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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28~8:4 깨끗함을 받으라 2015. 8. 16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8: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지난주의 말씀은 반석위에 세운 집이었습니다. 반석위에 세운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기반위에 자신의 혈과 육으로 나오는 선행과 자신의 의와 가치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자신의 존재기반으로 인하여 세워진 모든 것들은 사람들 보기에 대단해 보여도 그것이 모래위에 세운 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존재기반에서 나온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여 다 철거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그동안 이것은 괜찮은 것이라고 차곡차곡 쌓아둔 것들이 다 무너져 내려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 성령께서 말씀으로 철거해 내십니다. 그렇게 날마다 철거가 일어나는 자를 성도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7:28~29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다 마치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가르침에 무리들이 놀랍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가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율법을 해석할 때에 자기의 권위로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누구의 문하에서 배웠는가를 그 권위로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가말리엘 문하가 유명하였습니다. 그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율법의 선생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그 권위를 자기의 선생들에게 둡니다. 그래서 계속 올라가면 최종 권위는 모세에게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권위를 전혀 의지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21~22절입니다. “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들어온 율법과 그 해석과 적용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율법의 해석과 적용의 권위는 서기관들이 자기들의 스승들을 거론합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인물 중에 가말리엘 이라는 사람은 바리새인이며 율법교사로서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하는 자리에서도 신중하게 판단하라고 한 사람입니다. 바울도 가말리엘 문하의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유명한 유대학파로서 진보적인 힐렐 학파가 있고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도 있습니다. 이러한 선생들의 권위를 가지고 말합니다. 그렇게 올라가면 최종 권위는 모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그렇게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대의 어떤 율법선생들보다 높으신 분이시며 모세보다 높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감히 유대 사회에서 이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란 사람들이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고 놀라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놀라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언약을 다 이루시고 그 이루신 혜택을 성령으로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부어주시면 그제야 자신이 어떤 죄인인줄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것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면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4:12~13절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활동하게 되면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을 찔러 쪼개어 우리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지으신 것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드러나게 되면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든지 아니면 그 복음을 전하는 자를 돌로 치든지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돌로 치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 극소수였습니다. 수많은 자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아를 기대하면서 먹고 배부르며 병 고침을 위하여 따라 가다가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이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시며 십자가를 말씀하실 때에 다 도망갔습니다. 도망가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 메시아는 필요 없다고 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통하여 예수님의 권세 있는 가르침에 놀라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그 권세가 임하게 되면 자신이 전적인 죄인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산상수훈을 통하여 예수님은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하는 그들을 벌거벗겨 버리시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하여 벌거벗겨 지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히브리서 4:14~16절입니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자신이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는 자들은 어디로 갑니까?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입니다. 이 분에게로 가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시지만 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험 받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체휼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말씀으로 비춤을 받으면 오직 주의 긍휼을 바라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됩니다. 그 은혜의 보좌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는 그 주님 안에 피하여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8:1~4절을 봅니다. “봉독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는데 가장 먼저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가 나병환자입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절하며 아뢰기를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 고백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면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자신은 나환자가 되어 마땅한 것이며 자신의 그 어떤 것으로도 나병을 고칠 수 없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에 그 나병환자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즉시 그의 병이 나아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합니다.

 

산상수훈을 마친 후에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나환자를 치료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배치가 우연하게 일어난 일이겠습니까? 마태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겠습니까?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배치된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산상수훈을 통하여 그동안 율법적인 의로 깨끗하다고 여기는 자들을 나환자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통하여 더욱 고차원의 율법 지킴의 행위로 나아가면 간디나 슈바이처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부정한 죄인임을 알지 못하기에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 저를 깨끗하게 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환자를 깨끗하게 하셨는데 왜 제사장에게 가서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리라고 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기까지는 율법을 다 지키십니다.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을 따른 해석으로 보니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는 자처럼 보였지만 그 율법의 정신과 그 속의 뜻까지 다 이루시고 계십니다. 모든 율법의 일점일획도 남김이 없이 예수님께서 다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율법의 완성 자가 제사장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임을 지금 계시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나병환자를 진단을 하지만 나병을 고칠 수 는 없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단위로 나병을 진단하여 진 안에 들여놓을지 격리시킬지 판단만 합니다.

