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6:1~14   피곤한 인생      2014. 8. 31

15장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언약을 이해한 자리는 아들이 반역하여 맨발로 머리를 풀고 도망가는 자리였습니다. 언약을 이해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言約)은 하나님께서 말로 약속하신 바를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전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일해야 하는 줄 알았던 자리에게 이제는 하나님의 언약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조치할 바들을 다 행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목숨 끊어질 그날까지 이런 모습들이 나오겠지만 오직 하나님의 언약만이 영원히 세워지는 자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입니다.

16:1~4. 다윗이 피난 가는 길에 시바가 안장 지운 나귀 두 마리에 떡 이 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다윗에게 옵니다. 왕이 무슨 뜻으로 가져왔느냐고 합니다. 시바는 사울 집안에 속한 사람이며 므비보셋을 모셔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피난길의 다윗을 돕기 위하여 나온 것은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하여 온 것입니다. 다윗이 패배를 하든지 복귀하여 돌아오든지 간에 자신의 주인을 헐뜯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예루살렘에 있는데 오늘 이스라엘 족속이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릴 것이라고 한다고 거짓 보고를 합니다. 그러자 다윗이 시바에게 므비보셋에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라고 하니 시바가 다윗에게 절하고 내 주 왕이여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거짓이라는 것이 사무엘하 19:24~30절에서 밝혀집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이 돌아올 때까지 초상당한 자의 모습으로 있었으며 나귀를 타고 가려고 하였으나 시바가 속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윗이 재산을 다시 반반으로 나누라고 할 때에 므비보셋은 그런 것은 전부 시바에게 주라고 합니다. 사람의 진정성이 어디에 있는지는 그 사람과의 이해관계(利害關係)에 부딪혀보면 나옵니다. 압살롬이 반역하여 다윗이 피난 가는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의 실상들이 다 드러나고 있습니다. 

5~8. 다윗 왕이 감람산을 지나 바후림에 이르자 사울의 친족 시므이가 나와서 다윗을 계속하여 저주합니다. 다윗과 신하들과 용사들과 백성들이 함께 있는 곳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다윗을 저주합니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모든 족속의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 돌리셨다고 합니다. 시므이도 다윗을 저주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거론합니다. 사람들마다 자기의 하나님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사울의 왕위를 여호와께서 폐하시고 왕으로 세운 자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마치 사울의 집안을 죽이고 왕이 된 것처럼 저주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절호의 기회를 두 번이나 있었지만 자시 손으로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다. 아브넬이나 이스보셋도 다윗이 사주하여 죽인 것이 아님에도 시므이는 자기 집안의 몰락을 다윗에게 돌리면서 저주를 퍼 붓고 있습니다. 

교인들도 이런 싸움에 말려들면 답이 없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싸움들을 보면 크건 작건 분쟁이 일어나는 일들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거의 다 혈과 육에 속한 일들입니다. 우리 안에도 얼마든지 이런 싸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의 죄악이 어떠함을 다 드러내면서 왜 그리스도 만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름부음 다윗이 피난 가는 길에 다윗을 이용하고 저주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다윗과 함께 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9~14. 이런 시므이를 보고서 아비새가 죽은 개가 왕을 저주한다고 하면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아비새는 사울도 단칼이 죽이자고 한 사람입니다. 이때 왕이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광이 있느냐고 합니다. 다윗에게 버거운 사람들이 스루야의 아들들입니다. 이들이 다윗의 조카들인데 군대의 실세들이라서 다윗도 함부로 못하는 지경이 된 자들입니다. 시므이의 저주 사건을 두고 아비새와 다윗의 해석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비새는 죽은 개 같은 자를 단칼에 베어버리겠다고 합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 하도록 버려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한다는 말이 이런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자신은 시므이의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혹시 그 저주 까닭에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선으로 갚아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저주를 받기에 당연히 선으로 갚아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혹시’입니다. 안 해주셔도 아무른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립니다. 왕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들이 다 피곤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쉽니다. 

오늘 제목을 피곤한 인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피곤함이 어떻게 오는지 시편 6편을 봅니다. “1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3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4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8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10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다윗이 지금 이런 피곤함이 어떠한지 오늘 본문에서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피곤함만이 아니라 수많은 피곤함 들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전도서에서는 또 다른 피곤함이 있습니다. 전도서 1:8~11절입니다. “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1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솔로몬의 전도서입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솔로몬이 다 경험해 보았습니다. 솔로몬은 일종의 나르시시즘적인 피곤함입니다. 자기 사랑에 몰입하여 모든 것을 다 해보아도 피곤한 인생입니다.  다윗의 피곤함과 솔로몬의 피곤함이 질은 다르지만 피곤한 인생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피곤한 인생들에게 참된 안식과 위로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사야 40:1~11절입니다.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게 무엇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다윗은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려고 모반한 사건 앞에서 인생이 풀임을 알고 그 영광이 풀의 꽃임을 알아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 그 언약만이 영원히 세워진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자들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위로를 받았다면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가 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간 상황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는 것이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위로란 자신이 양과 같은 자임을 알고 목자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호랑이와 사자가 되기를 원하기에 어느 정도의 바닥에 내려가야 목자의 인도를 따르는지 다윗과 이스라엘을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이 본문의 말씀을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인용합니다. 

베드로전서 1:23~25절입니다.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인생의 영광이라는 것이 풀의 꽃과 같습니다. 그래서 풀이 마르고 꽃이 떨어질 때에 주의 말씀이 세세토록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다윗이 왕의 자리에서 간음하고 살인하고 자녀들 사이에서 강간과 살인과 아들의 반역으로 도망가면서 하나님의 언약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참으로 바닥까지 내려간 인생 그래서 참으로 피곤한 인생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을 맡기게 되는 것이 피곤한 인생들에게 참된 위로와 안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