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66~72 나는 아니라 2020. 3. 8

 

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지난주에 본 말씀은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몰아 사형을 이끌어 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조롱하는지 마가복음 14:65절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그의 얼굴을 주먹과 손바닥으로 때리면서 온갖 조롱을 합니다. 신명기 25:9절을 보면 형제의 대를 이어주지 않는 자의 신발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이런 조롱을 받으시는 것은 자신의 죽음으로 참된 생명을 이어주는 일입니다.

 

이사야 50:6절을 봅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5절부터 보면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물러가지 않음으로 당하는 일이 자신을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고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 선지자 미가야는 거짓말하는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에게 뺨을 맞습니다(왕상 22:24).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리라고 합니다(3:30). 예수님은 왼 뺨을 치면 오른 뺨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5:39, 6:29). 이런 말씀들을 이루어 내시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4:54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5)불을 쬐더라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실 때에 도망을 갔지만 멀리서 조심스럽게 예수님이 어떻게 되는지 보려고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갑니다.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는 이 모습에 대하여 설교를 많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라면 바짝 붙어서 따라가야지 멀찍이 따라가니 배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멀찍이 따라 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 방법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모든 공적인 예배의 참석과 주일성수와 십일조와 각종 헌금과 봉사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가까이 하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르친 자도 그렇게 알고 열심히 한 사람들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로 인하여 아주 멀어졌습니다. 믿음이 무언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왜 잡혀가는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갔을까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삼년동안 따라다니면서 수많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병자를 고치심, 죽은 자를 살리심, 오병이어의 기적,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심,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압박이 오면 기적을 베푸실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따라 간 것으로 봅니다. 예수님께서 불의한 재판 석을 그의 권능으로 성전의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듯이 둘러엎는다면 자신이 제일먼저 달려가서 거들 생각을 하였을 것이라고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적을 권능을 행하시기는커녕 온갖 조롱을 다 받으시는데도 아무른 반응이 없이 그 수치와 조롱을 당하시니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14:54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5)불을 쬐더라54절의 각주 5)보면 헬라어로 (토 포스)’을 쬐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인 불(퓌르)과 다른 단어입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참 빛이신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고 하심으로 사형언도를 받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내가 그라고 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이 말은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 지난주의 설교제목 내가 그니라와 대비하여 나는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 중에 내가 그리고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나머지는 다 아닙니다.

 

창세기 1:1~5절입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1)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빛이 비추기 전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가득합니다. 이 땅이 우리 몸의 재료입니다. 그러므로 참 빛이 비추어지면 자신이 혼돈이며 공허이며 흑암이 가득함을 알게 됩니다. 그 전에는 자신이 이런 자임을 모릅니다.

 

요한복음 1:1~5절입니다. “1 태초에 1)말씀이 계시니라 이 1)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2)깨닫지 못하더라빛이 비취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합니다. 지금 베드로가 불을 쬐고 있는데 그 불이 원래는 장작불이라는 퓌르여야 하는데 그 빛이라는 토 포스를 썼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추워서 불을 쬐고 있지만 참 빛이신 예수님을 배신하고 있는 자리입니다.

 

오늘본문 66~68절입니다. “봉독 베드로가 아래 뜰에서 불을 쬐고 있는 것을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주목하여 말하기를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부인하여 말하기를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다고 합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 자리를 피하여 앞뜰로 나갑니다. 베드로가 한번 부인합니다.

 

69~70절상반절입니다.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여기서 여종이란 바로 앞에서 지적한 그 여종입니다. 베드로가 피하여 가니 따라가서 그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이 사람이 그 도당이라고 하자 베드로는 또 부인합니다.

 

70절후반절~71절입니다.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그 여자가 말하고 나서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부인하는 말투가 갈릴리 억양이니 그렇게 몰아갑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며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참으로 알지 못한다고 함으로 세 번째 부인합니다.

 

72절입니다.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베드로가 세 번을 부인하고 나니 닭이 곧 두 번째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닭이 첫 번째 울었다는 말입니다. 닭이 첫 번째 울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세 번을 부인하기 전에 처음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안 되는 일이 일어나기에 세 번 부인 후에 두 번째 닭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마가복음 14:3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예수님의 이 말씀에 베드로는 힘 있게 말하기를 자기는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그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닭이 두 번째 울었을 때 베드로는 이미 세 번을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생각이 났다면 이제라도 자신이 제자임을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냥 나가서 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그니라고 하신 말씀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계시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물었을 때에 내가 그니라고 하신 그 대답 때문에 신성모독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는 것은 내가 그라고 하신 그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나는 제자가 아니라고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면서까지 부인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나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십니까? 우리가 얼마나 약하고 악한 자들인지 아직 자신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처럼 나는 주님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큰 소리를 칠겁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작은 이익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였습니까? 작은 이익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도 안 납니다. 생각이 안 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말씀까지 이용하면서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산다면 반드시 예수님이 당하신 일들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다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2:31~34절입니다.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4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6:15~18절입니다.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5)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6)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두 곳의 말씀을 같이 본 이유는 시몬과 베드로에 대하여 살펴보기 위함입니다. 시몬은 야곱의 둘째 아들 이름이기에 이스라엘에 이 이름이 많습니다. 그 뜻은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시몬을 베드로라고 하시면서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뜻이 반석입니다. 반석위에 지은 집과 같은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 베드로는 반석이 안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세 번이나 부인할 지라도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기에 믿음이 떨어지지 않는 반석이 됩니다.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면 우리의 불굴의 의지로 내가 믿는 바를 이루어내는 것을 믿음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믿음은 종교나 신천지나 이단들에게 세뇌되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뉴스 시간에 어떤 대학 교수가 말하기를 자기 학생이 학교에 나오지 않아서 알아보았더니 아르바이트를 너무 열심히 해서 힘이 들어 학교에 나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번 돈으로 신천지에 헌금을 한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이 그런 곳에 빠지는 이유는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어디서라도 위로를 얻지 못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교묘하게 접근하여 수년간 친밀감을 쌓은 후에 성경공부로 인도합니다. 그렇게 하여 6개월 세뇌교육을 받으면 그것이 진짜인줄 알고 헌신을 합니다.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님은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이란 우리의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은혜의 선물로 주실 뿐만 아니라(2:8) 그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고 계십니다(22:32). 예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기에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자기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하여도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인하지 않음으로 구원이 일어납니다. 성경의 믿음은 바로 이런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의 내용을 선물로 받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에는 사람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믿음으로 믿음에 이릅니다(1:17).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실체를 알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자신의 결단과 결심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음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내용이 베드로의 부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난 후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밖으로 나가서 울었습니다. 그뿐입니다. 나중에 부활의 소식을 듣고서도 물고기나 잡으러 간다고 가 버렸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사도로 세웁니다.

 

누가복음 22:32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베드로가 세 번이나 부인하지만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세 번이나 저주 맹세하면서 부인하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돌이키는 것도 누가 돌이킵니까?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돌이켜 주십니다. 부활 후에 제자들을 찾아가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십니다. 성령이 임한 후에 베드로는 어떻게 형제들을 굳게 세우게 됩니까? 나처럼 살라고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는데 예수님께서 나를 부인하지 않으셨기에 내가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후서 3:12~18절입니다. “1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2)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3)”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됨을 전함으로 형제를 굳게 합니다. 바울도 이렇게 말합니다.

 

디모데전서 1:12~17절입니다.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베드로나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주의 약속의 신실하심과 주의 오래 참으심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어떤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지만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합니다(고전15:10).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2:13). 이것이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