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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9:30~37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 2016. 6. 26

 

30 예후가 이스르엘에 오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31 예후가 문에 들어오매 이르되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 하니 32 예후가 얼굴을 들어 창을 향하고 이르되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누구냐 하니 두어 내시가 예후를 내다보는지라 33 이르되 그를 내려던지라 하니 내려던지매 그의 피가 담과 말에게 튀더라 예후가 그의 시체를 밟으니라 34 예후가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이르되 가서 이 저주 받은 여자를 찾아 장사하라 그는 왕의 딸이니라 하매 35 가서 장사하려 한즉 그 두골과 발과 그의 손 외에는 찾지 못한지라 36 돌아와서 전하니 예후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라 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살을 먹을지라 37 그 시체가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같이 밭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 하였더라

 

오늘 본문은 이세벨의 최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이 이렇게 비참하게 되는 이유가 지난주의 말씀에서 들어있습니다. 그 이유로 인하여 이세벨의 최후가 이렇게 비참한 말로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이세벨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얼마나 자기중심으로 성경을 보는지 종종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옛 뱀으로부터 선악과의 유혹을 받을 때에 이것을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그 유혹에 넘어간 인생은 모두가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본성입니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세벨의 최후를 보면서 적어도 나는 이세벨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는 우리가 이세벨 같지만 이세벨처럼 우상숭배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성이 이세벨적인 자들입니다. 도대체 이세벨이 무슨 짓을 하는지 그 모습을 보면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인간이 이기적이지만 이타적인 인간도 있지 않느냐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중심이 되어 인간을 볼 때에 분명히 그런 이타적인 인간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런 이타적인 희생도 자아의 확대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아를 확대하면 자신의 가족, 교회, 국가, 인류입니다. 그러므로 인류를 위하여 위대한 발명을 하고 위대한 빛을 남긴 자들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자아의 불멸을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들끼리 의롭다고 합니다. 자기들끼리 진리를 추구하고 선을 추구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한다고 합니다.

 

지난주 목요일 경북 의성의 경중노회 6.25기념 구국기도회에 설교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한 주전에 충주의 한 목사님이 저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청주에서 초교파적으로 약 30여명의 목사들이 모여서 일주일에 한 번씩 구국기도회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음적인지 상담이 왔습니다. 이런 답변을 했습니다. 각 나라들마다 구국기도를 하지 않아야 평화로운 세상이 되겠지요! 각 나라의 애국자가 없다면 전쟁도 준비하지 않겠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국을 위하여 기도였기에 예수님을 배척하였다는 답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성도는 내가 속한 나라를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 중심의 구국을 위한 메시아를 기다렸기에 참된 메시아를 배척하였고 이스라엘이 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는 것이 무엇인지 증거 하였습니다.

 

이세벨의 최후가 되는 원인인 음행과 술수를 말씀드리면 이 이세벨의 최후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최후와 연결되고 앗수르와 바벨론의 최후와 연결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세벨의 영이 교회에 침투함으로 교회도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세벨의 모습과 그 세력의 확장과 그 최후를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한 시간에 다 다루지 못하기에 오늘의 본문은 사실 다음 주에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세벨의 최후의 장면만 보고 이세벨의 최후가 어떻게 오게 되는지 지난주의 본문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열왕기하 9:22절입니다. 요람이 예후를 보고 이르되 예후야 평안하냐 하니 대답하되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하더라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겠느냐고 합니다.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무엇인지 음행과 술수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이세벨이 멸망하는 모습과 같은 내용들이 등장합니다.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북 이스라엘, 남 유다, 앗수르와 바벨론에 다 있습니다. 이러한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를 통하여 이 세상이 어떻게 멸망하는지를 보겠습니다.

 

에스겔 23:1~10절입니다.“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두 여인이 있었으니 한 어머니의 딸이라 3 그들이 애굽에서 행음하되 어렸을 때에 행음하여 그들의 유방이 눌리며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나니 4 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 5 오홀라가 내게 속하였을 때에 행음하여 그가 연애하는 자 곧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사모하였나니 6 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준수한 청년이요 말 타는 자들이라 7 그가 앗수르 사람들 가운데에 잘 생긴 그 모든 자들과 행음하고 누구를 연애하든지 그들의 모든 우상으로 자신을 더럽혔으며 8 그가 젊었을 때에 애굽 사람과 동침하매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으며 그의 몸에 음란을 쏟음을 당한 바 되었더니 그가 그 때부터 행음함을 마지아니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내가 그를 그의 정든 자 곧 그가 연애하는 앗수르 사람의 손에 넘겼더니 10 그들이 그의 하체를 드러내고 그의 자녀를 빼앗으며 칼로 그를 죽여 여인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그에게 심판을 행함이니라

 

이세벨의 음행이 무엇인지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는 내용이 에스겔 23장입니다. 이세벨의 음행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음행이며 이방 나라들의 음행이며 오늘 우리의 음행들입니다. 오홀라는 북 이스라엘이며 오홀리바는 남 유다입니다. 이 이름에 공통적인 의미는 히브리어의 천막인 오헬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천막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천막을 치고 살았기에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것이 히브리서 11장의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간 길입니다. 그리고 오헬이라는 뜻은 하나님의 성막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천막을 치고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천막치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성읍을 짓고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것이 음행입니다.

