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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5~13 백부장의 믿음 2015. 8. 23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산상설교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실 때에 가장 먼저 예수님께 나아온 자는 나병환자였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말씀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산상설교와 구약 레위기의 나환자 규례를 연결하여 보았습니다. 산상설교를 다 듣게 되면 자신이 나병환자임을 알게 되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로 나병환자임을 알게 됩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이 나병환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전신에 나병이 다 퍼진 자를 율법에서 정하다고 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며 그 모든 부정함을 자신이 담당하심으로 즉시로 그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입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이방인 백부장을 통하여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나병환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성전에 나아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은 개종을 하면 이방인의 뜰 까지는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8장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치유과정은 성전에 나가기에 전적으로 불가능한 자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유대인이기에 성전에 나갈 수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병으로 인하여 성전에도 갈 수가 없는 자입니다. 옛날 성전에서는 나병환자를 고칠 수가 없고 진단만 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은 그 나병환자를 친히 치료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으로 인하여 깨끗함을 받는 자가 그리스도의 몸 된 성전이 됩니다. 이런 성전은 사람이 결코 세울 수가 없기에 예수님께서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백부장입니다. 백부장이란 군인 백 명을 지휘하는 장교입니다. 우리나라 군대식으로 말하면 소대장 정도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이스라엘입니다. 이러한 백부장 정도이면 대단한 권세가 있는 사람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칼을 찬 순사가 온다고 하면 우는 아이가 울음을 그칠 정도로 공포의 대상입니다. 순사가 아니라 순사의 끄나풀만 되어도 대단한 위세를 떨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식민지 나라의 한 사람을 주여라고 부릅니다. 주님께 나아온 이유는 자신의 하인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 심히 괴로워 하니 고쳐달라고 합니다. 자기의 문제도 아닌 자기의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나왔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면서 백부장의 대단한 겸손함과 착함을 말합니다. 자기의 가족도 아닌 자기 집의 종이 병든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백부장이 친히 예수님께 나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만하시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것을 믿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인하여 그 백부장의 하인이 고침을 받았고 또 이런 믿음을 칭찬했으니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지자는 말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설교하는 것을 모범적(模範的) 설교라고 합니다. 성경의 내용들을 모범이 되는 본보기로 보고서 우리도 그런 모범을 따라하자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성경은 또 하나의 경전이나 윤리도덕의 교과서처럼 사용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부터 다시 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옵니다. 예수님께서 우연히 가버나움에 가신 것이 아닙니다. 이 백부장을 만나기 위하여 가신 것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수만은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많은 기적도 목격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이방인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만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 나아와서 주여 저의 하인이 병들고 괴로워하오니 고쳐달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백부장의 집이 누추하였을까요? 백부장 정도이면 좋은 관사에서 살 것입니다. 그러면 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을까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본 것입니다. 소문만 듣고서 알아본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다고 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입니다. 저의 집에 오심을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은 예수님 앞에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를 안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만 하시면 환자를 보지 않으셔도 고칠 수 있는 분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자신의 장교 직에 비유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자신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고 자기 아래도 군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고 하면 온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도 상관이 시키면 명령에 순종할 수밖에 없고 자기 부하들도 자기의 명령에 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합니다. 군인들은 상관의 명령에 죽음도 불사하고 순종하는 것이 군인입니다. 이런 말을 백부장이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자기의 하인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본 것입니다.

 

10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예수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방인 백부장의 무엇을 보고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런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 백부장의 믿음이란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런 믿음이 이방인 백부장에게서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 본문의 평행구절인 누가복음 7:1~10절을 봅니다. “봉독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마태복음에서는 백부장이 친히 온 것으로 되어있지만 누가복음은 자신이 감히 예수님께 나아갈 자격도 없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유대인 장로들을 대신 보낸 것입니다. 유대인 장로들은 백부장이 이방인이지만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유대인 회당도 지어준 사람이기에 이 사람의 청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 백부장의 공로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청원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사람의 집으로 가자고 하면서 가고 있습니다. 그때 백부장이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또 사람을 보냅니다. 자신이 직접 오지 않고 벗을 보내는 이유는 6~7절을 보시면 제가 감히 주님 앞에 나아갈 수도 없어서 장로들을 보낸 것이라고 하면서 거저 말씀만 하시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본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백부장이 보낸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그 종이 이미 나았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과 백부장이 직접 대면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누가복음은 직접 대면하지도 않는 상황입니다. 마태복음은 1차적인 독자를 유대인들에게 비중을 둡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이방인 백부장의 어떤 선행도 언급이 없이 예수님을 만나서 청하고 고침을 받는 장면은 유대인들에게 더 충격적인 내용입니다. 누가복음 식으로 마태복음에 기록이 되었다면 유대인들의 자부심이 더 높아질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유대인을 사랑하고 회당도 지어주고 이렇게 나와야 마땅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이방인들을 1차 독자로 생각한다면 이방인들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세가 너무 낮아진 모습입니다. 오히려 마태복음 식으로 이방인이 나가면 더 좋아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감히 예수님께서 나아갈 수도 없는 자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그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슬피 울며 이를 갈일만 남아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방인 백부장의 이런 믿음이 어떻게 나오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중에도 없는 이런 믿음이 나오는 것은 백부장의 능력이 아닙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기에 주님께서 이런 백부장의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아브라함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정말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불러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신 것은 모든 믿음이란 이런 식으로 주어지는 것을 이미 아브라함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4:17절입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아브라함이 믿은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나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은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온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나오는 모든 믿음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복음서에서 나타는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이나 네 믿음대로 되라는 말씀은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되는 것이며 죽은 데서 살려내시는 방식이 아브라함의 믿음이며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11~12절입니다.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가지고 자신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이라서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본 자손들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지만 오히려 이방인들이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의 분노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일 뿐 아니라 모세를 통하여 받은 율법도 지키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방인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이 말씀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격동시키는 말씀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은 이미 세례요한도 회개하라고 하면서 외친 내용입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3:9). 심지어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8:44).

