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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14~17 말씀을 이루심 2015. 8. 30

 

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816일 부산의 이삭교회 헌신예배 설교를 했습니다. 원고에는 없는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이삭교회에 대한 이름입니다. 이삭 교회의 홈페이지 초기화면에 웃음으로 가득한 세상을 꿈꾸는 이삭교회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삭의 이름 뜻이 웃음이지만 그 이름이 주어지는 배경은 아브라함도 사라도 자녀를 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웃었습니다. 이런 웃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약속이 성취되는 자리는 인간의 비웃음과 배반과 악함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미 창세전에(1:3), 영원 전에(딤후1:9) 약속된 내용입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들은 다 아버지와 아들이 언약하신 그 내용들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상설교를 하신 것도 그 이후에 병자를 고쳐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과정들입니다. 산상설교 후에 나병환자를 고쳐주시고 이방인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시고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십니다. 이 모든 일들은 17절의 말씀대로 이사야 선지지의 말씀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지금 이 장면은 가버나움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본문과 평행구절인 마가복음(1:29-34)과 누가복음(4:38-41)을 보면 그 날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 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온전하게 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소문이 갈릴리에 퍼집니다. 그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베드로의 집으로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예수님께서 손으로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곧 일어나 예수님께 시중을 들었습니다. 랍비들의 전통에 의하면 남자가 이렇게 여자를 만지는 것도 안 됩니다. 더구나 열병에 들려있으니 더욱 부정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의 손을 잡으시자 바로 회복되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위하여 섬긴 것입니다.

 

나병환자도 이방인 백부장도 여인도 유대 사회에서는 소외계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베드로의 장모는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이 율법을 지킨다는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자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신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이 날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이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입니다. 병자를 데리고 오는 것이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기에 안식일이 끝나는 저녁에 데리고 옵니다.

 

16절을 보시면 저물매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저물어 해가 질 때에라고 합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고 안식일에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데려오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을 아무리 지켜도 그들에게 참된 안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시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신다는 소문이 나자 해가지자 말자 많은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와 병든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켜서 안식이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나아와야 안식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와 병자들을 말씀으로 고치십니다. 말씀으로 고쳐주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7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귀신 들린 자와 병자를 고쳐주시는 이 장면을 마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증언 합니다. 이런 증언은 마태의 능력이 아니라 주의 영이 임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 각주가 달려있습니다. 각주를 보면 이사야 53:4절로 되어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그는 우리의 질병과 고통을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가지고 은사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나 번영신학을 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질병과 고통이 없다는 것입니다. 질병과 고통이 오는 것은 예수님을 잘 못 믿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은 교회나 주의 종이라는 자들에게 얼마나 헌신 충성 봉사를 하느냐에 달렸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질병과 고통이 없습니까? 당신은 죽지 않습니까? 작년에 손기철 장로를 경남기독신문 주관으로 마산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그때 그 사장에게 우리교회 집사가 잘 아는 사람이라서 애매모호한 환자 말고 정말 확실한 환자 고쳐줄 수 있는지 물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오늘날 이런 말씀을 가지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에게 고침을 받아도 죽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신다는 것은 단지 귀신 들린 자가 온전해지고 병자가 고쳐지는 그것으로 끝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치유를 받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생물학적인 죽음을 다 당하였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질고를 담당하셨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이 땅에서 질고가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셨다는 것이 결국 무엇으로 가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만이 아니라 사복음서 전체의 결론이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십자가로 향하고 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으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은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가십니다. 그래서 자주 예루살렘으로 가시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하면서 누가 높은 자리 차지할 것인지로 서로 시기 질투하면서 따라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것임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단지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죄 사함을 위한 길입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마태복음 20:28절을 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 섬김의 자리가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그 섬김으로 많은 사람을 대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병이나 고침 받고 떡이나 얻어먹고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려고 예수님께 나아온 자들은 다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한 부분의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병을 고쳐주셨으니 오늘도 예수님을 믿으면 병이 고침을 받는다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그 병을 고쳐주심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려고 하시는지를 봐야합니다. 그러므로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내가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다른 표적은 다 이 표적에 수렴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표적을 말한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결론 나야 마땅합니다.

