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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6:28-30 삼손의 부르짖음 2010. 3. 3

 

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29 삼손이 집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30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오늘은 삼손의 부르짖음을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삼손 그러면 영웅으로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여행자용 가방의 이름도 여기에서 따 와서 ‘샘소나이트’라고 합니다. 삼손처럼 튼튼한 가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연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삼손을 나실인으로 택하셔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나실인으로 태어나지만 삼손은 늘 자기 욕망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도 그런 삼손을 사용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사기이든 열왕기든 영웅의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우선 삼손의 출생을 13장에서 봅니다. 소라 땅의 단 지파 중에 마노아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니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면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고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으면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라고 합니다.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사사기의 패턴은 이스라엘의 범죄-하나님의 징계로 적들에 의하여 고생함-부르짖음-하나님이 사사를 세워서 구원하시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내용도 이런 패턴과 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부르짖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너희가 평소에 부르짖는 신들에게 구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들이 스스로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 구하면서 동시에 자구책을 구한 것이 입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입다에게 적들을 부쳐주시지만 결국 자구책으로 마련된 입다가 스스로 한 서원으로 입다의 딸이 희생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삼손의 등장은 입다 때의 모습과도 다릅니다. 13:1절을 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으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줍니다. 그런데 부르짖지도 아니하는 것입니다. 블레셋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것을 당연한 듯이 여기는 것입니다. 15:11절을 봅니다. “봉독” 삼손에게 왜 그렇게 하였느냐고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었다고 책망합니다. 그러면서 삼손을 잡아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것입니다. 블레셋의 지배를 당연히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형편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삼손을 통하여 구원하시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런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삼손을 중심으로 삼손의 부모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간에 모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먼저 삼손의 아버지의 기도입니다. 13:8절입니다. 마노아의 아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이야기를 하니 마노아가 기도합니다. 다시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셔서 우리가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하여야 할지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다시 아내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말하여 남편이 와서 여호와의 사자를 뵙게 됩니다. 그의 이름을 묻습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만 당신을 존귀하게 여기겠다고 합니다. 그때 답변이 어찌하여 이름을 묻느냐고 하면서 내 이름은 기묘자라고 합니다. 기묘자의 일이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4-25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대로 그 여인이 아들을 낳고 삼손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고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는데도 삼손은 이방여인과 결혼하고 또 기생에게 들어가고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서 나실인의 비밀을 토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삼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은 흔히 말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어서 사용된다는 그런 의미가 다 무너지는 것을 삼손을 통하여 보게 됩니다.

 

14:1-4절입니다.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려고 하니 부모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고 하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것은 이를 통하여 블레셋 사람을 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과 결혼을 하고 사자를 찢어 죽이고, 그 사자에게서 꿀을 취하여 먹고, 수수께끼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내고,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를 종용하여 답을 얻습니다. 삼손이 화가 나서 블레셋 사람 삼십을 죽여서 그 옷을 벗겨 수수께끼 푼 대가로 주고 그의 아버지 집으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그의 장인이 그 여인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린 것입니다. 얼마 지나서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의 아내에게로 오니 이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장인이 그 여인의 동생을 주겠다고 해도 거절하고 이렇게 한 것은 결혼을 파기한 것이기에 삼손이 블레셋을 치는 것입니다.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아 꼬리와 꼬리에 홰를 달아서 곡식밭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을 살라버린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이 한 것인 줄 알고 유다에 진을 친 것입니다. 그러자 유다 사람들이 왜 우리를 치느냐고 하자 삼손을 결박하여 넘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을 결박하여 넘겨주는 것입니다.

 

15:11절입니다. 삼손을 결박하여 넘겨주었습니다. 블레셋의 지배를 받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세워진 나실인을 묶어서 적에게 넘겨주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구원을 모르고 구원을 필요로 여기지도 않고 그저 세상에서 살아남아 목숨이라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괜히 힘들게 삼손 같은 구원자가 나와서 우리를 더 괴롭게만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허물과 죄로 죽어있다는 생각을 꿈에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말씀이 아무른 기쁜 소식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자는 말씀이 기쁜 소식이 아닌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에 모세가 그들을 인도하여 출애굽하려고 왔을 때에 그들의 노역이 가중되자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께서 책망하여 달라고 한 자들입니다(출5:20,21). 예수님을 재판한 대 제사장은 한 사람이 죽어서 모든 민족이 사는 것이 나은 것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9-53절입니다. “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하나님의 구원은 구원할 백성들에게서 구원자가 버림받는 모습으로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역설입니까? 구원하여 달라고 간절히 구하여서 구원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온 구원자를 배척하고 죽음에 넘겨버렸는데 그가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15:12-13절입니다. 삼손을 직접 죽이지는 않고 잡아서 결박하여 넘겨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직접 죽일 수 없으니 로마인들에게 넘겨서 사형에 처하라고 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14-17절입니다. 삼손이 묶인 채로 적에게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에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며 그의 팔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떨어지고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취하여 블레셋 사람 천명을 죽이고 그 나귀 턱뼈를 던지면서 그곳을 라맛 레히라고 합니다. 턱뼈의 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큰 구원을 이룬 삼손이지만 그도 연약한 인간입니다.

 

18절을 봅니다. 삼손이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으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레히의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와 삼손이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삼손이 구원을 하지만 삼손 자체의 힘이 아닌 것을 봅니다. 그저 자기 욕망대로 살았던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그를 구원자로 쓰시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하면 16:13절을 보면 다시 기생의 집에 들어갔다가 가사 사람들이 삼손이 들어간 성읍의 성문을 밤새도록 지키고 있다가 새벽이 되면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삼손이 밤중에 일어나 성문 짝과 문설주와 빗장까지 뽑아서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메어가 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사건과 연결시켜 보기도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삼손과 들릴라의 이야기입니다. 오래전에 영화로도 나와서 잘 아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서 결국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함으로 머리카락이 잘리게 되고 힘을 잃게 됩니다. 머리카락 자체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실인의 표인 머리카락을 자름으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되는 것입니다. 삼손은 세 번이나 여자로 인하여 곤경에 처합니다만 그러나 그 곤경에서도 하나님은 이루고자 하는 구원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은 삼손의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 맷돌을 돌리는 신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비참한 신세가 되었지만 한 가지 끊어지지 아니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습니다. 16:22절입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머리카락 하나 희고 검게 하지 못하는데 다시 머리털이 자라는 것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소한 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삼손을 통하여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일은 삼손도 모르고 유다백성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6:23-27절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신전에 모여서 삼손의 재주를 보려고 불러냅니다. 무려 삼천 명이 모였습니다.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28-30절입니다. 삼손은 단지 자신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두 손으로 두 기둥을 잡아서 함께 죽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몸을 굽히자 그 집이 무너짐으로 삼손이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죽으면서 죽인 자가 더욱 많았습니다. 구원자의 죽음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내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삼손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을 대비하여 봅니다. 삼손은 자기 욕망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삼손을 통하여서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도 삼손처럼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구원자를 배척하는 것은 자기들의 구원관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새벽기도회 시간에 보았습니다만 스바냐 2:15절 말씀에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들의 구원관은 구원자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삼손을 적에게 넘겨버렸는데 그 삼손이 죽음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버렸는데 오히려 그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원을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무조건 자신이 가해자며 살해자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구원관은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며,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의와 생명으로 옮기셨다는 것에 놀랄 뿐입니다. 이것을 경외라고 합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