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1~12 죄를 사하는 권세 2018. 9. 30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1)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신다는 소문이 나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무리를 피하시면서 한적 한 곳으로 가셔서 전도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사람을 많이 모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도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회개보다는 예수님의 병고쳐주심의 기적을 보고 몰려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그래서 무리들과 떨어지셨지만 그러나 마을로 오지 않을 수는 없기에 가버나움에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2:1~2절입니다. 수 일 후에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오십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셨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셨고 나병환자도 고쳐주셨습니다. 이러한 가버나움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집에 들어가십니다. 이 집이 누구의 집인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그 집으로 모였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됐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도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런데 무리들 때문에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립니다. 여기서 지붕이란 우리나라의 영구적인 지붕과는 다릅니다. 나무기둥과 가지를 걸치고 그 위에 진흙은 바르는 것이라서 정기적으로 고쳐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쉽게 뜯어낼 수는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의 지붕을 걷어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볼 때에 이 사람들이 믿음을 강조합니다. 네 명의 사람의 믿음인지 환자를 포함한 다섯 명의 믿음인지는 모르지만 이들은 예수님께 가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막혀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으니 옆의 계단을 통하여 옥상으로 올라가 지붕에서 환자를 내린 것입니다.

 

5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믿음이란 그들이 예수님께 나오면 병이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그 믿음이 남의 집 지붕을 걷어내는 일을 한 것입니다. 나중에 손해배상을 해 주더라도 자기 친구의 병 고침이 더 간절하였기에 이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의 행위를 믿음이라고 하시면서 소자여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병자나 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이 왜 왔습니까? 병 고침을 받으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병이 죄로 인하여 온 것으로 인식합니다만 병 고침이 우선으로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이들에게 병 고침을 먼저 해 주시지 않으시고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병과 죽음은 근원적으로 죄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자들은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 이후 모든 인생의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것만이 죄의 현실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고통과 악의 문제들도 죄로 인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두 가지 악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웅덩이는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라고 합니다(2:13). 우리 인생의 살고자 하는 노력들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살리려고 발버둥치고 살아갑니다. 내가 나를 살리려고 하는데 옆의 사람도 자신을 살리려고 합니다. 그러니 온갖 시기와 경쟁이 끊어지질 않습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만 가득합니다. 왜 이러한 상태가 되었는지 인간들은 그 근원을 알지 못합니다. 이런 상태로 내 버려두시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일어나는 일들이 살인하고, 성을 쌓고, 무기를 만들고, 문명을 발달시키고, 부동산을 투기하고, 온갖 죄악들로 가득하게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상태로 내 버려두시면 어떤 죄들이 나오는지 한 곳에 모아둔 죄의 목록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1:18~25절입니다. “봉독 타락한 현실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대로 내버려주시면 모든 인간들은 이렇게 우상숭배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26~28절도 계속하여 봅니다. “봉독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인간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시면 이렇게 나갑니다. 순리를 역리로 쓴다는 것은 동성연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성애만이 죄가 아니라 이성애자라도 죄인들입니다. 죄란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죄는 사망입니다. 그런 죄가 무언지 봅니다.

 

로마서 1:29~32절입니다.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6)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여기서 자유로운 분이 있습니까? 이런 상태가 영원한 곳이 지옥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에 무엇이 가장 필요하고 시급하고 중요한 것입니까?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중풍병자를 고쳐달라고 네 명이 메고 온 것을 예수님께서 보시고서 그들을 향하여 너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로마서 1장을 보면 무엇이 더 심각한 문제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이러한 죄의 목록들 중에 많은 부분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그러므로 병들지 않는 사람보다 오히려 죄를 지을 능력이 없습니다. 물론 속으로는 온갖 불평과 원망과 시기를 할 수는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이들을 보실 때에 병의 문제보다 더욱 중요한 내용이 죄 사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두가 들으라고 죄 사함을 선포하십니다.

 

본문 6~9절입니다. 어떤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이 말씀을 듣고서는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죄를 사하시는데 어떻게 나사렛 예수라는 자가 죄를 사하여 준다는 말을 하느냐고 속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유대 사회에서 율법 선생들이며 주로 바리새파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기록하고 보관하고 가르치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율법의 선생들이기도 합니다. 이런 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신성 모독은 돌로 쳐 죽여야 할 정도로 중한 범죄입니다(24:16, 15:30).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죄를 사하는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죄를 사하실 수 있다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몇 곳만 찾아봅니다.

 

시편 130:3~4절입니다.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주께서 죄를 살펴보시면 아무도 그 앞에 설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심이 주님께 있기에 주님을 경외합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게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 이유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이사야 43:25절입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44:21~22절입니다. “21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이곳만이 아니라 구약의 다른 곳에서도 죄 사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신다고 하니 서기관들이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본문 8~9절입니다. 서기관들이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고 하십니다. 마음속으로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시니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묻습니다. 중풍이 들어서 꼼짝을 못하기에 네 사람이 침상에 들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일어나 걸어가라고 한다고 해서 일어나 걸어가게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신성 모독으로 여기고 있기에 둘 다 일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본문 10~12절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말씀하실 때에 인자라고 하십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에게 알게 하려 한다고 하시면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이렇게 말씀만 하셨는데 그가 일어나 자기가 들려온 그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니 그들이 놀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그 말씀이심을 보이신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대로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죄로 인한 것입니다. 인간은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잡혀있기에 자력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셔야 벗어납니다.

 

요한복음 5:21~27절입니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2)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생명을 주시고, 심판하시는 권세를 그 아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이 모든 권세를 주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그 영광이 동등하신 본체이신데 자기를 비워 사람의 아들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께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그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은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요한복음 17:1~3절입니다.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기도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통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그 영을 넘겨주십니다. 그 결과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죄 사함을 얻습니다.

 

마태복음 28:18~20절입니다.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2)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시고 죽으신지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이 땅에 40일을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부활을 증거 하시고, 다시 오실 것을 증거 하십니다. 그리고 승천하시기 전에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약 2천 년 전에 십자가로 이루신 그 복음의 내용이 오늘 우리에게 들리는 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막을 권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면 그때 주님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고, 전하는 것도 다 주님의 권세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죄 사하는 권세가 예수님께 있으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