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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설교] [동영상설교]

에베소서 1:1-2 서론 2012. 3. 18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오늘부터 에베소서를 보려고 합니다. 이 편지가 에베소 한 곳만을 위한 편지는 아닙니다. 다른 곳에도 회람하게 한 편지로 봅니다. 그렇지만 에베소 중심으로 서론을 살펴보려는 것은 에베소의 환경을 보면서 이 시대에 복음이 전파된 다른 지역의 상황도 함께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는 바울사도가 2차 3차전도 여행 시에 복음을 전한 곳입니다. 2차전도 시에는 잠시 머물다 갔습니다.

 

사도행전 18:19-22절입니다. “19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 21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22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바울이 지금의 그리스 아테네에서 전도하고 다음으로 고린도로 갔다가 고린도의 겐그리아에서 배를 타고 에베소로 왔습니다.

 

제가 작년에 이 코스로 다녀왔습니다. 에베소 한 지역만 제대로 보려고 해도 하루 종일 보아도 다 못 보는 곳을 두시간만에 대충 보고 왔습니다. 이곳은 항구와 무역을 위한 중요한 도로 두 개가 연결되었기에 상업이 발달한 곳입니다. 2천 년 전 당시에 2만 5천명이 앉아서 관람할 수 있는 야외극장이 있었으며 도서관과 운동장과 공중목욕탕에 수세식 화장실 까지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길은 대리석으로 깔려 있었고 왕과 귀족들이 다니는 길은 길에다 모자이크 문양을 넣었습니다. 에베소에 가장 유명한 것이 풍요와 다산의 신인 아데미를 섬기는 거대한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곳에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었는데 바울이 가는 곳 마다 유대인들의 회당에 먼저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에베소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머물게 하고서 자신은 떠납니다. 떠나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뜻이면 돌아오리라고 하고서는 에베소를 떠나 가이사랴에 올라가서 교회의 안부를 묻고 안디옥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전도를 하다가 3차전도 여행 시에 다시 에베소로 와서 이곳에서 2~3년 동안 복음을 전합니다. 그 내용들은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보았습니다만 다시 보도록 합니다.

 

사도행전 19:1-41절입니다. “봉독”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성령에 대하여는 몰랐습니다. 이 당시에는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세례만 알고 성령이 계심을 듣지도 못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통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전통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사도는 이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증거 한 것입니다. 이것이 에베소서의 중심입니다.

 

바울사도가 이런 자들에게만 아니라 에베소의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바울이 전하는 이 도를 비방한 것입니다. 이 도란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러자 바울이 그들을 떠나서 바울을 따르는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을 하였습니다.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다고 합니다. 바울의 이런 모습을 보고서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악귀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늘 너희는 누구냐며 그들에게 달려드니 그들이 상하여 벌거벗고 도망갔다고 합니다. 이 일을 보고서 에베소의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자복하며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가지고 와서 불에 사르니 그 책값이 은 오만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황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이런 말씀을 보고서 손수건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있고 외국에도 있습니다. 목사가 손수건에 안수하여 보냅니다. 그러면 그 손수건을 아픈 아이에게 얹으니 나았다는 간증을 만민중앙교회의 전도지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방송에 나오는 사람이 손수건을 보내라고 합니다. 그냥 보내면 안 되고 심어야 한다고 하면서 돈을 넣어서 보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손수건에 기도하였다고 하면서 다시 보내고 그 수건을 아픈 사람에게 얹으면 낳는다고 선전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에 현혹을 당하여 그들의 밥이 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에 사람들이 끌려가는 것입니까? 우선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니 만약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되기에 할 수 없는 순종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들에게 이런 능력이 나타난 것은 지금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계시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계시가 완성이 된 시대에는 그런 표적과 기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이 성경말씀을 성령을 통하여 믿게 하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바울사도가 만약 계속 그런 표적과 기적을 행하였다면 사람들에게 배척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얻어맞고 핍박당하고 온 몸에 예수의 흔적이라는 상처도 없었을 것입니다.

 

21-41절에서 어떤 소동이 일어납니까? 23절입니다. 이 도, 즉 십자가의 도로 인하여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왜 소동이 일어났는가 하면 26절에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만이 아니라 사람의 상상에서 나온 신도 참 신이 아닙니다. 수요일 저녁에 말씀 드리고 금요일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사람의 마음에 상상하는 신이란 결국 인간의 자아실현이라는 욕망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에베소의 거대한 신전인 아데미 신전 때문에 먹고 사는 자들이 다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 연극장이라는 곳입니다.

 

이 소동으로 인하여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고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에베소의 장로들을 만나서 이별하는 장면이 사도행전 20:17-38절입니다. “봉독”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오게 하여 부탁합니다. 바울 자신이 어떻게 복음을 전한 것을 그들이 다 압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면 다시 에베소에 오겠다고 하고서는 떠났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에베소에 와서 다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지만 성령이 알려주시기를 각 성에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인데 이 일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보다 귀한 것을 발견하였습니까? 마가복음 8:38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목숨 버리는 것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기 생명을 조금도 아깝지 않다고 한 것은 바울의 복음은 세상이 복음 전하는 자를 죽일 정도로 싫어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소식은 모든 세상이 다 달려들어 그 소식만은 막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일이며 악마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사도행전 20:28절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교회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피로 갑주고 사낸 주의 백성들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피를 놓쳐버리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그저 또 하나의 세상의 친목단체일 뿐입니다.

 

바울사도가 떠나고 나면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이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적이 외부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을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였고 무엇을 전하였는지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울을 떠났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편지를 쓴 것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작별하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하자 가이사에게 항소하여 로마로 끌려갑니다. 로마의 감옥에서 이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를 빌립보서와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서신이라고도 합니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에베소교회를 향하여서만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교회에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특별한 문제에 대하여 편지를 보낸 것과는 달리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을 말하면서 교회가 어떠한 지위를 가지는지도 잘 증거 하고 있습니다.

 

이제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을 요한계시록에서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보낸 편지입니다. 사도 중에 가장 오래 살아남았던 사람입니다. 이 사도요한의 마지막 목회지가 에베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지만 요한의 무덤이 에베소에 있습니다. 요한의 무덤을 사진에 담아 와서 여러분도 보았습니다.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서 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에베소 교회를 향한 것입니다.

 

이미 바울의 전도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는 에베소 교회에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부탁한 내용이 자신이 떠나면 거짓 선생들이 올 텐데 조심하라고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산 교회를 무너뜨리며 자기들을 따르게 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적은 외부에서도 오고 내부에서도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에베소 교회는 거짓 선생들을 잘 구별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거짓 선생들을 구별하다보니 사랑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잃어버리면 교회가 아니기에 촛대를 옮겨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1-7절입니다. “봉독” 에베소 교회의 칭찬과 책망을 방금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과 참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울사도의 교훈을 받아 잘 감당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한 세대도 가기 전에 그리스도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합니다. 거짓 사도를 구별하느라 누구든지 의심의 눈초리로 보다가 잃어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떨어졌는데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촛대를 옮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대로 지금 에베소 지역은 터키라는 국가 이름으로 인구의 98퍼센트가 모슬렘입니다. 마을마다 한 두 개의 커다란 모스카만 오늘날 이 땅의 교회당처럼 보였습니다. 지금 이 땅의 마을마다 보이는 교회당들도 언제까지 남아있겠습니까? 거짓 사도들도 잘 분별하여 물리쳐야 함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산 교회의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이제 에베소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그 사랑의 자리에 성령으로 인하여 들어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