 

레위기 13:1~8절입니다. “봉독 나병의 진단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제사장이 일주일 단위로 판단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본문과 상관없이 성경을 차례대로 읽어나가고 있는 본문을 보는 중에 올해 처음으로 레위기 13장에서 본 내용이 있습니다. 전에도 차례대로 읽어나갈 때에 잘 보이지 않았던 부분입니다. 그런데 나병을 진단할 때에 나병이 온 몸이 다 퍼졌으면 정하다고 진단을 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너무 놀라워서 마태복음 오늘 본문을 설교하면 말씀드리기 위하여 마태복음에 레위기 13:12~13절을 메모 해 두었습니다.

 

레위기 13:9~13절입니다. “9 사람에게 나병이 들었거든 그를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10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피부에 흰 점이 돋고 털이 희어지고 거기 생살이 생겼으면 11 이는 그의 피부의 오랜 나병이라 제사장이 부정하다 할 것이요 그가 이미 부정하였은즉 가두어두지는 않을 것이며 12 제사장이 보기에 나병이 그 피부에 크게 발생하였으되 그 환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졌으면 13 그가 진찰할 것이요 나병이 과연 그의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다 희어진 자인즉 정하거니와

 

사람에게 나병이 들면 제사장에게 데려갑니다. 진찰을 해서 나병이라고 진단이 나면 그를 부정하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12~13절을 보시면 제사장이 그 환자를 볼 때에 나병이 피부에 크게 발생하여 그 환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졌으면 그가 진찰하여 정하다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나병으로 피부가 부분적으로 희어지고 그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우묵하면 나병이라고 부정하다고 해야 하는데 그 나병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퍼졌으면 완전히 부정하다고 해야 하는데 오히려 정하다고 선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래서 여러 주석을 찾아보니 이런 말씀은 수수께끼 같은데 여기서 의학적인 측면은 부차적인 것이 분명하다고 하거나, 전신에 퍼졌으면 곧 딱지가 않고 나아질 것이기에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메튜 헨리라는 주석가는 이것을 상징적으로 봅니다. 그래서 사람이 범죄 할 경우 그 죄를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고백하고 회개하면 정결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고 하였습니다(요한일서 1:9).

 