 

북 이스라엘이 남 유다나 간에 이미 애굽에 있을 때에 음행을 했습니다. 애굽에서의 음행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고 애굽에서 적응하면서 살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음행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날마다 출애굽이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나타났을 때에 별세를 의논하였습니다. 이 별세라는 말이 출애굽이라는 엑소도스와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출애굽 할 마음 없이 애굽의 고기 가마를 좋아하며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 음행입니다. 이러한 음행하는 자를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하여 내십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도 음행합니다. 그 음행이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입니다. 약속의 땅 문턱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이들을 광야에서 죽이고 그 후손들을 약속의 땅에 들여놓았더니 또 무슨 짓을 합니까?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를 의지합니다. 이것이 음행입니다. 이 음행의 결과로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합니다. 이것이 이세벨의 음행인 것입니다.

이어지는 11~21절입니다. “11 그 아우 오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그의 형보다 음욕을 더하며 그의 형의 간음함보다 그 간음이 더 심하므로 그의 형보다 더 부패하여졌느니라 12 그가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연애하였나니 그들은 화려한 의복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말 타는 자들과 준수한 청년이었느니라 13 그 두 여인이 한 길로 행하므로 그도 더러워졌음을 내가 보았노라 14 그가 음행을 더하였음은 붉은 색으로 벽에 그린 사람의 형상 곧 갈대아 사람의 형상을 보았음이니 15 그 형상은 허리를 띠로 동이고 머리를 긴 수건으로 쌌으며 그의 용모는 다 준수한 자 곧 그의 고향 갈대아 바벨론 사람 같은 것이라 16 그가 보고 곧 사랑하게 되어 사절을 갈대아 그들에게로 보내매 17 바벨론 사람이 나아와 연애하는 침상에 올라 음행으로 그를 더럽히매 그가 더럽힘을 입은 후에 그들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겼느니라 18 그가 이같이 그의 음행을 나타내며 그가 하체를 드러내므로 내 마음이 그의 형을 싫어한 것 같이 그를 싫어하였으나 19 그가 그의 음행을 더하여 젊었을 때 곧 애굽 땅에서 행음하던 때를 생각하고 20 그의 하체는 나귀 같고 그의 정수는 말 같은 음란한 간부를 사랑하였도다 21 네가 젊었을 때에 행음하여 애굽 사람에게 네 가슴과 유방이 어루만져졌던 것을 아직도 생각하도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음행함으로 그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하는 것을 본 남 유다가 정신을 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남 유다는 바벨론과 음행을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눈에 보이는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음행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이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 음행하던 그 버릇이 나오는 것입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이 얼마나 멋있게 그려집니까? 화려한 의복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말 타는 자들과 준수한 청년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세상의 강함과 세상의 영광을 쫓아가는 것을 음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적인 음행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하체를 말하고 그들의 정수를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성적인 부분에 결벽증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그런 음행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음행을 비유로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세상의 자랑이 될 만한 것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가 미련하고 어리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말은 십자가를 말하는데 세상의 성공과 부와 권력을 주는 십자가로 말하는 것이 바로 음행이라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22~35절입니다. “22 그러므로 오홀리바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는 네가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을 충동하여 그들이 사방에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23 그들은 바벨론 사람과 갈대아 모든 무리 브곳과 소아와 고아 사람과 또 그와 함께 한 모든 앗수르 사람 곧 준수한 청년이며 다 고관과 감독이며 귀인과 유명한 자요 다 말 타는 자들이라 24 그들이 무기와 병거와 수레와 크고 작은 방패를 이끌고 투구 쓴 군대를 거느리고 치러 와서 너를 에워싸리라 내가 재판을 그들에게 맡긴즉 그들이 그들의 법대로 너를 재판하리라 25 내가 너를 향하여 질투하리니 그들이 분내어 네코와 귀를 깎아 버리고 남은 자를 칼로 엎드러뜨리며 네 자녀를 빼앗고 그 남은 자를 불에 사르며 26 또 네 옷을 벗기며 네 장식품을 빼앗을지라 27 이와 같이 내가 네 음란과 애굽 땅에서부터 행음하던 것을 그치게 하여 너로 그들을 향하여 눈을 들지도 못하게 하며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도 못하게 하리라 28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는 네가 미워하는 자와 네 마음에 싫어하는 자의 손에 너를 붙이리니 29 그들이 미워하는 마음으로 네게 행하여 네 모든 수고한 것을 빼앗고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음행의 벗은 몸 곧 네 음란하며 행음하던 것을 드러낼 것이라 30 네가 이같이 당할 것은 네가 음란하게 이방을 따르고 그 우상들로 더럽혔기 때문이로다 31 네가 네 형의 길로 행하였은즉 내가 그의 잔을 네 손에 주리라 32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깊고 크고 가득히 담긴 네 형의 잔을 네가 마시고 코웃음과 조롱을 당하리라 33 네가 네 형 사마리아의 잔 곧 놀람과 패망의 잔에 넘치게 취하고 근심할지라 34 네가 그 잔을 다 기울여 마시고 그 깨어진 조각을 씹으며 네 유방을 꼬집을 것은 내가 이렇게 말하였음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5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하시니라

