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33:50~56 찌르는 가시   2021. 8. 1

 

50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 가 모압 평지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51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52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고 53 그 땅을 점령하여 거기 거주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소유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 54 너희의 종족을 따라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눌 것이니 수가 많으면 많은 기업을 주고 적으면 적은 기업을 주되 각기 제비 뽑은 대로 그 소유가 될 것인즉 너희 조상의 지파를 따라 기업을 받을 것이니 55 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56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지난주는 광야 노정을 보았습니다. 구약의 성도나 신약의 성도나 간에 다들 광야를 가는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더 나은 본향을 소망하였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본향은 향하여 가는 나그네임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성도에게는 찌르는 가시가 항상 등장합니다. 가야 할 방향을 바라보게 하는 가시입니다.

 

본문 50~52절입니다. 여리고 맞은편 요단강 강가 모압 평지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라고 합니다. 가나안 원주민을 다 몰아내야 하는 이유는 우상 숭배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란 형상을 만들어 섬기든지 아니든지 간에 탐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3:5). 탐심이 가득한 곳이 지옥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다 몰아내고 우상도 다 깨뜨리고 그들의 산당도 다 헐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세상이 이해하는 정복 전쟁이 아닙니다. 중세 시대 십자군 전쟁이 아닙니다. 산업혁명으로 원재료 약탈과 소비시장을 위하여 십자가를 앞세워 식민지를 개척하는 전쟁도 아닙니다.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입니다.

 

창세기 15:13~21절입니다.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른 죄악에 대한 심판입니다.

 

본문 53~54절입니다. 약속의 땅을 점령한 후에 거기 거주하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땅을 이스라엘의 소유로 주었습니다. 만물이 여호와의 것이기에 여호와께서 주시면 얻는 겁니다. 그 정복한 땅은 여호와 언약을 따라 여호와께서 앞장서셔서 싸워 주신 땅이기에 자기 공로를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5:14). 그러므로 종족을 따라 제비 뽑아 나누라고 합니다. 각 종족의 숫자를 따라 수가 많으면 많은 기업을 적으면 적을 기업을 주는데 제비를 뽑아서 차지하게 합니다. 제비를 뽑아 땅을 받는 이유는 개인의 능력을 따른 성과급이 없다는 겁니다. 성과급이 있다면 능력별로 좋은 땅을 더 넓게 차지할 것입니다. 이것이 탐심이라는 우상숭배의 정신이며 자본주의의 정신이기에 제비뽑기는 이런 세상의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공평하게 주어지는 은혜로운 나라를 보여주시는 제도입니다.

 

본문 55~56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원주민을 다 몰아내고 우상을 다 부수고 산당도 다 헐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그들을 남겨두면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그들을 남겨두면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일을 너희에게 행하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가나안 원주민들이 우상숭배라는 탐심의 죄를 심판하시는 그 심판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수아 11:21~23절입니다. “21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들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들의 성읍들을 1)진멸하여 바쳤으므로 22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아낙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았더라 23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요단강 동편의 두 지파 반의 군대도 함께 참여합니다. 허리를 자르고 들어가 남쪽을 정복하고 북쪽을 정복한 후에 여호수아가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그쳤더라고 하는데 문제는 22절에서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았다고 합니다.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가시가 됩니다. 가사는 삼손을 유혹한 기생이 나온 곳입니다. 가드에서는 골리앗이 나옵니다. 아스돗은 엘리 제사장 시대 때 언약궤를 빼앗아 간 곳입니다. 이처럼 다 몰아내지 못한 원주민들이 이스라엘의 눈엣가시와 옆구리의 찌르는 것이 됩니다. 다른 번역을 보면 눈에 가시와 옆구리를 찌르는 바늘 또는 옆구리에 박힌 바늘이라고도 합니다.