여러분은 어느 해석이 마음에 드십니까? 저는 메튜 헨리의 주석이 마음에 듭니다. 그 이유는 나병이 들면 사람들이 사는 진 안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을에서 격리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을에서 격리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질병보다 나병에 대한 내용이 가장 길게 나오며 그 정결규례가 복잡하고 깁니다. 그리고 나병이 들면 사람들이 자기에게 접근을 하면 자신의 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쳐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병이 있는 사람과 접촉을 하면 접촉한 사람도 부정하게 되기에 나에게 접촉하지 말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나병은 물론 그 당시에 실제적인 질병이기도 하지만 단지 신체적인 질병의 문제만이 아니라 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가장 놀라운 내용이 온 몸에 나병이 다 퍼지면 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처음 고쳐주신 환자가 나병환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통하여 자신이 나병환자와 같은 자임을 알게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나병환자는 모든 것이 다 부정한 것입니다. 그와 접촉을 하면 전부 부정하게 됩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행하여 온 모든 것이 다 부정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환자와 접촉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음성 환자와 잠시 손을 잡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거리낌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화장실에 가서 손을 열심히 씻었습니다. 우리 노회 안에 나 환자 촌에서 사역하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물론 나병이 다 나은 음성 환자 집성촌입니다. 그곳에 가면 목사를 테스트 해 본다고 합니다. 일그러진 손으로 음식을 해서 밥상을 차려 와서 먹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다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음성 환자와 접촉을 해도 거리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그런 나병환자가 어떻게 나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적으로 나병이 들면 오히려 정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나는 전적인 죄인이라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그를 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상설교를 하시고 가장 먼저 만난 환자가 나병환자입니다. 물론 다른 복음서는 다른 관점이 있기에 그렇게 합니다만 지금 마태복음은 일차청중이 유대인들입니다.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자신들이 나병환자와 같음을 보게 된다면 이것이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본문 3~4절을 다시 봅니다.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사람으로 오셨지만 유일하게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룩하신 분이 그 나환자에게 손을 대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부정하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부정함을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환자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시니 즉시 나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는 모습입니다. 제사장들은 나병을 진단만 하지 고칠 능력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왜 제사장에게 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한 것입니까?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완성하시기 까지 율법의 규례를 지켜 행하십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가 제사장에게 가면 분명히 제사장이 나병환자로 부정하다고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깨끗하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다는 말을 할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깨끗하여지면 어떤 제물을 드리는지 레위기 14:1~9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3 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나병 환부가 나았으면 4 제사장은 그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명령하여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5 제사장은 또 명령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6 다른 새는 산 채로 가져다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7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살아 있는 새는 들에 놓을지며 8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영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이레를 머물 것이요 9 일곱째 날에 그는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의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이렇게 정결예물을 드리고 몸을 씻고 온 몸의 털을 다 밀고 나서 진영 안에 들어올 수는 있지만 제사에는 아직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레위기 14:10~20절입니다. “봉독 제사장의 이제는 어린 숫양 두 마리를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고운 가루 십분의 삼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취하여 짐승의 피와 기름을 정결하게 된 사람의 오른쪽 귓부리와 엄지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바르게 합니다. 이러한 예식은 제사장 위임식과 같은 모습입니다(8:23, 29:20). 그러면 나병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것은 제사장과 합쳐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따라 된 제사장은 결코 나병을 정결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완전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 안에 들어오는 예물만이 아니라 제사에 참여하는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가난하면 이러한 예물을 드리지 못합니다. 그런 자들은 산비둘기나 비둘기로 대체하여도 됩니다. 그렇게 짐승들의 피 흘림을 통하여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 구약의 정결규례입니다. 이 모든 정결하게 하는 규례를 예수님은 십자가로 단번에 영원토록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6:1~7절입니다.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웃시야 왕은 하나님의 은혜로 강하여졌습니다. 그런데 교만하게 자신이 성전에서 분향하려다가 나병이 발병된 자입니다. 그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뵙고 나서 하는 말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병환자는 입술을 가리고 자신을 부정하다고 외쳐야 합니다. 레위기 13:45절입니다.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지금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나병환자로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자신이 부정한 자로 드러났을 때에 제단 숯불로 그 입술을 지지면서 정하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나병환자를 예수님께서 손을 대시면서 깨끗하라고 말씀하시기 즉시에 깨끗하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을 통하여 자신이 전적인 나병환자임을 알게 된다면 이런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가서 주님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는 고백을 할 것입니다. 산상수훈만이 아니라 모든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부정함과 더러움을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십자가로 단번에 영원산 속죄를 이루신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주님 앞에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정하다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을 예수님은 그 부정함을 대신 담당하시면서 너는 깨끗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레위기 13:14~17절입니다. “14 아무 때든지 그에게 생살이 보이면 그는 부정한즉 15 제사장이 생살을 진찰하고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 그 생살은 부정한 것인즉 이는 나병이며 16 그 생살이 변하여 다시 희어지면 제사장에게로 갈 것이요 17 제사장은 그를 진찰하여서 그 환부가 희어졌으면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그는 정하니라

 

나병이 전신에 퍼져서 정하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에게서 다시 생살이 나오면 부정한 자가 됩니다. 우리는 병이 나아서 생살이 다 돋아나야 깨끗하게 나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병으로 전신에 퍼진 사람에게서 다시 생살이 나오면 부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도대체 질병을 다루는 학문으로 해석이 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수수께끼 같다고 독일성서공회 사람들이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전체의 말씀을 통하여 이 말씀도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되는 것이 정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죽은 내가 다시 살아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 외에 다른 의를 챙기려고 나오는 이것이 생살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살이 나오면 다시 부정한 자가 됩니다.

 

디모데전서 1:14~17절입니다.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이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로 고백하는 것은 자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병에 든 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구원하여 내신 자들에게서 나오는 고백이며 찬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