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12~13 두렵고 떨림으로 2018. 3. 11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태어나자 말자 짐승의 사회에서 살면 짐승처럼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어려서 숲에서 잃어버린 아이를 늑대가 키워서 늑대처럼 살아간 소년의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늑대에게서 보고 듣고 배운 것뿐이기에 늑대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도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닌 어떤 사람의 사상과 이론의 말만 들으면 그런 사람의 말이 우리의 믿음이 됩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 하겠지만 성경을 보면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속성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높아져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시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하신 이유는 빌립보 교회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안에 다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복음으로 다툰 것이 아니기에 한 마음을 가지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권면하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아담을 비교해 봅니다.

 

처음 사람 아담은 사탄의 유혹을 받을 때에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를 탐한 것입니다. 그 결과 모든 아담에 속한 자들은 다들 이런 속성을 가진 타락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아담의 타락이 우리 안에 있다는 증거는 우리가 다 높아지려고만 한다는 것입니다. 성장, 승진, 확장, 발전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세상에서 선이라고 하고 복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온갖 종교계에서도 이런 것을 신의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조차 무엇을 축하하는 것을 보면 온통 세상의 가치관을 따른 성공신화를 축하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난 수요일 저녁의 결론인 고린도전서 7장을 보면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그대로 지내라고 합니다. 너희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입었다면 그 종에서 자유 할 수 있다면 자유해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본에서는 그냥 종으로 있어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당시의 종이란 노예입니다. 노예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평생 노예로 살아도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결혼하지 않은 자는 그냥 지내도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있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여기고 살라고 합니다. 여기서 성장, 성공, 확장, 발전의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무려 1시간 20분을 하고서도 집에 가서 이 내용에 대하여 집사람과 다시 이야기 했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그대로 지내도 된다는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얼마나 놀라운 완성이며 자유입니까!

 

처음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합니다. 이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을 죄라고 고발해야 하는 교회에서조차 날마다 설교하는 내용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자녀의 성적이 높아지기를 원하고, 남편의 월급이 올라가고 승진하기를 기도합니다. 목사는 그런 사람들의 욕심을 알기에 그렇게 되려면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요셉처럼 총리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수많은 성공신화의 주인공들을 예로 들어서 말합니다. 그러면 나도 그렇게 되기 위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덤벼듭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이라는 배를 섬기는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다(3:18,19).

 

고린도전서 15:45~52절입니다.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아담뿐입니다. 처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 있습니다. 처음 아담은 땅에 속한 자이며 마지막 아담은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혈과 육에 속한 아담은 땅에서 났습니다. 이 아담은 살려주어야만 사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창조된 아담이 타락함으로 인하여 땅에 속하여 썩을 것만 구하고 찾는 자가 되었습니다. 인류가 지금 70억이 넘었지만 모두가 처음 아담 안에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아담은 하늘에 속한 분이십니다. 이 분은 살려주는 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난 자들은 하늘에 속한 자들이 되며 이들은 썩을 것을 구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생명과 썩지 아니할 내용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된 자들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표준 새 번역으로 보겠습니다.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대로,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13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염원하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오늘 제목을 두렵고 떨림으로라고 잡았습니다. 이 제목만 보고서도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생각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은 교회역사 2천년 동안 논란이 있는 말씀입니다. 12절만 보면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는 내용으로 보이는데 13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알미니안은 12절을 강조하고 칼빈주의자는 13절을 강조할 것입니다. 마치 요한복음 1:12절과 13절 같습니다.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영접은 혈과 육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난 자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마음이 갑니까? 저의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주로 13절에 방점을 둘 것입니다. 그런데 12절을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은 동일한 말씀입니다. 12절을 무시하지 못하기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이 말씀이 나의 개인적인 구원이 취소될 수 있을까를 두려워한다면 이 본문을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의 구원의 개념도 나의 개인적인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이지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워낙 팽배하기에 사람과 얽히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혼자 예수 믿고 혼자 구원 받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구원관이 인간의 사적 욕심을 위한 구원관이라는 말입니다.

