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2:1~2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     2014. 12. 7

1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2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합니다. 아도니야의 반역이 진압이 되고 솔로몬이 왕으로 등극하였습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명령을 합니다. 이 명령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유언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살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렇게 명령하면서 제일먼저 언급하는 말이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가는 길고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게 된 이것은 누구의 명령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창세기 3:19절입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 명령에서 벗어날 어떤 인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태어나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내가 태어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살고 싶어서 사는 것도 아닙니다. 태어나게 하셨기에 태어났고 살라고 하셨기에 살아갑니다. 역시 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아무리 죽기 싫어도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수요일 저녁에 울산에서 오신 두 분이 예배 후에 한 시간 넘게 교제를 하고 갔습니다. 오랫동안 번영신학을 전하는 교회에 출석하다가 이건 아닌데 하는 마음이 계속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김성수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저의 설교도 듣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김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그 내용은 참으로 옳다고 인정이 되는데 그의 죽음으로 늘 마음에 걸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저에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하였기에 오늘 함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질병이라고 하였습니다. 심한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있었기에 자신도 자신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치매에 걸리면 예수님을 잘 믿던 사람도 예수가 누구냐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유명한 목사로 하여금 축도를 하라고 하였더니 홍도야 울지 말라고 노래하더랍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입니까? 병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에 수긍이 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는 자에게는 복음에는 걸림돌이 있다는 말로 또 답을 합니다. 그 복음의 메시지는 옳지만 그 사람의 삶은 실망할 것이 아주 많은 것입니다. 그러한 요소들 때문에 그 복음의 내용마저 버리게 되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저주 받아 죽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게는 반드시 들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인간은 오늘 본문처럼 죽음의 길로 갑니다. 빨리 가든지 늦게 가든지 자연사 하든지 사고사로 가든지 간에 죽은 자가 죽은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했을 때에 울산에서 오신 여 집사님이 한마디 더 하셨는데 죽을 자가 죽은 것이군요! 이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가 죽는 것이며 죽을 자가 죽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속 시원하게 교제하고 갔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또 질문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난 사람의 죽음은 어떻게 됩니까? 예수 믿어도 우리의 몸은 죄의 몸입니다. 이 몸이 있는 한 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미 자기 백성을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로마서 6:6~7절입니다.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우리의 죄의 몸이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힌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죄의 몸이 죽었기에 다시는 우리게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자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이미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내 몸은 이천년 전의 몸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시간을 빼버려 보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없다면 얼마든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죽었다는 묵시적 사실을 이 역사 속에서 실재 죽이고 계십니다. 성도나 비 성도나 간에 죄로 인하여 죽게 됩니다. 죽는 것은 죄의 몸입니다. 죄의 몸이 죽으면 더 이상 죄가 왕 노릇 할 곳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죄는 무엇입니까? 

로마서 5:8~10절입니다.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예수님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죄를 멸해버린 죽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죄란 선악과를 따 먹고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것이 죄가 됩니다. 이러한 죄인들은 스스로 선과 악을 선택하며 자신이 주체가 되어 산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에 대하여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더 이상 죄에 종노릇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법도 죄인이 죽어버리면 어떠한 죄도 그 사람에게 물을 수가 없습니다. 유병언의 죄를 누구에게 묻습니까? 그 자식들에 물을 수 없습니다. 그 자식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벌을 받는 것이지 백골이 되어 발견된 유병언씨에게 세상의 법으로 죄를 물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더 이상 죄가 왕 노릇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죄에 대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죄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법정에서는 어떻게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런 죽은 자를 다시 살리셔서 반드시 죄에 대하여 심판을 하십니다. 

히브리서 9:27절입니다.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며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안에서 예수와 함께 죽은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들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밖에서 죽은 자는 죽는 것이 끝이 아니라 반드시 심판을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죄와 상관없이 이미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가 해결된 자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로마서 5:11~14절입니다.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우리 몸을 죄가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이기에 더 이상 법 아래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죄란 선악과로 인한 것이기에 끊임없이 법으로 자신과 타인을 저울질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송사하고 변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법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법아래 있는 자의 정죄를 예수님이 단번에 해결하셨기에 이제 은혜 아래 있으라는 말씀은 자기 몸을 법이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주의 영이 임한 자는 자유 함이 있습니다. 은혜 안에서 안식이 있습니다. 

지금 다윗이 솔로몬에 명한 말 중에 자신이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라는 이 한 말씀을 위하여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입니다. 다윗과 솔로몬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다 가야하는 이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 끝에서 딱 두 가지 길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는 영원한 생명의 길이며 하나는 영원한 심판의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영원한 길에 대하여서는 별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누구도 반드시 가야하는 이 절대적인 죽음을 피하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피한다고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죽어갑니다. 우리가 가는 이 길 끝에 과연 주님을 볼 수 있을까요? 

시편 90:1~12절입니다.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주께서 사람을 1)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5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우리는 다 흙으로 돌아가야 할 인생입니다. 인생의 자랑이라는 것이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중에 일평생이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날을 아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죽을 날짜를 안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잠깐 피었다 지는 들풀과 같은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 다 가는 길입니다. 어떤 인생도 이 죽음에서 벗어날 자가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고 스스로 살아날 권세란 어떤 인간도 없습니다. 이미 허물과 죄로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이 죄인을 위하여 죽어봤자 그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희생하여 의로운 일을 이루어내었다고 의사(義士)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다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희생이라는 것은 자기 집단을 종속시키고 발전시키는 뜻으로 얼마든지 이타적인 행동들이 나옵니다. 생물학에서 이기적인 유전자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생물을 살리는 이타적인 유전자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타적인 행위를 하여도 그 사람 자체가 죄인이기에 죄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10:17~18절입니다.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만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버릴 수 있는 분이십니다. 스스로 버리실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사람들이 자연사 하든지- 실상 자연사는 없습니다. 다 죄로 인하여 죽기 때문입니다- 살신성인을 하든지 큰 의미는 없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실 권세가 있으신 분은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영이 부어진 자들만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명을 받은 자들은 자신의 겉 사람이 후패함에 있어서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속사람이 새로워짐을 알기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그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1~18절입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3 기록된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모든 사람들이 다 죽음의 길로 갑니다. 그런데 그 중에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는 자가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사람에게 임한 것입니다. 이것을 질그릇에 보배를 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까요? 후패하는 겉 사람을 위하여 살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겉 사람인 질그릇이 깨어지는 방향으로 인도됩니다. 그래서 온갖 핍박이 다 와도 낙심을 안 합니다. 오히려 예수의 죽음인 십자가를 짊어지는 모습으로 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죽음에 넘겨지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다 가는 그 죽음의 길에서 생명을 얻은 자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두 가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과연 예수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는 사람인가? 또 하나는 내가 오늘 죽는다면 나의 자녀에게 무엇을 말해 줄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는 자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썩을 몸과 세상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몸과 썩지 아니할 나라를 사모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