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룻기 1:1~5 텅 빈 나오미 2013. 7. 14

 

룻기는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구약의 절기에 읽는 성문서로 분류됩니다. 룻기, 아가, 전도서, 예레미야 애가, 에스더를 두루마리라는 뜻의 ‘메길로트’로 말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절기 때에 한 권씩 읽어왔습니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70인 역입니다. 70인 역에서는 역사적인 순서에 따라 룻기를 사사기 뒤에 두었습니다. 그 뒤로 기독교에서 발행하는 모든 성경은 다 이 순서로 나옵니다.

 

신학교 때 역사서를 담당한 교수가 김지찬 교수였는데 역사서 전체를 성경마다 단숨에 읽고 그 소감을 리포트로 제출하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역사서는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 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입니다. 지금 주일 오후에 이 차례대로 보아나갑니다. 그때 룻기서의 소감을 한 줄로 이렇게 적은 기억이 납니다. ‘사사기라는 캄캄한 흑암의 밤에 룻기라는 맑고 밝은 별 빛이 보인다.’ 오늘은 역사서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이란 우리와의 공간과 시간의 거리가 엄청납니다. 룻기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3천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우리가 읽고 해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사야 42:5~7절입니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선지자들을 통하여 알려주십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자기 영광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세워서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일을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러한 언약을 누가 이루어내시는 것입니까?

 

이사야 61:1~3절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사야 42장의 예언을 성취하실 한 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4:16~21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구약의 모든 언약을 완성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글들이 응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1절입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구약성경도 다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 역사 가운데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읽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너무나 주체의식이 강합니다. 이것은 근대의 철학과 과학과 문명의 발달들이 다 자기 주체성을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라는 개념이 무너져버린 시대입니다. 이런 것을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합니다. 모든 권위의 해체, 모든 절대 진리의 해체를 말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진리의 척도를 인간들은 자신들에게 두고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는 유명한 말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여도 의심하고 있는 나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진리의 척도를 사람에게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사실상 다 내장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 우리는 성경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체가 되어 성경을 분석하고 해석하여 자기에게 필요한 대로 사용합니다. 마치 자연을 분석하고 해석하여 사람들이 편리하게 사용하듯이 모든 것들을 그렇게 해석 적용합니다. 자연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고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을 따라 이용함으로 지구 온난화라는 재앙을 우리가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을 우리 인간의 욕망에 따라 이용한 결과는 영원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는 내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해석해 버립니다.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읽어버립니다. 이것을 성령의 감동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이 기록되었기에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읽으면 자신의 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죄인을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으로 구원하여 내시는 것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역사들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어떤 인물의 장점과 단점을 보고서 그 인물들의 됨됨이를 본받자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보는 자세가 아닙니다. 그런 인물들과 역사와 환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이란 단순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물론 그 계시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요5:39).

 

본문 1절입니다. 시대 배경이 사사시대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입니다. 사사시대만 이런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나 다 이러합니다. 이때 그 땅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베들레헴이란 집과 떡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은 떡집입니다. 떡집에 떡이 떨어졌습니다. 흉년이 들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였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신28:23,24). 그때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암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습니다. 잠시 피하려고 간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자체는 왜 베들레헴에 머물러 회개하고 기다리지 않았느냐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단지 객관적으로 보도만 하는 형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말씀을 가지고 힘들고 어렵더라도 베들레헴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입장이 되었다면 얼마든지 흉년을 피하기 위하여 다른 곳으로 갈 사람들입니다.

 

2절을 봅니다. 이름들이 나옵니다. 엘리멜렉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라는 뜻입니다. 왕이 없는 시대에 아주 믿음이 좋은 이름으로 보입니다. 사사기에서 이와 비슷한 이름이 기드온의 아들 중에 아비멜렉이 있었습니다. 기드온이 이름을 지어준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이 왕이 되어 달라고 해도 거절하면서 자기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이라고 한 것은 나의 아비는 왕이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 기드온의 속셈입니다. 엘리멜렉이 나의 하나님의 왕이라고 하면서도 자기가 왕이 되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입니다. ‘사랑스러운 여인’ 또는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도다’는 뜻입니다. 19절에서는 희락으로도 말합니다.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입니다. 이 뜻은 병약한 나약한 이라는 뜻입니다.

 

3~4절입니다. 나오미의 남편이 죽고 두 아들만 남았습니다. 두 아들을 위하여 모압 여인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이것도 율법으로 금하는 바입니다. 특히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의 총회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신명기 23:3~6절입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네 평생에 그들의 평안함과 형통함을 영원히 구하지 말지니라”

 

이러한 율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룻기서는 이런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구약에서 율법을 뛰어넘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담겨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런 사건을 구약에서 종종 보게 됩니다. 유다가 이방 여인 다말을 취한 것, 모세가 구스여인을 취한 것,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과 같은 자들이 하나님의 총회에 편입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단지 편입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족보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5절입니다. 말론가 기룐 두 사람이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 뒤에 남았습니다. 말론과 기론 누가 형으로 보입니까? 순서상 말론이 형이고 동생이 기룐입니다. 그러면 룻은 그러면 룻은 누구의 아내일까요? 순서로 보면 롯은 둘째 며느리로 보입니다. 오르바의 이름이 먼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4:10절을 보면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이라도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룻이 큰 며느리입니다. 이런 것을 ‘교차대구(交叉對句)’라고 합니다. 우리가 시편을 보았을 때에 평행대구(平行對句)라는 말을 자주 보았습니다. 평행대구와는 다르게 마치 야곱이 손을 어긋 맡겨 축복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 교차대구입니다. 2절에서 남편과 아들의 순서가 5절에서는 아들과 남편의 순서로 말합니다. 이러한 역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왕이라는 남편이 죽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왕이라는 이름이 죽어버렸으니 본인도 왕이신 하나님께 아무른 도움을 받은 것이 없는 자처럼 보였습니다. 당연히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아무른 도움이 되지 못한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나오미의 이름은 사랑받은 여인이며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다는 이름이며 기쁨인데 이 보다 더한 기구한 운명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말하는 참으로 팔자 사나운 년이며 아비멜렉의 집안을 망친 여인으로 보입니다. 남편의 이름과 아내의 이름들과 전혀 반대되는 상황이 일어난 것입니다. 정말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버린 나오미가 되었습니다. 두 며느리는 이방여인이기에 언제 떠날지 모르는 자들입니다.

 

20~21절을 봅니다.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에 사람들이 나오미라고 부르니 자기를 라마라고 하라고 합니다.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풍족하게 나갔다가 여호와께서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고 합니다. 살려고 나간 자리가 텅 비어지는 자리였습니다. 우리는 늘 살려고 발버둥 칩니다. 무엇을 채워서 풍족하게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터진 웅덩이인줄도 모르고 열심히 채워 넣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텅 비게 만들어버립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할 영원한 그 아들의 나라를 채워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텅 비게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이제는 생존을 위한 삶이 아니라 생명을 위한 삶임을 알게 하시면서 영원한 아들의 나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