 

여호수아 23:11~13절입니다. “11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12 너희가 만일 돌아서서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가까이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서로 왕래하면 13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엣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

 

여호수아의 유언입니다. 1절부터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하나도 틀림이 없이 다 이루어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강한 적들을 물리치고 제비뽑아 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직 땅을 다 차지하지 못하였기에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그들을 다 몰아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이 올무와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눈엣가시가 되어 마침내 멸하여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합니까? 여호수아 사후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

 

사사시대 이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다 몰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을 다 몰아내지 못한 이유는 그들의 제도와 우상숭배가 좋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의 제도와 고엘 제도까지 다 주셨지만, 하나님의 법보다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우상숭배가 더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법이 아니라 탐심이라는 우상숭배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나라를 어떻게 하십니까?

 

본문 56절을 봅니다.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가나안 원주민들이 우상숭배를 하며 살았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자가 되니 하나님께서 가나안 원주민을 심판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망하고 남 유다는 바벨론에 망하는 겁니다. 이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사무엘하 7:14~16절입니다.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다윗 언약입니다.

 

시편 89:30~35절입니다. “30 만일 그의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하지 아니하며 31 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32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33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34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35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런 말씀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버림을 받을까 하는 염려는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삶의 어려움이 오면 나는 버림받은 자인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 눈엣가시와 같고 옆구리의 바늘과 같이 찌르는 사람과 사건들이 연속하여 나타납니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관계 속에서 일어날 때 우리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고민을 합니다. 이런 가시를 언약의 신실함이나 자녀이기에 징계하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어떤 분은 남편으로 인하여 힘이 든다고 합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어떤 선택을 할 때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선택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남편과 뜻이 맞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그동안 나의 선택이 무언지 돌아보니 결국 나의 선택은 나의 이익을 위한 죄악 된 선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부인이 안 되는 자들임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 평생에 눈엣가시와 옆구리의 바늘과 같이 찌르는 것이 따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은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가시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은사가 너무 커기에 교만하지 말라고 주시는 가시도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7~10절입니다.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려고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바울은 하나님의 여러 계시를 받은 일이 지극히 큽니다. 그런데 그로 인하여 자만하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너무 잘 아시기에 육체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 가시를 사탄의 사자라고 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주께 간구하였는데 오히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제야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내가 약할 때 온전하여 짐을 알았습니다. 약함으로 주를 더욱 의지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가시가 없었다면 바울도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가시는 성도에게 꼭 필요한 겁니다.

 

히브리서 12:5~8절입니다.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ㄱ)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는 일이 징계입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입니다. 그러면 언제까지입니까?

 

에스겔 28:24절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시돈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표현이 가시를 없애주신다고 합니다. 이러한 구원은 아직 그림자와 같은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구원, 다시는 탄식이 없는 구원은 몸의 구속이 일어나야 합니다.

 

로마서 8:18~23절입니다.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들이 성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고통만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탄식을 알게 됩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온갖 죄악 된 일들을 날마다 봅니다. 기술의 발달로 전 세계의 참상을 실시간으로 보는 시대입니다. 인종차별, 경제차별, 환경파괴, 기후재난과 같은 모든 탄식할 일들이 우리가 다 몰아내지 못한 우리의 탐심으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의 탐심의 결과가 부메랑이 되어 우리를 찌르는 가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자신의 탄식만이 아니라, 온 피조물의 탄식을 알기에 소망이 달라집니다.

 

이어지는 24~30절을 보면 보이는 소망은 성도의 소망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소망만 기도하는 자들이기에 성령께서 친히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시기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데 그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일입니다. 그 맏아들의 희생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기에 우리의 삶이 보이는 소망을 추구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더 큰 세상의 힘을 원하기에 세상은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우리가 성령이 임한 성도라면 가시가 되는 탐심들을 몰아내는 삶이 자족하는 삶입니다. 이런 자족은 그리스도가 전부임을 알고 믿는 자들에게 일어나는 은혜입니다. 이런 자들은 다시는 가시가 없는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