개척하고 3년 동안 목회한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에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듣고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기도의 내용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계시란 열어 보여 주셔만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 성경을 다 외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모릅니다.


신앙상담 코너의 어떤 사람이 세월 호에 관한 질문을 하였는데 제가 성경으로 답변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가 아는 하나님과 제가 말하는 하나님이 서로 달라서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다 다른 하나님을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사람이 주체가 되어서 성경을 통하여 자기 나름의 원하는 하나님을 잡아당긴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성경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 나의 가정을 위한 하나님, 우리 교회를 위한 하나님, 우리 회사와 우리나라를 위한 그런 하나님은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11:25~27절입니다.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권능을 많이 행하신 동네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 아이에게 나타내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합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도 알지 못하는데 어린 아이가 안다는 말은 계시란 사람이 연구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알려주셔야만 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이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가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합니다.


요한복음 17:1~26절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바울의 기도가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유의하여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봉독”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이 기도를 압축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아버지와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아버지를 알게 하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며 아버지를 아는 것은 곧 아들을 아는 것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아버지를 우리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지금도 이루고 계시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기도를 지금도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롬8:34).


바울사도의 계속되는 기도를 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마음의 눈이 밝아집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기도가 땅에 있는 소망들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이 세상의 신이 사람의 마음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세상의 것들로 가득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영원한 소망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도 다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닌다고 하여도 눈에 보이는 것과 세상의 썩어질 것들만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4:3~6절입니다.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이 세상의 신이 가리고 있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를 모르고 부르심의 소망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태초에 빛이 비치라고 하신 그 창조의 능력으로 복음의 광채를 알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마음의 눈이 밝아지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소망을 이루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지 않고 스스로 교회로 나온 사람들은 자신의 정성을 바침으로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자 합니다. 이것이 모든 종교의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2:15~17절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 소망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소망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나아지는 조건을 소망합니다. 이런 것은 세상이라는 조건이 무너지면 다 무너져 내리는 소망이기에 헛된 소망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에베소서에서 한 곳만 봅니다.


에베소서 5:26~27절입니다.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거룩한 신부로 세우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통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하는 것은 거룩한 신부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부동산의 규모와 사람들의 숫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지 않아서 마음의 눈이 밝아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고 그 부르심의 소망을 알도록 기도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에베소서 1:19절입니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라고 합니다. 항상 믿음의 우리의 조건이나 행위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혜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서 믿게 되었는데 이렇게 믿게 된 자들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지 알기를 바울은 기도합니다. 그 강력한 능력을 이어서 설명하는 부분이 20~22절입니다.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입니다. 이제 만유의 주가 되셨습니다. 만유의 주가 되셨기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교회만 압니다.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력으로 역사하신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만 부활 승천하셔서 보좌에 앉으신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2:5~6절입니다.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키시고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여기에 자기 백성을 함께 연합시키셔서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도 함께 죽고 함께 살리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신 것이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한 바울의 기도의 내용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영광의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아버지를 알게 하시고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그 능력이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 능력이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자기 백성도 함께 죽이시고 부활시키셔서 하늘에 앉히신 것입니다.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늘에 앉히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들을 알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바울의 기도입니다.


에베소서 3:14~19절입니다.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사도의 에베소 교회를 위한 두 번째 기도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서 이름을 주셨다는 말씀을 창조주라는 말씀입니다. 이름을 받는 쪽이 이름을 주는 쪽에 종속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에 이름을 주신 분이 주님입니다. 그 주님께 그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속사람의 강건함과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인데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기를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 두 곳의 기도 중에 우리가 평소에 하는 기도가 전혀 없다는 사실에 놀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도는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에게만 해당되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리신 분이 이런 기도를 우리에게서 받아내시겠다는 자기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 땅에서 환난을 당할 지라도 그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자기 백성에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낼 수 없는 사랑입니다.


로마서 8:35~39절입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신부라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끊어내시고 이 영원한 사랑을 주시는 것입니다. 천지 만물이 지어지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주어지는 사랑을 알도록 기도하는 것이 바울의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