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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19:11-16 만유의 주 2021. 10. 10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지난주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왜 복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어린 양이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됩니다. 모든 왕의 왕이시며 모든 주의 주가 되시는 분을 한마디로 하면 만유의 주가 됩니다. 왕이든지 주이든지 다 만유에 포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유의 주님이 베푼 잔치에 청함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그분의 신부가 되는 일은 세상의 속한 모든 것들을 다 가지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이며 영광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청함을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22:1~6절입니다. “봉독지난주에 간단히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 천국을 혼인 잔치로 비유하였습니다. 임금이 그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어 놓고 초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청함을 받은 자들이 오기를 싫어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밭으로 간다고, 사업하러 간다고 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종들을 잡아서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임금을 얼마나 무시하면 이렇게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이 자기를 낮추어 종들을 보냈는데 그 종들을 죽인 자들은 결국 임금을 죽인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진노하여 심판하십니다.

 

마태복음 22:7~14절입니다. 봉독 종들을 죽인 자들을 임금이 심판합니다. 그리고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아무나 불러오라고 합니다. ‘아무나는 어떤 자격을 필요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값없이 와서 값없이 주는 예복을 입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내쫓으라는 비유입니다. 저는 이 비유도 십자가로 이루실 일에 관한 말씀으로 봅니다. 먼저 청함을 받은 자들은 구약 사람들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을 통하여 계시하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인 자들이 결국 예수님을 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오히려 그들을 심판합니다. 그러므로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분이 역사 속에서 죽임당한 어린 양의 모습입니다.

 

12년 전에 요한계시록 설교하면서 바르트의 묵상 글 중에 일부를 인용하였습니다 왕과 같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허락하는 놀라운 운명에 참여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 무시당하고 망각 되고 멸시당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분의 능력은 그분의 무능 속에, 그분의 영광은 그분의 초라함 속에, 그분의 승리는 그분의 패배와 고난과 추방당함과 범죄자의 죽음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교회는 그분의 연약함에 동참해야 합니다.” 바르트의 신학을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런 글은 십자가를 참 잘 표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 속에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전함이 복음 전함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봅니다. 하늘이 열린 것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는 4:1절에서도 나옵니다. ‘하늘에 열린 문입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현재 완료 분사 형태입니다. 이 말은 이미 이루어졌고 이루어진 것을 펼쳐놓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성령께서 십자가 이전으로 이끌어 가서 십자가로 일어난 일을 보여주신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1장에서 보여주시고, 2~3장은 아시아 일곱교회를 말씀하시고, 4:1~20:6절까지 십자가 3일간에 이루신 내용을 말씀하시면서 20:7절 이후를 재림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부산의 정동원 집사님께서 성경을 통독하면서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기를 22:7절까지 십자가의 다 이루심으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십자가 삼일간도, 십자가의 하루로, 그 하루를 더 줄이면 십자가에 달리신 여섯 시간으로, 그 시간도 더 줄이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한순간으로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그 글을 보고서 22:7절까지도 십자가의 묵시적 완성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김현두 목사님께 전화해서 이 문제를 나누었습니다. 재림도 십자가의 통시적 완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20:6절까지를 십자가 삼 일로 구분한 이유는 재림이 이 역사 속에 일어나는 일을 말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재림의 사건도 묵시적인 사건으로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을 이 역사 속에 펼치실 때도 역시 순간에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니 전적으로 동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더 교제하였는데 몸의 부활도 나누었습니다. 십자가로 단번에 피 뿌림을 받아 흰옷을 입은 구약의 성도들도 그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영적인 구원이지만 그 몸은 그리스도의 영광된 몸을 입어야 합니다. 그 일이 일어날 때는 재림 때인데 그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 이유는 신약의 성도의 수가 다 찾아져야 합니다. 구약의 성도는 십자가로 단번에 그 생명이 하늘에 앉혀지고, 신약의 성도는 예수님을 믿어 거듭나는 순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혀집니다.

 

골로새서 3:1~4절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들, 구약의 성도들은 십자가로 단번에 다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신약의 성도들도 십자가로 단번에 살리심을 묵시적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는 복음을 듣고 믿는 순간 그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혀집니다(2:6). 이런 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육의 몸이 있고 영의 몸이 있습니다. 육의 몸은 아담의 형상을 입지만 영의 몸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이루어지기에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자들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 그 영광의 날을 사모하며 살아갑니다.

 

본문 11~13절입니다. “봉독 사도 요한이 하늘에 열린 문, 이미 이루어져서 펼쳐진 그 장면을 봅니다. 백마 탄 자가 있습니다. 그 이름이 충신이며 진실입니다. 이분이 십자가에 죽은 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눈은 불꽃 같다는 말씀은 온 세상을 다 살펴보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머리에 많은 관이 있다는 말은 만왕의 왕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다고 합니다. 그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만 안다는 말씀입니까? 예수님만 압니다. 예수님만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계시하여 주셔야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피 뿌린 옷을 입고 있습니다. 왜 피 뿌린 옷을 입고 있습니까?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피 흘린 옷이 됩니다. 그런데 원수들을 심판하심으로 피까 뿌려지는 일도 있습니다.

