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4:8~9 무엇에든지 2018. 6. 24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이제 빌립보서의 마무리가 됩니다. 그래서 끝으로라고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지난주에 본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우리의 모든 일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모든 일을 하나님께 아뢰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한 주간 이 평강을 맛 보셨습니까?

 

빌립보 교회는 밖의 대적들과 안의 내분으로 평강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러한 환경보다 더 놀라운 참된 평강을 누리도록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 평강을 누리는 길은 지난주의 말씀은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도 평강인데 이러한 평강을 맛보려면 무엇에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울에게서 배우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생각도 해야 하고 행하여야 할 내용도 있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을 봅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표준 새 번역으로 봅니다. 마지막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지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지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을, 이 모든 것을 여러분은 골똘히 생각하십시오.”

 

다른 번역으로 살펴본 이유는 이 본문의 해석이 많은 논쟁이 있는 본문입니다. 어떤 논쟁이 있는가 하면 8절에 나오는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 받을 만하며, 칭찬 받을 만하며, 덕이나 기림이 있든지 이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단어가 헬라어로 기록되었기에 그 당시에 헬라사회에서도 이런 용어들을 가지고 덕스럽게 살라는 가르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본문으로 세상에서 아름답고 가치 있다는 것을 성도도 공유하고 추구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그런 내용이 아니라 이러한 목록들이 다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일반은총의 측면에서 세상의 선한 것도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반은총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이를 수 없습니다.

 

로마서 1:18~23절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타락하였기에 이러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서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지만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과 우주의 엄청남만이 아니라 작은 들풀 하나 작은 벌레 한 마리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들이 있지만 인간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탐심을 위하여 착취하고 남용하고 오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타락하여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어 살아가는 인간들도 진리와 선함과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참된 것, 고상한 것, 옳은 것, 순결한 것, 사랑스러운 것, 영예로운 것,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들을 생각하고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정의도 말합니다.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들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이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정의에 대한 갈급함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책에서도 정의를 생각하게만 하지 정의에 대한 답을 내리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어 열차가 달리는데 앞에 인부 5명이 일하고 있습니다. 멈출 수는 없는데 다른 길로 방향을 틀면 한 명을 희생시킨다고 할 때에 무엇이 정의로운 것인가를 묻는 방식입니다.

 

이 질문에 대부분 다수를 위하여 소수의 희생을 말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철길 위의 다리에 있습니다. 기차는 달려오고 5명의 일하는 사람을 덮치기 직전입니다. 그런데 다리 위의 덩치 큰 사람을 떨어뜨리면 열차를 멈출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질문에는 대부분 소수가 희생함으로 다수를 살리는 것이 정의라고 합니다. 이런 생각을 공리주의라고 합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하여 최소에 속하는 사람들은 희생되어야 한다면 이것이 과연 정의입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문화적인 시각으로 성경을 읽으면 오독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세상의 가치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지난주에 설전(舌戰)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독일인, 일본인, 중국인, 미국인을 초청하여 이야기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자와 교수와 학생들인데 이들에게 남북의 문제를 질문하니 각 나라마다 자기들의 이해가 다른 것입니다. 남북한을 중심으로 문제를 풀어 나가기보다는 각자의 자국의 이익을 따라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참된 것, 고상한 것, 옳은 것, 순결한 것, 사랑스러운 것, 영예로운 것,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들이 어떤 것입니까? 나라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남한의 옳은 것과 북한의 옳은 것이 다릅니다. 한국의 명예로운 것과 일본의 명예로운 것이 다릅니다. 중국의 덕스러운 것과 미국의 덕스러운 것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세상의 진선미와 의도 무너뜨립니다. 그러한 의를 주장한 결과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10:2,3).

 

고린도후서 10:4~6절입니다.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바울사도가 고린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에 오기 전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스 아테네는 철학의 도시입니다. 자유민들은 노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하는 일은 새로운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이곳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별 열매가 없습니다. 바울도 헬라 철학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시인의 말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방식으로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이 아님을 바울이 알게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에 가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사람의 지혜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으로 세워지기를 원한 것입니다. 성령의 나타님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지역에 십자가의 도를 전하자 그곳에서 믿는 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른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고린도 교회에 외모를 자랑하는 자들이 와서 바울을 좋지 않게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추천장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런 자들의 말을 따라가는 것을 보고 바울이 책망합니다. 우리가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육신에 속한 것이란 철학자들도 말하는 진선미와 같은 것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록들을 세상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복음이 핍박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도 즉 복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생각과 이론들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복음은 세상이 받을 수가 없는 내용입니다. 사도행전 24:5절입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장로들과 변호사를 대동하여 벨릭스 총독에게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의 도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존의 이론과 생각이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됩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이러한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생각과 이론들이 십자가 앞에서 무너지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다시 봅니다. 마지막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지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지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을, 이 모든 것을 여러분은 골똘히 생각하십시오.” 이러한 내용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개념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환영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라면 세상이 배척을 합니다. 바울사도가 이렇게 살았지만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알아봅니다.

 

고린도후서 6:3~7절입니다.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들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반응들이 나오는지 이어지는 말씀을 봅니다.

 

8~10절입니다.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오늘 본문의 목록들이 세상에 속한 덕목이라면 바울은 누구보다 이런 목록대로 실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목록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이기에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깨끗함과 오래 참음과 성령의 감화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복음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의 일행이 욕됨, 악한 이름, 속이는 자, 무명한 자, 징계를 받는 자, 근심하는 자, 가난한 자, 아무 것도 없는 자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영광, 아름다운 이름, 참됨, 유명함, 살아있음, 항상 기뻐함,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함, 모든 것을 가진 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사역은 고린도 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에 이렇게 사역을 하였습니다. 당연히 빌립보 교회에도 이렇게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과 순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들을 마음속에 품으라고 합니다. 이러한 목록은 세상에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에게서 이런 목록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에든지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이 모든 목록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2:5~8). 또한 믿음의 창시자이며 믿음의 완성 자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12:1~2).

 

본문 9절입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바울사도가 자신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사도(使徒)란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만 보면 우리를 다시 어떤 행함을 따로 해야 할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명령은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자기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도라면 이 길을 가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길을 가게 될까요? 모든 일에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주에는 모은 일을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감사함을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기도하는 것처럼 오늘 말씀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참된 것인지? 경건한 것인지? 옳은 것인지? 정결한지? 사랑받을 만한 것인지? 칭찬받을 만한 것인지? 무슨 덕이나 기림이 있든지 이런 내용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그리스도나 사도가 우리의 모델이 되고 우리는 그 모범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흘러 차고 넘쳐서 나타나게 하십니다.

 

빌립보서 1:6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그러므로 성도는 이러한 말씀들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이 역사 속에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이미 그리스도아 함께 하늘에 앉혀진 자들이기에(2:6) 이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기도하시고 무엇이든지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이미 영광의 보좌에 계십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 백성도 함께 그곳에 앉히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무엇에든지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면서 살아가면, 묵시로 완료된 그 일들이 말씀과 성령으로 확인이 되기에 지금 여기서부터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세상이 줄 수도 없는 하나님의 평강을 맛보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