 

마태복음 26:28절입니다.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최후의 만찬에서 떡은 자신의 몸이라고 하시고 잔은 자신의 피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은 새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이루시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다 이루실 자리는 십자가입니다.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일이라고 한 내용을 마태복음에서만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21~23절입니다.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리아에서 천사가 수태고지 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도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천사가 동원되고 마리아와 요셉이 동원됩니다. 이러한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내용을 마태복음에서만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2: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애굽에 피난 가시는 것도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2: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베들레헴의 유아 살해사건도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애굽에서 나와서 나사렛에서 사시는 것도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4: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시는 것도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12: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이방인들이 주의 이름을 바라볼 것도 예언된 말씀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13: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말씀을 이루시는 일입니다.

 

[13:35]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비유로 말씀하시는 것도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21: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도 스가랴서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예수님께서 잡혀 가시는 것도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26: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예수님을 버리고 제자들이 도망가는 것도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27: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가룟 유다가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파는 것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모든 선지자의 말씀들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증거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5:18절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율법의 일점일획도 다 이루신 자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심으로 다 이루실 그 내용이 이사야서의 고난 받은 종의 노래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성령의 감동으로 구약의 말씀들이 이렇게 이루어졌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사야서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 전체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 52:13~15절입니다. “13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14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15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복음은 놀라운 소식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사람보다 상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온 나라와 왕들을 놀라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보며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고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이야기가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이사야 53:1~3절입니다.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1절을 보시면 이 놀라운 소식을 누가 믿었느냐고 물으면서 시작합니다. 전혀 예상도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자기의 일을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를 귀하여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분이 그리스도가 되신 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오신 것입니까?

 

4~6절입니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마태가 인용한 구절이 4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체를 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루신다는 것은 모든 구약의 예언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이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죄를 다 담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자들입니다. 사사기 식으로 표현하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는 분이 있습니까? 언제 한번이라도 제대로 예수님을 사랑한 적이 있습니까? 언제 한번 이웃을 뜨겁게 사랑한 적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을 주께서 대신 담당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른 소망이 없는 자임을 이런 말씀이 증언합니다.

 

7~9절입니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장면을 눈앞에서 보듯이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증언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곤욕과 심문을 당하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취급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 사랑받던 제자들도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실패로 보고 도망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으심이 마땅히 형벌 받을 하나님의 백성을 대신 한 형벌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을 여호와께서 원하셨다고 합니다.

 

10~12절입니다. “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의 이 예언을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계시는 현장입니다. 그런데 단지 우리의 질고만이 아니라 우리의 허물과 죄를 위하여 대신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결국 십자가로 다 이루십니다. 그 십자가로 다 이루신 것을 자기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그 선물을 받은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알게 됩니다. 이 십자가는 너무나 놀라운 신비이며 역설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불러내십니다. 내가 들리면 나 있는 곳으로 이끌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성도가 가는 길은 십자가로 가는 길입니다. 결코 세상 영광의 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함께 죽은 자는 십자가의 길로 갑니다. 그러나 이 길의 끝에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시 잠간의 쉼을 맛보면서 영원한 안식을 향하여 순례를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심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이들의 종착역을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1:1~4절입니다.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미 이 말씀들이 묵시 속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말씀의 성취를 이 역사 속에서는 부분적으로 맛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그 다 이루심을 이 역사 속에서 땅 끝까지 증거 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천국복음은 쉼 없이 땅 끝까지 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다시는 사망과 애통과 곡하는 것과 아픈 것이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셔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이루어내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도 말씀을 이루시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내시는 결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은 오직 선물로 주어진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의 특징은 자기를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 분의 일하심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현재의 고난과 애통과 곡하는 것과 아픈 것과 사망조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음을 알고 믿음으로 견뎌낼 수가 있습니다. 이 은혜로 오늘 하루도 살아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