 

본문 14~15절입니다. “봉독하늘에 있는 군대들이란 천사들입니다. 이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릅니다. 이 장면은 십자가로 심판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옵니다. 이 내용은 이미 요한계시록 1장과 2장에서 본 내용입니다. 이 검이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피 뿌린 옷을 입은 분의 이름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 말씀이 다스림을 철장으로 다스린다고 합니다. 철장 권세는 시편 2편에서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가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습니다. 포도주를 가득 넣은 포도주 틀을 밟으면 붉은 포도즙이 옷에 튀듯이 악인을 그렇게 심판하십니다.

 

이런 심판은 이미 14:10, 19절의 일곱째 나팔에서 진노의 포도주 틀에 악인을 넣고 밟으니 그 피가 말 굴레까지 닿았다는 말씀과 16:9절의 19절에 일곱 대접의 재앙에서 바벨론의 심판도 진노의 포도주를 받은 것으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역사 속에 오셔서 백마를 타시고 악인을 밟아서 피가 흥건하게 적신 옷을 입으시는 그런 내용이 아니라 십자가로 원수를 심판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한 심판을 구약에서 예언하는데 그런 말씀을 십자가로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재림 시에는 그들을 영원한 무저갱에 단번에 넣어버리시는 것이지 피 튀기는 전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이기시는 영적인 전쟁입니다.

 

이사야 63:1~3절입니다. “1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 2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틀을 밟는 자 같으냐 3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1)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4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5 내가 본즉 도와 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6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2)취하게 하고 그들의 선혈이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에돔에서 붉은 옷을 입고 오는 분이 누구냐는 겁니다. 보스라는 에돔의 수도입니다. 에돔도 붉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에돔은 포도주로도 유명하였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포도즙 틀을 밟는 것과 잘 연결됩니다. 이러한 심판을 하나님 홀로 심판하셨다는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구원의 소식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심판과 구원이 일어날 십자가의 날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란 구원의 피도 되고 심판의 피도 됩니다.

 

계시록 18:24절입니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느니라 하더라예루살렘이 심판을 받는 것도 선지자들과 성도들의 피를 흘린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선지자들과 성도들을 부르시고 보내신 분이 직접 오셨지만 역시 그 예수님마저 피 흘린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온 세상의 멸망입니다. 그래서 바벨론 음녀의 멸망은 복음을 위하여 죽임을 당한 피가 있기에 멸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이미 심판받아 망한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면 이 세상이 왜 망하는지 분명한 이유를 알게 되기에 예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의를 구하게 됩니다.

 

이러한 피 흘림에 관한 내용을 계시록에서만 다시 봅니다. 19:2절입니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17:6절입니다.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기니16:6절입니다.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6:10~11절입니다. “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앞에서 다 본 내용이지만 다시 읽어 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 피 흘림으로 구원도 일어나지만, 피 흘리게 한 자들을 심판하시니 붉은 옷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그 십자가에 죽은 분이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같은 뜻을 강조하기 위하여 조금 다른 표현으로 두 번을 합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신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를 죽인 자가 누구입니까? 사도들은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 선포 앞에 어찌할꼬? 하며 회개하는 자와 이를 갈며 돌을 던지는 자로 나누어집니다. 이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만유의 주입니다. 지난주에 차에서 찬송 듣는 중에 만유의 주를 찬송하는 내용이 있어서 오늘 설교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가 되신 분을 함께 말하는 단어가 만유의 주라고 보았습니다. 왕도 주도 만유에 포함됩니다. 만유(萬有)는 전부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주께서 주를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그 주님을 성경은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1:16).

 

사도행전 10:36~43절입니다. “36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37 곧 요한이 그 2)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43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가서 전한 복음입니다. 복음의 핵심이 다 들어있습니다. 베드로가 가고 싶어서 간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전도도 주님이 하십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유의 주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만유의 주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5:27~28절입니다. “27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이가 그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1)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베드로는 만유의 주를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만유의 주를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만유의 주가 두 분이 되신다는 말입니까? 엄청난 질문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만유의 주가 되시고 하나님도 만유의 주가 되시는데 전혀 충돌이나 어긋남이 없다는 말을 표현한 말이 삼위일체입니다. 만유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 만물 아래 오셔서 만물 중에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를 다 찾아 하나님께 드리면 그것이 세상의 끝입니다.

 

만유의 주가 되신 분이 만물 아래 오셔서 만유의 주에게 복종시키는 일이 십자가의 일이었습니다. 그 십자가에 만유의 주가 되시는 분이 스스로 복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 안에서만 만유가 하나님과 화해가 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배척하고 거절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가 된 채로 사는 겁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복음의 선포는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심을 전하는 겁니다. 그 예수님이 만유의 주가 되시게 영원하신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도 그 만유 안에 거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유의 주되신 예수님 안에 거함이 만유의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간략히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20절입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예수님께서 떠나심이 유익하다고 하시면서 떠나면 성령을 보내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일은 만유의 주 안에 거하는 겁니다. 만유란 말 그대로 전부입니다. 예수님 계시면 전부 있는 것이고 예수님 아니 계시면 전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유의 주가 되신 분이 만물 아래 오셔서 우리를 십자가로 자기 품에 안으신 만유의 주를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교 전후에 곡은 다르지만 같은 가사로 만유의 주를 찬양합니다. 만유의 주께서 하신 일을 알아감으로 더욱 만유의 주를 찬양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