 

음행하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질투가 어떻습니까? 그들이 사랑하던 앗수르에 의하여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코를 깎아 버리고 귀를 깎아 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코걸이도 귀 걸이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사치를 할 때에 어떤 사치를 하는지 봅니다.

 

이사야 3:16~26절입니다. “16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작거려 걸으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17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가 드러나게 하시리라 18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이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19 귀 고리와 팔목 고리와 얼굴 가리개와 20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21 반지와 코 고리와 22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 주머니와 23 손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24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기를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 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수치스러운 흔적이 아름다움을 대신할 것이며 25 너희의 장정은 칼에, 너희의 용사는 전란에 망할 것이며 26 그 성문은 슬퍼하며 곡할 것이요 시온은 황폐하여 땅에 앉으리라이게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음행입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의 멋진 남자들과 연애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이 이런 장식을 하고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신구를 착용하지도 못하게 코를 베어버리고 귀를 잘라버리는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에스겔 23:36~49절입니다. “36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오홀라와 오홀리바를 심판하려느냐 그러면 그 가증한 일을 그들에게 말하라 37 그들이 행음하였으며 피를 손에 묻혔으며 또 그 우상과 행음하며 내게 낳아 준 자식들을 우상을 위하여 화제로 살랐으며 38 이 외에도 그들이 내게 행한 것이 있나니 당일에 내 성소를 더럽히며 내 안식일을 범하였도다 39 그들이 자녀를 죽여 그 우상에게 드린 그 날에 내 성소에 들어와서 더럽혔으되 그들이 내 성전 가운데에서 그렇게 행하였으며 40 또 사절을 먼 곳에 보내 사람을 불러오게 하고 그들이 오매 그들을 위하여 목욕하며 눈썹을 그리며 스스로 단장하고 41 화려한 자리에 앉아 앞에 상을 차리고 내 향과 기름을 그 위에 놓고 42 그 무리와 편히 지껄이고 즐겼으며 또 광야에서 잡류와 술 취한 사람을 청하여 오매 그들이 팔찌를 그 손목에 끼우고 아름다운 관을 그 머리에 씌웠도다 43 내가 음행으로 쇠한 여인을 가리켜 말하노라 그가 그래도 그들과 피차 행음하는도다 44 그들이 그에게 나오기를 기생에게 나옴 같이 음란한 여인 오홀라와 오홀리바에게 나왔은즉 45 의인이 간통한 여자들을 재판함 같이 재판하며 피를 흘린 여인을 재판함 같이 재판하리니 그들은 간통한 여자들이요 또 피가 그 손에 묻었음이라 46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들에게 무리를 올려 보내 그들이 공포와 약탈을 당하게 하라 47 무리가 그들을 돌로 치며 칼로 죽이고 그 자녀도 죽이며 그 집들을 불사르리라 48 이같이 내가 이 땅에서 음란을 그치게 한즉 모든 여인이 정신이 깨어 너희 음행을 본받지 아니하리라 49 그들이 너희 음란으로 너희에게 보응한즉 너희가 모든 우상을 위하던 죄를 담당할지라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시니라

 

이세벨의 음행이 단지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굽과 앗수르와 바벨론도 다 이세벨의 영에 사로잡힌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을 믿는다는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음행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의 보암직한 일들과 세상의 힘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음행이라는 말입니다. 4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목욕하며 눈썹을 그리며 스스로 단장하고 있습니다. 바벨론과 음행하기 위한 그런 단장이 멸망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눈썹을 그리고 스스로 단장하고 있는 여인이 오늘 본문에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 30절입니다. 예후가 이스르엘에 오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예후가 왕궁으로 들어왔습니다. 자기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있습니다. 지금 죽기 직전에 이세벨이 이렇게 자신을 단장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후를 유혹하기 위한 교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이러한 이세벨의 모습이 북 이스라엘이나 남 유다가 오늘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음행이며 술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것이 바벨론에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하십니다. 더 이상 자기를 단장할 그 어떤 것도 없어집니다. 코와 귀가 칼에 잘려버렸는데 무엇으로 단장을 하겠습니까? 요즈음처럼 성형이나 이식수술도 못하는 때입니다. 그러면 이제 더 이상 자신을 단장할 수가 없습니다.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게 됩니다. 이렇게 버림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 음행한 자들의 결론이라고 율법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스라엘과 음행을 한 앗수르와 바벨론도 다 멸망합니다.