 

유대인들과 이방인 백부장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은 누가복음에서 보았습니다만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줄 만한 선행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유대인들의 회당을 지어준 그런 일을 자신의 업적이나 공로로 생각도 못합니다. 감히 예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죄인인줄 알기에 유대인 장로들을 대신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벗들을 보내어 자기의 집에 오심을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이미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한 자들의 공통적인 고백입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음을 아는 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들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지금 그들 눈앞에 하나님이 계시는데도 알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의 율법적의 행위를 자기의 의로 가지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자신들의 의로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방인들도 주께로 돌아올 것을 구약은 이미 증거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2:1~3절을 봅니다. “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말씀을 유대인들은 문자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모든 열방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귀한 보석을 들고 오리라는 말씀들이 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날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언의 말씀들의 성취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지 못하고 문자적으로 보면 아직도 유대인들처럼 예루살렘에 메시아야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모든 열방이 그곳으로 몰려올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문자대로 보면 여호와의 전의 산 곧 시온산 예루살렘이 온 열방에 우뚝 설 것이며 만방이 그리로 몰려올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이라는 이 말씀을 지금 예수님께서 성취하고 계시는 장면이 바로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요한복음 4:21~23절입니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사야 선지자 예언의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예배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병환자나 이방인 백부장이나 사마리아 여인이나 다 어떤 자들입니까? 유대인들의 기준으로 보면 구원을 얻지 못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주님을 알아보고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예수님께서 이루어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25:6~8절입니다. “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7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망을 영원히 멸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이방인들이 알고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그 복음의 일이 열방으로 증거 되는 것이지 지금의 예루살렘으로 사람들이 몰려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시편 107:1~3절입니다.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3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동서남북 각 사방에서 모으신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그러나 그들만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열방에서 올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동서로부터 많은 자들이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겠지만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의 동서남북에서 몰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 백부장도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3:5~7절입니다. “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런 말씀들은 다 유대인들이 일차대상이 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다시 돌아올 것을 말씀하시면서 동서남북에서 모아 오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고 합니다. 그를 하나님이 지었고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인 백부장이 지금 예수님께 나아온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가 됩니다. 이방인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본 것이 그 이방인에게 구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영광 곧 그 아들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우리를 위한 구원이 아닙니다.

 

이사야 43:21~25절입니다.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22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 23 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제물로 말미암아 너를 수고롭게 하지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말미암아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하였거늘 24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하게 하지 아니하고 네 죄 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이사야 43:21절만 외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할 일을 많이 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야곱 곧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부르지도 않고 괴롭게 여겼으며 제물로 공경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으로 수고롭게 하거나 괴롭게 하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그들의 죄 짐으로 수고롭게 하며 그 죄악을 하나님을 괴롭게 한 일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한 일은 괴롭힌 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십니까?

 

이사야 43:25절입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자기를 위하여 도말하시고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이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 허물을 도말하시고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자기들의 의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예수님은 산상수훈으로 그들의 상태를 나병환자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자기 자신이 전적인 죄인이라고 여기며 주님의 긍휼을 구하러 나오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질문해 봅시다. 나는 전적으로 죄인이 맞습니까? 선이나 의라는 것은 조금도 없는 전신에 나병이 든 사람처럼 전적으로 부정한 자임을 인정하십니까? 이런 자들은 전적인 은혜만 의지합니다. 이런 자들의 모습이 나병환자를 치유함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 백부장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자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감히 자기의 집에 모실 수도 없는 그런 분임을 알고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런 은혜의 선물을 받은 자들은 자신이 전적인 죄인이기에 전적인 은혜만 의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말씀이 참된 복음으로 들립니다. 이러한 자들은 우리를 위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이름 곧 그 아들의 희생과 공로를 높이기 위한 구원임을 알게 됩니다.

 

로마서 11:17~20절을 봅니다.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이방인 백부장에게 이런 믿음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낮은 자임을 알고 두려워하여 감히 그 앞에 나아오지도 못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율법적인 의를 가지고 있는 만큼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으로 통하여 오늘 우리의 믿음 없음과 잘못된 믿음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믿지 아니함으로 꺾이고 이방인이 믿음으로 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이란 자기의 행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고 믿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자기의 공로를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혼자서 회당을 다 지어주어도 주님을 감히 만날 수도 없다는 사람입니다. 저희 집에 오심을 감당할 수가 없다는 이 주님을 오늘 우리도 말씀으로 만나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