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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8:1~9 율법을 버린 자 2018. 7. 11

 

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2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되느니라 3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으니라 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5 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6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7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음식을 탐하는 자와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 8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늘리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해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 9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율법이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옵니다(4,7,9). 4절과 함께 보면 율법을 버린 자가 악인이며 율법을 지키는 자가 의인이 된다는 도식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성경을 통하여 보고 듣고 배운 바는 인간이 율법을 지키지 못함을 알고 있습니다. 지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이런 말씀을 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을 통하여 무엇이 악이며 무엇이 의가 되는지는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타락한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선악체계가 있어서 온간 변명과 핑계로 자신은 악인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모든 성경을 통하여 자신이 율법을 버린 자 임을 알고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의 목적을 다시 봅니다.

 

잠언 1:1~7절을 봅니다. “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2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3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4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5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6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이것이 잠언의 목적입니다. 잠언을 통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이지만 미련한 자는 그 훈계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를 오늘 본문으로 보면 율법을 버린 자가 됩니다. 율법이란 율법의 조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봐야 합니다. 시편 119편에서 176절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기를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 주의 도, 주의 법도, 주의 율례, 주의 모든 계명, 주의 의로운 판단, 주의 말씀, 주의 규례들이라는 다양한 표현을 합니다.

 

이 모든 구약의 표현들이 세례요한의 손가락으로 모아져서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하였습니다(1:29). 예수님은 모든 성경이 자신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5:39). 그런데 이 사실을 아무도 알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시고 성령을 부어주시면 이 말씀을 알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구약 성경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주시자 사도들도 구약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 합니다.

 

본문 1절입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다고 합니다. 악인의 모습을 최초의 타락에서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부끄럽고 두려워서 무화과 나무아래 숨은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먹는 것이 타락이지만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안식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난주 오후에 안식일의 개혁이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완성된 안식에 참여시키시는 일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선악주체가 되어 이루어내는 안식이 아니라 하나님 홀로 이루어내신 안식에 들어가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 안에 있지 않으면 모두가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어떤 악을 행하지 않아도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생존과 안전에 대한 두려움이 타락한 모든 인간에게 본능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사회적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두려움이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진 것임을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통하여 보여주신 두 가지 악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전합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이라고 합니다. 이 웅덩이는 터진 웅덩이라서 물을 저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2:13). 이것이 악입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 제목처럼 율법을 버린 자와 같습니다.

 

본문 1절을 다시 봅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상적인 삶에도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교통신호를 잘 지키는 사람은 길에서 교통순경을 보아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통신호를 어기지 않아도 다른 범죄를 한 사람이라면 교통순경이 아니라 모범운전수가 교통안내를 하고 있어도 놀라서 도망갈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이라면 사자 같이 담대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의인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그 약속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은 천만인이 둘러서서 진을 쳐도 두렵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3편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대적이 얼마나 많은지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을 친다고 하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자신을 붙들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음을 믿음으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사방에 자신을 헤치려는 자들로 가득하기에 두렵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느냐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다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도단성의 엘리사와 그의 사환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열왕기하 6:15~17절입니다. “15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오늘 본문 1절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을 가는 자가 악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도단성은 적들이 말과 병거로 포위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사환이 이 모습을 보고 놀라서 엘리사에게 말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적들보다 엘리사를 둘러싼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이란 주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자신이 자신을 지키려고 하기에 두렵지만, 의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이기에 적들이 사방에 진을 치고 있어도 평안하게 잘 수가 있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된다고 합니다. 새번역은 이렇습니다. “나라에 반역이 일면, 통치자가 자주 바뀌지만, 슬기와 지식이 있는 사람이 다스리면, 그 나라가 오래간다.” 북 이스라엘은 남 유다보다 짧은 역사이지만 왕들이 자주 바뀝니다. 반역과 반역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남 유다는 다윗의 씨로 이어집니다. 때론 반역이 있어도 곧 회복되는 것은 다윗 언약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명철과 지식으로 다스리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여야 합니다. 그런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위에 앉아서 영원히 왕 노릇 하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1:31~33).