 

나훔 3:1~7절입니다. “1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2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4 이는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5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6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 7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폐하였도다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북 이스라엘의 음행의 상대였던 앗수르도 그들의 음행과 술수로 멸망합니다. 그런데 그 음행과 술수가 얼마나 매혹적인지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라고 합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미혹을 당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세상의 정치와 경제만의 유혹이 아닙니다. 종교라는 보암직한 것들도 마술에 능숙한 미모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기 힘이 드는 이유는 이런 이세벨의 영에 사로잡혀 있기에 힘이 드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음행을 하려면 돈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족이 없습니다. 더욱 눈을 그리고 머리를 단장하고 화장을 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는 스스로 만들어 입은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단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구역질나는 짓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7:1~11절입니다. “1 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일컬음을 받지 못할 것임이라 2 맷돌을 가지고 가루를 갈고 너울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라 3 네 속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내가 보복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 4 우리의 구원자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니라 5 딸 갈대아여 잠잠히 앉으라 흑암으로 들어가라 네가 다시는 여러 왕국의 여주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리라 6 전에 내가 내 백성에게 노하여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그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거늘 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7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여주인이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들의 종말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도다 8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 9 한 날에 갑자기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 네가 무수한 주술과 많은 주문을 빌릴지라도 이 일이 온전히 네게 임하리라 10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11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

 

북 이스라엘이 왜 앗수르에 멸망합니까? 자신들도 앗수르의 그 보암직한 세상의 영광을 가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북 이스라엘의 음행이었습니다. 남 유다가 왜 바벨론에 멸망합니까? 바벨론이 말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7~8 절에 보면 내가 영영히 여주인이 되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의 종말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이게 타락한 인생들의 본성입니다. 이것이 음행입니다.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전부 이세벨의 음행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바벨론에 의하여 유다가 망하지만 이 바벨론도 결국 망합니다. 그런데 바벨론을 멸망시키면서 그 안에서 자기 백성을 구속하여 내십니다. 이미 음행으로 더러워진 자들을 구원하여 내십니다.

 

오늘 본문의 음행이라는 단어와 같이 사용되는 곳이 다말입니다. 유다가 다말의 임신소식을 듣고 죽이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음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말은 유다의 씨를 이어주기 위하여 목숨을 걸었습니다. 유다가 자신의 행실을 부인하고 다말을 죽여 버려도 할 말이 없는 그런 시대입니다. 이 유다와 다말의 족보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와 음행을 합니다. 그 씨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또 같은 단어로 호세아서에 고멜의 음행을 말씀합니다. 이러한 음란한 여인이 우리들입니다. 이러한 음행한 여인과 결혼하면 그 남자도 부정함을 입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결혼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음행과 부정을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십자가만이 이세벨의 음행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는 자리가 됩니다. 그 십자가는 예수님 홀로의 십자가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자신을 나누시는 자리가 됩니다. 그렇게 자신을 나누심으로 우리의 부정함을 담당하시면서 우리 안에서 영원히 사시겠다는 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창기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그 자리가 천국이 이루어지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한 짓이라고는 음행밖에 한 것이 없는데 그 음행을 대신 담당하신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 곧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가 음행에서 피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들을 또 유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17~22절입니다. “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18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을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허탄한 자랑을 하고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을 하는 자들입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자들은 자신들의 의를 자랑합니다. 그런 것들이 허탄한 자랑입니다. 율법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양심을 따른 의로운 행위라는 것들도 단장을 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복음을 듣고 겨우 피하였는데 이들을 다시 유혹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음란과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합니다. 이것은 영지주의의 유혹도 있고 세상의 번영신학의 유혹도 나옵니다. 금욕주의나 신비주의의 유혹도 나옵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에서 눈을 돌리고 마음을 돌리는 것이 전부 음행입니다.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음행을 피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런 십자가에서 눈을 돌리고 마음을 돌리게 하는 것들이 다 음행입니다. 이런 음행이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됩니다. 마치 개가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씻었다가 다기 더러운 구덩이에 눕는 것과 같은 짓들이 음행입니다. 이것이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들입니다.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눈과 마음에 밝히 보여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