 

에스겔 36:21~23절을 봅니다. “21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일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일하십니다. 너희를 위함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은 자신의 언약을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언약이란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하신 내용이며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을 통하여 언약하신 내용이며 이미 구약에서 새 언약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만 새 언약을 말한 것이 아니라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있는 중에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도 새 언약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본 대로 하늘에 있는 자나 땅 위에 있는 자나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원이란 나의 사적인 구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곧 그 생명을 주셔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모아서 자신의 몸을 만들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이기에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한 마음을 가지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12~13, 24~27절입니다.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이 세상살이에서 내 개인이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겠다는 그런 구원을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구원이며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입니다. 이것은 한 성령을 받아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여기에는 인종이나 신분이나 그 어떤 인간의 외적인 차별이 없는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의 각 지체들이 하나의 몸을 위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몸의 지체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몸 안의 모든 장기들이 다 한 몸을 위하여 협력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몸입니다. 세포로 말하면 약 60조의 세포들이 한 몸을 이룹니다. 그리스도의 몸도 우리의 몸처럼 한 몸인데 무슨 상급차등이 나오며, 무슨 개인 구원이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몸의 기능을 모르고 개인상급차등을 주장하면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경쟁하게 만든다면 정상적인 세포가 아니라 암과 같은 세포입니다. 남 죽이고 자기 사는 이야기는 암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죽여 죄인을 살려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시고 그 마음을 품고 살도록 성령을 보내시며 이렇게 말씀을 우리게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이제 이 말씀을 읽으면 느낌이 좀 달라질 것입니다. 내가 개인적인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또 다른 율법적인 내용을 추가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우리의 부르심이 얼마나 크고 높으신 분의 부르심인지 그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빌립보 교회에 함께 있으면서 전할 때에는 복음의 현장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없는 지금도 여러분들이 주님의 부르신 그 크고 놀라운 구원에 대하여 주의 깊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13절을 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바로 이 말씀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있을 때에는 이런 말들을 곁에서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떠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없어도 그 구원을 일을 시작하시고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또 오해하여 우리 안에 소원이 생기면 그 소원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그 소원성취를 이루어 내려고 합니다.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 안에 넣어주신 구원의 갈망이 하나님의 힘으로 완성됨을 말합니다. 그래서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갈라디아서 1:1~5절입니다.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갈라디아 교회에 바울사도가 서신을 보내면서 자신이 사도됨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구원을 설명하기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이 악한 세상이며, 이미 죽은 세상임을 알고 이 세상에서 건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구원을 우리가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서도 잘 먹고 잘 살다가 저 세상에서도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그런 이기적인 구원관으로 인하여 복음이 왜곡됩니다.

 

빌립보서 1:6절을 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누가 시작하신 것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 일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시고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우리 안에서라는 말은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신 그 너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함께 하겠다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이제 나는 구원을 얻었으니 내 마음대로 살아도 구원은 이루어진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구원에서 탈락된다는 그런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구원관 자체가 자기를 위한 이기적인 구원관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구원이란 나의 이름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구원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구원을 시작하셨으니 반드시 이루어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일하심이 일어난 자라면 당연히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 일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현현은 두려움과 떨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율법적인 공포심으로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영광스러운 구원에 참여된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이냐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고 함께 하늘에 앉혀졌다는 이 어마 어마한 구원의 일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기쁘신 뜻이 그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자기와 함께 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심이며 그 아들의 영광을 위한 창조이며 구원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5절입니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사도가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면서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할까 해서 두려워한 것입니다. 고린도에 오기 전에 그리스 아테네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철학의 도시에서 자신도 철학적으로 응대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지만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지역에서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며 이방인들에게 어리석은 십자가의 도만 전한 것입니다. 이 복음을 바로 전하기 위하여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자신의 전도가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않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있는 믿음이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미가서 6:6~8절입니다.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엄청난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바치거나 내 영혼의 죄로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마음대로 사는 것도 아니고 구원에서 떨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와 함께 겸손하게 동행하는 것이 두렵고 떨림으로 그 구원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