 

3절입니다.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다고 합니다. 가난한 자가 갑자기 재물이 많아지거나 권력을 차지하게 되면 가난한 자들을 더욱 학대하는 경우가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 모른다는 말처럼 자수성가한 사람이 가난한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기 보다는 더욱더 자신의 부를 채우기 위하여 약하고 가난한 자를 더 악착같이 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은 곡식을 남기지 않는 폭우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보면 이러한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언약과 사랑으로 구원하여 약속에 땅에 들여놓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애굽에서 나그네처럼 살았기에 너희의 땅에서 약자를 잘 돌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자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착취함으로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4절입니다.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합니다. 이스라엘은 왕이 필요가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왕을 요구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왕 되심을 버리는 일입니다(삼상8:7). 백성들이 원하여 왕이 세워지지만 왕이 율법을 버리면 백성들이 고생을 합니다,. 이때에 선지자들이 등장합니다. 왕이라도 율법을 버리면 책망을 합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율법을 버리는 왕을 칭찬함으로 자기들의 이득을 챙깁니다. 그러므로 악인을 칭찬하는 자가 율법을 버리는 자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참된 선지자는 다 핍박을 받았지만 거짓 선지자들은 세상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이사야 5:20~24절입니다. “20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1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2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3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24 이로 말미암아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율법을 버리는 자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5절입니다. 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4절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버린 자는 정의를 깨닫지 못하지만 율법을 지키는 자 곧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는다고 봐도 됩니다. 율법을 버린다는 것은 말씀을 버린다는 것이며, 말씀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의 근원을 버리는 것이며, 결국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여호와를 찾는 것도 두 종류입니다. 그 마음에 간사함을 두고 찾는 자가 있는가 하면 나다나엘처럼 그 안에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이들이 남은 자이며 다른 말로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남은 자가 된 자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여호와의 뜻을 찾는 자들입니다.

 

호세아 6:1~6절입니다.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이것이 여호와를 찾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지자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약속대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돌이켜 열심히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문자대로 지킬 뿐만 아니라 더 잘 지키려고 여러 가지 부칙을 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키는 자기들은 의인이라고 여기고 세리와 죄인과 창기와 이방인들을 죄인으로 여기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호세아 6:6절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버리지 않고 여호와를 찾는 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제사와 제물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애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인애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죄인에게 베풀어주시는 일방적인 긍휼과 자비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찾는 다는 것과 율법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러한 뜻을 아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러한 말씀은 세상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보다 더 강력한 유혹이 부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유해지려고 합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부요해지면 사람들이 칭찬합니다. 이것이 자본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세상이 이러하여도 이스라엘은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렇게 됨으로 나라가 망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교회 곧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부정하게 부를 축적한 사람보다 낫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이름은 교회라고 해도 이미 망한 곳입니다.

 

7절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음식을 탐하는 자와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라고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가 어떤 자인지 지금까지 살펴봤습니다. 이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지 않고 비록 가난할 지라도 성실하게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여호와를 찾음으로 정의를 아는 자들이며 율법을 버리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버리는 자들은 음식을 탐하는 자와 사귀게 됩니다. 음식을 탐한다는 것은 음식만이 아니라 모든 탐심을 따라가는 자들과 사귀는 자들은 아버지를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가 됩니다. 아비란 지혜의 전달자입니다. 그러므로 아비를 욕되게 한다는 것은 결국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늘리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해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가난한 자를 돌보시는 여호와께 꾸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14:31, 19:17). 그런데 고리대금으로 자기 재산을 늘리는 자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이기에 그들의 재산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며 오히려 가난한 자를 위하여 도와주는 사람을 위하여 사용될 것이라고 합니다(13:22). 그런데 세상은 이런 일들이 많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은 결국 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누가복음 16:9, 13절입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비유의 결론입니다.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해석이 너무 많아서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결론을 보면 간단합니다. 사람이 두 주 인을 섬길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의지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율법을 버린 사람이며 하나님을 버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잠언서의 말씀도 율법을 버린 자들은 결국 무엇을 추구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보고 돌이켜 회개하는 길은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고백을 하면서 고백한 대로 사는 자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런 믿음의 삶이라는 것은 주님의 은혜로 나타납니다.

 

9절입니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다고 합니다. 율법을 버리는 자를 여기서는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않는 자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라고 자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도하고, 금식하고, 구제하고, 전도하는 티를 내고 다닌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기도조차 가증한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을 가증한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기도합니까? 한국교회 전통은 수요일 모임을 대부분 수요기도회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도보다 말씀을 먼저 전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율법을 버린 자의 기도가 된다면 그것이 가증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핵심내용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22:37~40). 이렇게 되기를 기도하지 않는 것이 율법을 버린 자의 기도이며,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 자의 기도가 되기에 가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의 말씀이 먼저 들려지도록 기도하는 이 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