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24:17~22 눈에는 눈으로 2019. 11. 10

 

17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18 짐승을 쳐 죽인 자는 짐승으로 짐승을 갚을 것이며 19 사람이 만일 그의 이웃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20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21 짐승을 죽인 자는 그것을 물어 줄 것이요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일지니 22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이스라엘의 율법은 종교적인 법만이 아니라 생활의 법과 같습니다. 종교법과 일생생활의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본 말씀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반드시 죽이라고 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이런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문제로 보이는 것 같지만 이 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면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지 않는 것이 사람을 참으로 살리게 됩니다.

 

우선 17절과 18절을 봅니다.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람을 죽인 것은 과실에 의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과실에 의한 것은 도피성이 마련되어 있습니다(35:11). 그러므로 사람을 고의로 살해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합니다. 짐승을 쳐 죽인 자는 짐승으로 갚아야 합니다. 21절은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22절은 결론입니다.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이 법은 동일하게 적용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이제 본문 19~20절을 봅니다. “19 사람이 만일 그의 이웃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20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이 법을 왜 주셨을까요? 인간의 과도한 복수를 막는 법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다가 상해를 입을 경우 어떤 마음이 듭니까? 내가 남에게 뺨을 한 대 맞았다면 상대방의 뺨을 내가 맞은 세기만큼 딱 한 대만 때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 죽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었는데 나는 상대를 죽여 버린 내용이 성경에 나옵니다.

 

창세기 4:23~24절입니다.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아벨을 살해한 가인의 후손 라멕의 말입니다. 최초로 아내를 두 명을 둔 사람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하는 일을 보면 성읍을 쌓고 문명을 발달시키고 무기를 만듭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이 자기를 스스로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끼리 다툼이 일어나니 자기는 상처를 입었는데 상대를 죽여 놓고서는 자기에게 보복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자기 아내들에게 가르칩니다. 가인을 위하여 벌이 칠 배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보복을 하면 벌이 칠십칠 배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법은 이런 폭력을 제어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를 보아도 이런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이 법은 과도한 복수를 금할 뿐 아니라 힘 있는 자들이 힘 약한 자들을 억압하지 못하게 합니다. 동태복수를 하게 한 것은 힘 있는 자들이 다른 것으로 배상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만약 다른 것으로 배상하게 하면 힘 있는 자들은 상대방에게 신체적인 상해를 해 놓고서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언제나 힘 있는 자들이 약자를 억압합니다.

 

열왕기상 21장을 보면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자기 왕궁 근처에 나봇의 포도원이 있는 것을 보고 그 땅을 가지고 싶어서 다른 땅을 받거나 아니면 돈을 줄 테니 그 땅을 자기에게 팔라고 합니다. 그러나 율법에서 땅을 사고팔지 못하게 하였기에 나봇이 거절합니다. 그래서 나봇이 답답하여 침상에 얼굴을 돌리고 누워 식사도 하지 않습니다. 이 모습을 본 이세벨이 해결하여 줍니다. 이세벨은 바알숭배를 하는 자의 딸입니다. 이세벨이 나봇을 모함하기 위하여 나봇이 사는 마을의 관리들에게 아합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깡패를 동원하여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죽여 버립니다. 나봇이 죽었다는 이세벨의 말을 듣고 아합이 그 땅을 보려고 갈 때에 엘리야가 개들의 너의 피를 핥을 것이며 개들이 이세벨을 먹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대로 되었습니다. 이 내용을 본 것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어떻게 약한 자를 죽이는지 보기 위함입니다. 이런 모습이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문제를 처리 하실까요? 즉각적인 심판이 구약에서 나타나시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악이 그쳐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38~42절입니다.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3)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오늘날 이 땅에도 권력형 비리가 얼마나 많은지 실감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하면 예수님을 믿고 따라갈 사람이 있겠습니까? 적어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여야 공의로운 하나님이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오른 편 뺨을 치면 왼편 뺨을 돌려대라고 합니까? 이어지는 말씀도 인간으로 불가능한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가기는커녕 이런 예수는 내 인생에 방해만 된다고 살해 하여 버렸습니다.

 

마가복음 12:6~8절입니다. “6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7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마가복음에서 이미 보았기에 이 부분만 봅니다. 오늘 본문의 법에 의하면 이 포도원 품꾼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에는 눈이라는 것은 신체상해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고의적인 살해이기에 진멸이 마땅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하였다면 온 세상이 다 진멸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을 죽인 자가 누구입니까? 죄인이 내가 맞습니다. 내 죄를 예수님께서 대신 짊어지신 것이기에 내 죄가 예수님을 살해한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인정하고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전합니다. 이것은 그 당시의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복음의 선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죽음에 이끌어 갑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은 우리의 죄의 삯을 예수님이 대신 지셨습니다.

 

누가복음 23:3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율법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그치게 하실 뿐 아니라 자신을 살해하는 자들을 향하여서도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한다고 하면서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자 두 사람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한 사람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중의 한 사람이며 또 한 사람은 십자가 처형을 하는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그런데 한 강도는 끝까지 예수를 욕하고 죽어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는 그 죽음이 자신을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심을 믿지 않는 이것이 심판입니다.

 

사도행전 7:54~60절입니다.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이 현장에 사울이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14~17절입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1)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십자가를 새롭게 본 것입니다.

 

이어지는 18~21절입니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공의로운 심판도 그쳐지는 자리입니다. 그 뿐 아니라 자신을 살해하는 자들을 향하여도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것이 십자가의 다 이루심입니다.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는 것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됩니다. 더 이상 폭력으로 원수 갚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심판은 주님께 맡기시고 그 십자가의 포용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복수의 힘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